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는 바틀비 씨와 쌍둥이 같다.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소설에서 만나면 꼭 인사를 해야겠다

그렇지만 아무도 좀머 씨를 봤다거나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2주일이 더 지난 다음 리들 아줌마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기로 했고, 그 후 몇 주일이 지난 다음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광고가 아무도 그 사람이 좀머 아저씨란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아저씨의 여권용 사진과 함께 나왔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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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유명한 중편소설 《변신》을 읽고 놀랐던 점은 그레고르 잠자가 그렇게 흉측한 벌레가 되었는데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말했다. "지금 나는 방에서 유령을 보았어요."

"마치 수프 속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불쾌하게 말하시는군요."

「불행」


<나>는 유령을 본 것을 "수프 속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하지만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유령이 나타나더라도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의 원인과 불행의 본성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가지고 있다. 불행 또는 유령의 잦은 방문이 《변신》과 연결되는 지점이 독특한데 《변신》의 경우는 카프카의 몸으로 방문했다. 집이 아니라!


불행의 방문이 잦았던 것처럼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익숙하다. 마치 오래되었만 언제나 적응이 안 되는 관계처럼. 흥미로운 건 불행이 아이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왜 아이의 모습이었을까? 그것도 소녀의 모습으로.


"나는 아이입니다. 왜 그렇게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십니까?"

"그리 마음 상하진 마세요. 물론 당신은 아이입니다민 그렇게 어리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어른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녀였다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나와 한 방에 틀어박혀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불행」




소녀를 의인화한 「불행」은 '죽음'을 의인화한 그림책 『오래 슬퍼하지 마』를 생각나게 한





집과 몸은 연관이 깊다. 미디어 전문가 마셜 매클루언이 "집은 몸의 연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만의 사적 공간이자 안정적인 재생산의 장소인 집에 불청객이 방문한 것은 몸이 흉측한 괴물로 변신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집에 방문한 불행이라는 손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방문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불행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불행이 '세게' 상처를 내는 것보다는 사소한 스크래치 정도로 넘어가 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불행의 경우 운명의 서슬퍼런 명령이기에 불행도 어쩔 수 없겠지만, 불행 스스로가 결정할 있는 내용물이라면 협의나 흥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둘은 오랫동안 불행의 견적에 대해서 협의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본성은 나의 본성이며, 내가 원래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진대 당신도 그렇게 할 도리밖에는 없을 텐데요."(<나>)

"그게 친절한 것입니까?"(불행)

"나는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나>)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불행)

「불행」


암 투병중인 중년의 사나이가 도서관의 논어 읽기 모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암세포가 있는 부분을 손으로 다독이면서 인사를 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찾아온 암이라는 불행과 매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불행은 안 만나면 좋겠지만 누구도 불행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때로는 흥정을 해야 할 일도 있다.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경우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행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나와 연관돼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와 완전히 상관 없는 불행도 있을 테지만 내가 일으킨 날갯짓이 불행을 부른 경우가 더 많다.


카프카는 왜 어린 소녀를 불행의 전령으로 택했을까? 불행이 사뿐히 걸어 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불행이란 게 앞문을 닫으면 뒷문으로 들어오는 날렵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오래 슬퍼하지 마』의 죽음보다는 어리고 가벼워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불행이 떠나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조용히 산책을 하려고 했으나 외출은 하지 않고. 불행이 전혀 방문하지 않는다면, 불행이 나를 완전히 떠나버린다면. 카프카는 불행의 의미에 대해서 나에게 다시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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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모든 작품에 어버지의 메타포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주되었다. 카프카는 형이상학적인 아버지를 그려냈다. 나는 어버지의 상상력을 사회 전체로 넓히던 와중에 토론이라는 무기를 발견했다. 토론이 자라는 곳에서는 아버지의 독재가 약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아버지의 말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건 있을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동의하시지 않거나 먼저 말을 꺼내시지 않은 일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한다는 것 다체가 아버지한테는 아예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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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단편 또는 손바닥소설을 보면서 즐거운 것은 카프카 장편의 실마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3부작(성, 소송, 실종(아메리카))과 대표작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단편에서 비슷한 부분을 만나면 내 감각 센서가 벌써 알림을 울린다. 내가 『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대표작으로 부르는 까닭은 카프카가 모든 주요 작품을 쓰고 나서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 바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이며, 카프카의 모든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고독의 3부작을 한 권으로 압축해놓은 것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인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영업 사원이었다. 영업이 좋은 날은 다른 직원들보다 몇 배씩 월급을 가져가지만 안 좋은 날은 기본급이 너무 적어서 불안정했다. 퇴로가 없는 삶에 질려 버린 잠자는 그대로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승객』의 승객은 잠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행을 가는 승객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승객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다. 이 세계에서, 이 도시에서, 나의 가족에게서 나의 처지를 되돌아볼 때 나는 정말 불확실하다. 더군다나 내가 어떤 방향에서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요구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나는 임시로라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승강장 위에 서서, 고리에 의지하고 있는 것도, 전차에 몸을 내맡긴 채로 서 있는 것도, 사람들이 전차를 피하거나 혹은 조용히 가거나 혹은 진열장 앞에 멈추어 서든 간에 어쩔 수가 없다 ㅡ 물론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승객』


도입부만 놓고 보면 「승객」과 『변신』에서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승객」에서는 다른 승객, 전혀 다른 승객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고, 소녀는 막 전차에서 내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전차와 한몸인 것처럼 전차의 벽에 기대거나 만진다. '나'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순간'은 어떤 목적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이거나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녀는 '순간' 자체가 목적으로 보인다. 순간에 집중하고 순간을 즐긴다. 순간과 하나가 되고, 순간을 빨리 뛰어넘어 어떤 목적지로 가려는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전차는 의미 없는 공간이고, '승객'이라는 존재는 단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전차의 규칙을 따르는 임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전차에서만 임시 존재인 것이 아니라, 처지 자체가 임시적인 존재다. 그리고 '나'는 임시인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자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나는 원래부터 임시였던 것일까? 도대체 내가 있는 지금 이 순간과 전차 승강장이라는 공간은 왜 의미가 없는 것인가? 나는 왜 지금과 이곳에 의미를 둘 수 없는가? 명령과 목적이라는 압박에 자석처럼 끌려가기 때문이다. 자력이 너무 강해서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날이 하루 하루 쌓이면 '임시'라는 것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말 것이다.


어린이 수업을 하면서 카프카가 「승객」에서 소녀를 본 '나'의 모습을 느낀다. 나도 어린이처럼 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예전에는 임시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상관 없다. 임시는 임시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니까. 어떤 명령이나 의무, 직업, 목적이 아무리 강력한 자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끌려가고 있는 이 순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사라지면 카프카의 벌레라는 또 다른 압력이 나를 기다린다. ‘이모셔널 리터러시’(emotional literacy)!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해야 무기력과 폭력의 연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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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프카라면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펠리체 바흐어와 두 번의 약혼과 두 번의 파혼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카프카는 결국 독신으로 살다 죽었지만 독신자로 살고 싶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독신자의 불행을 잘 알고, 평생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 생각한 카프카는 왜 독신자로 살아야 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글쓰는 자유를 위해서다. 펠리체 바흐어와 결혼생활을 하면서 카프카는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돌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견적이 안 나왔다. 카프카의 글쓰기는 자유이자 생존인데 그것이 위협받을 바에는 차라리 독신자의 불행을 선택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카프카는 약혼을 두 번이나 했느냐 하는 것이다. 약혼을 깬 것보다 약혼을 한 것이 나는 더 궁금하다. 카프카는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형제 관계도 별로였다. 마음의 집이 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결혼생활과 글쓰기가 공존할 수 있다면 약간의 자유를 희생하면서도 해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결혼생활과 글쓰기 생활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의 연구와 비평은 카프카의 파혼에 집중한 반면, 두 번의 약혼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다.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는 질문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유지태가 말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파혼 원인은 아버지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아버지의 강력한 통제력 하에서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장남 카프카에게 결혼이란 것은 아버지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말할 것이다. 결혼은 펠리체 바우어와의 결합도 있지만, 카프카 집안과 펠리체 집안의 거래적 성격이 강하다면 글쓰기의 자유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댁의 구속'과 '처가의 구속'은 실체가 있는 구속이니까.

카프카는 마음의 집이 될 사람을 애타게 찾음과 동시에 독신자의 불행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독신자의 불행>에는 그런 감정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몸이 아프게 되면 자신의 침대 한구석에서 몇 주일씩이라도 텅 빈 방을 바라보아야 하고, 언제나 대문 앞에서 작별을 해야 할 뿐 한 번도 자신의 부인과 나란히 층계를 올라올 수 없고, 자신의 방안에 있는 앞문들은 단지 낯선 집안으로 통해 있을 뿐이며, 늘 한손에는 자신의 저녁거리를 들고 집으로 와야 하고, 낯선 아이들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아야 하지만 "나에겐 아이들이 하나도 없구나"하고 줄곧 되풀이해서도 안 되며, 젊은 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두 독신자들을 따라 외모와 태도를 꾸며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카프카 단편전집』, 「독신자의 불행」


카프카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독신주의자'라는 평가일 것이다. 위의 문장을 보면 독신주의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약혼을 두 번이나 했다가 파혼을 하는 과정 역시 독신주의자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마도 카프카가 자신은 독신자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념적으로 깨달으면서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고 덧붙인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카프카는 어쨌든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파혼이며 독신자의 길이다. 고통스러운 결단의 과정에서 카프카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처투성이이긴 하지만 자유롭게 글을 쓰는 카프카 자신이다.


다만 오늘날이나 후에는 실제에서도 하나의 육신과 하나의 진짜 머리, 그러니까 손으로 치기 위한 이마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서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느 말이다.

『카프카 단편전집』, 「독신자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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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카프카 일기 멋모르고 도전했다가 깨갱댔는데...
경지가 느껴지는 글이군. 흠.

승주나무 2023-03-06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무슨 경지 씩이나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