글쟁이가 되는 길은 고되고 길다. 길어서 길인가부다 ㅋ
1. 동시 쓰기
어려서 병약했다. 한달에 여러 번 병원에 갔던 것으로 기어하는데, 나는 보물섬 세대여서 병원에 비치된 최신 보물섬을 보았다. 누가 그 책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아픈 데가 더 아픈 것만 같았다. 보물섬에서 즐겨 보던 부분은 뒤에 나온 사컷만화, 독자가 허접하게 그린 그림이라 애정이 갔다. 나도 집에서 종이에 십자를 그어 놓고 그림을 그려 보았으나 포기했다. 의사가 부르면 마음 속으로 '다음에 아프면 또 와야지'하고 의사방에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아이들처럼 뛰놀지는 못하고 동시를 썼다. 그때 쓴 시를 생각하면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은 못 되는 것 같다. 이오덕 선생에게 내 시를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이런 식이다.
5월은 / 어린이 달 / 우리의 푸른 세상 //들로 산으로 / 뛰쳐 나가자...노래하자 다 함께 / 얏호
이에 대한 이오덕 선생의 평은 "이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 아니라 6학년이 썼다고 하더라도 아이의 말이 아니다. 이 글에는 어린이의 마음이 없고 삶이 없다. 어른의 말이요 구호요 개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시절 반공이야기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국군 아저씨가 공산군의 탱크 아래나 적군의 바위 기지에 바싹 다가가 수류탄을 던져 깨뜨리는 장면에 아주 통쾌해하던 아이, 대응댐에 모금을 해야 한다며 엄마를 조르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요즘도 자주 는실난실 끼어든다. 그리고 7.5조라는 이상한 법칙에 매여 제대로 내 생각을 풀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기쁨을 처음으로 봤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지.
2. 백일장 시 쓰기, 시인과의 만남, 축시 쓰기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갔다. 책읽기를 싫어해서 단 한 권의 시집도 보지 않았고, 내가 최고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시 실력이 형편 없었다. 도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가면 가작 이상은 입선할 수 없었다. 그때 부모님에 관한 시를 썼는데, 지금도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추상어 투성이었지만, 이모는 그 시를 보고 우셨다고 한다. 엄마도 매우 흡족해 하셨는데, 그 시가 어떻게 사람을 울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내가 시인이 아니라 우리 이모와 엄마가 시인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지금도 시인이다.
대학은 공대를 들어갔지만, 문학동아리에 발을 붙였다. 전공을 비실비실하다가 국문학과로 전과를 했다. 그때 선배들의 영향으로 많은 책과 시집을 읽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참 내 이야기와 같아서 감명을 받았다. 박노해 식 시쓰기의 세례를 받고 사회문제에 관한 시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도현을 만났다. 안도현의 감성적인 시들은 나를 흥분시켰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같은 시는 당시 산문시 중심으로 썼던 나의 시 쓰기에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하면 빼뜨릴 수 없는 시인이 그로테스크의 요절 시인 기형도가 있었다. 기형도는 하나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특히 메모하듯 써내려가는 시어들이 시가 되는 모습이 환상적이어서 그와 비슷한 시를 쓰려고 막 흉내를 냈던 것 같다. 천상병의 아이 같은 시도 좋았다. 천상병의 출세작을 보고 우연히 천상병 주제의 연극(최초로 본 연극)을 보았는데, 시인의 인생이 마음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때 매문이라는 것을 처음 썼다. 문학동아리의 집행부를 맡고 있었는데, 항상 자금이 바닥이다. 그러면 주요 전략은 '축시 비지니스'
나도 결혼을 해봐서 알지만, 결혼식 이벤트로 축시는 제격이다. 제법 운치도 있고, 손님들도 부러운 눈치로 본다. 대충 노래부르거나 하는 것보다는 훨씬 격조 있지 않느냐.
축시를 쓰면서 시 쓰기에 대한 회의를 많이 느꼈다. 나의 시 쓰기는 그래도 엄격했던 모양이다. 둘은 좀처럼 섞이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든 축시든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소용이 된다면 외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최근에 썼던 축시는 돈 안 받고 마음으로 쓴 가족축시였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일본인 손윗동서"(허걱~길다)와 일본으로 시집가는 처형을 위해 일본의 개국신화를 바탕으로 시를 지었다. 내가 시를 쓰고, 처제는 그림을 입히고, 큰 처형의 가족들은 열심히 낭송을 연습했다. 큰 처형이 시낭송 모임의 회원이기 때문에 그 가족은 시적인 향취가 대단하다. 조카 둘은 일본인 손님들을 감동시켰고, 처형은 일본에서 잘 지내고 있다. 시 하나로 가족이 하나되는 경험은 그 전의 시 쓰기에서는 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만약 내가 축시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었다면 이런 체험에 도달하기는 어려웠겠지. 암튼 대학 때 만났던 시인들이 지금은 다른 시인에 의해서 모두 헤어지게 되는데, 그 시인은 다음 회차에 공개한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아이들
시작 : 승주나무 (손아랫동서)
낭송 : ***, *** (조카)
시화 : *** (처제)
- 2008년 1월 27일 둘째 처형과 손윗동서 형님의 결혼을 축하하며
※ 이 시는 일본인 가족을 위해 일본 개국신화를 토대로 재구성했으며,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부부를 상징하는 개국신이며 우리나라의 단군왕검에 비유할 수 있다. 부부는 음양을 상징하므로 뜨겁고 차가운 이미지를 대비시켰고, 이들이 물방울로 땅과 섬을 만들었다는 모티브를 활용해 가족의 번성을 기원했다. 감귤빛 하늘은 제주 특허이므로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