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인터뷰하다
slow news가 요청되는 시대
slow와 news를 함께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자 모순이다.
속도경쟁을 부추기는 기성의 언론들에게는 슬로우 뉴스를 기대할 수 없다. 사건이 생긴 날 저녁에 이미 뉴스의 생명이 기울어지며, 다음 날 저녁이 되면 그 뉴스는 완전히 사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속도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관성일 뿐 뉴스란 반드시 ‘속보’라는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뉴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성찰부재'이다. 시사IN의 1주년 기념식에 초대가수로 무대에 선 정태춘 씨는 신문을 끊은지 한참 됐다고 했다. 신문은 태교에도 안 좋기로 소문이 났고, 예술가나 학자에게도 필요악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꼭 신문을 통해서 알아야 하느냐는 자조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각인된 신문은 '사기' 그 자체다. 신문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척하면서도 실은 하나도 새롭지 않을 때가 많다. 신문을 한달 정도 보다 보면 지겨워서 덮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신문을 놓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관성' 때문이다. 미국의 양심인 노엄 촘스키는 신문을 정의하며 "가치관과 신념, 행동규범을 간섭하면서 사회의 제도적 구조 속으로 대중들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고를 갖지 못하고 대충 현실에 영합하며 살도록 조장하는 게 신문이라는 이야기다. 예술가 같은 초감수성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신문을 멀리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신문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신문이 대중화돼 있다는 말이며 대중과 가깝다는 말이다. 때문에 관점만 달리한다면 얼마든지 대중에게 성찰적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책을 읽을 여유가 되지 않는(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지만) 사람에게는 좀 느린 속도로 걷는 뉴스가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문제는 느린 뉴스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주느냐이다. 실로 슬로우 뉴스가 요청되는 시대다.
슬로우 뉴스slow news 운동
걷기를 즐겨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걷는 것이 뛰는 것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섬광같은 영감이 지나가는 속도는 뛰는 데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걷기는 온몸으로 하는 기도요, 두 발로 추구하는 선(禪)”이라고 말했다.
슬로우 푸드는 우리 몸에 붙어서 우리 몸이 되지만,
패스트 푸드는 생김새만 음식이지 몸에 붙었다 이내 쓸려나가버리거나 몸을 괴롭히기만 한다. 슬로우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 인식의 섬광과 자생적 진화를 회복할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속도가 빨라지고 기술이 발전되면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은 점점 외부 사물에 의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인식의 진화는 그만큼 더뎌지고 있다. 다만 인식을 독점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점점 불균형해져만 간다.
슬로우 뉴스는 기존의 뉴스 개념을 거부한다. 시간 개념을 완전히 거스르지는 않지만, 집착하지는 않는다.
슬로우 뉴스는 당장 클릭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곱씹으며 찬찬히 생각해볼 수 있게 한, 인터넷 기반과는 매우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서는 속도가 아니라 슬로우에 더 반응하며, 속도에 환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느린 것을 갈망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미 유통되고 있는 살아가는 이야기나 생활글, 책에 관한 글들은 슬로우 뉴스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30년 동안 기자질을 해온 서명숙이라는 여성의 글을 읽으면서 나부터 슬로우 뉴스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주 걷기 여행>은 저널리스트의 탈 저널리즘적 도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런 조용한 일탈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나는 기성 기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사를 써왔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속도경쟁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도 속보가 나의 기사에서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만, 조용히 반 속보적인 기사를 선보이려 한다.
만약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행보라면 먼저 그 일을 하고 있거나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