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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평점 :
2008 총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2007년 대선에 이어 2008년 총선도 최고로 재미없는 선거로 갈 것 같다. 표를 까보든 말든 이미 결론은 나왔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참여율이다. 14, 15, 16대 총선의 투표율은 각각 71.9, 63.9, 57.2%P로 뚜렷한 하강구도를 보이고 있다. MBC가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천명을 대상으로 4월 2일 하루 동안 조사한 전화설문(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 3,1%p, 응답률은 16.8%)에 의하면 이번 총선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60.5%로 저조했다. MBC는 지난 17대 총선 때는 선거 2주일 전 조사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답이 75.2%, 실제 투표율은 60.6%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투표율은 50%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4월3일 보도, MBC뉴스데스크) 정치인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투표율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역사적으로 장기집권에 대한 반감과 '뉴 페이스'에 대한 갈망을 표심으로 표현해 왔는데, 경제인 출신이라는 신선한 이력과 서울시장 취임이라는 금상첨화를 얻어 이명박 대통령은 가장 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된다'는 2002년 대선 당시의 이회창 측의 장담은 이명박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선거는 역사의 과정을 한땀한땀 채워가는 축제인데 마치 한판 대결로 세상이 다 끝날 것처럼 올인하는 정서는 입후보자나 유권자 모두에게 독이 되고 있다. 참고로 내가 투표할 선거구인 '강서갑'에 출마한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의 명함 앞면에는 큰 글씨로 이런 공약이 적혀 있다. "화곡 뉴타운 4년안에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조급증도 이러한 조급증이 없다. '정몽준 성희롱 의혹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정몽준 의원의 공약은 '사당 뉴타운 개발'이었다. 성희롱 피해를 본 기자의 질문은 "오세훈 시장은 사당 뉴타운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었는데, 이 질문 직후에 정몽준 의원이 매우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은 그만큼 당혹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정치인들이 파놓은 '말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지 걱정이다. 결국 남는 것은 '허언'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지고 이것이 투표 참여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얼마 전 정치학계의 스승인 최장집 선생은 노회찬 의원을 지지방문한 자리에서 "노 의원이 당선되는 일이 앞으로의 한국 정치 발전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사안이 됐어요. 한 사람의 의원이 당선되는 의미를 넘어서."라고 말했다. 매우 절박하고 매우 씁쓸하다. 이렇게까지 진보세력이 구석으로 몰렸는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 = 저자 서중석 선생의 인생
서중석 선생은 한국현대사 분야에서 매우 귀중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 태어난 점부터 의미심장한데, 신군부 시절인 1979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현재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하다가 현재는 고문으로 있는데, <대한민국 선거야이기>(역사비평사)는 2007년 봄부터 5회에서 걸쳐서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5회에 걸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이화 선생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의 추천사에서 그를 '현대사를 바르게 쓴 역사학자'로 평가하면서 금기가 많은 현대사를 자기의 뚜렷한 주관에 따라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책 속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쉽게 읽히는데, 내가 볼 때 그는 '대중역사서의 표준문체'에 도달한 듯하다. 사관이 조선왕조실록 기록하듯 엄중한 것이 아니라 소설가가 자전적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듯, 그의 역사서는 '자전적 역사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저자의 사진(184쪽)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관통하는 과정 속에서 직접 경험했던 감상과 느낌을 스스럼없이 덧붙이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밀성 또한 놓치지 않으니 말이다. 이이화 선생은 앞의 추천사에서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의 역대 독재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감성으로 접근치 않고 객관적 공정성을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저자는 위리 정치사가 이렇게 추잡하고 막가면서 엮어졌다는 자학사관에 빠지지 않고, 우리 사회가 일정하게 발전해왔다는 긍정사관에 충실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 토대와 확신이 어디서 생기는지 궁금했는데, 그의 열정적인 사회 활동이 바로 그 열쇠가 아닌가 한다. 그는 역사교육연대 상임대표이고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제작작업에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한창 '새역모'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시끌시끌할 때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잊혀진 '제주 4ㆍ3'의 현대사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보리출판사에서 출간된 <동백꽃 지다>에서 그는 '제주 4ㆍ3항쟁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이 문제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의 선거에 대해 일반인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반대로 선거는 한국 사회를 바꿔놓는 데 대단히 역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증명했다. 한국현대사에 몹시도 취약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현대사가 더럽고 치사해서 보기도 싫다는 사람이라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와 이 책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를 권한다.
김대중의 머리, 김영삼의 뚝심, 조봉암의 가슴이라면..
장 자크 루소는 선거제도의 모순에 실망했던지 선거를 가리켜 "4년이나 5년에 한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폄하했을 정도다. 한국의 오늘날도 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선거가 역사를 그것도 건강한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일까?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를 대표하는 표현 수단이며, 구성원들의 모든 심리가 고루 반영된 '권력 나누기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사에서는 구성원들의 욕구가 골고루 반영되지 못했다. 이승만 12년, 박정희 18년, 신군부 약 10년 도합 약 40년의 시간 동안 권력을 좀처럼 놓지 않으려는 세력들의 전횡에 시달려온 민심은 지역이기주의와 경제지상주의까지 보태져 정치문화다운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 서중석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는 유권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들의 전횡을 40년으로 단축시켰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선발투수가 6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낸 것처럼, 실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퀄러티 스타트'를 한 것과 같다. 집권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유권자들은 견제심리가 있고, 반대 세력들 역시 절박한 심리가 있다. 이들의 심리와 각 시대가 놓인 상황이나 조건이 '틈'을 만들어내는데, 그 틈 속에서 역설적이기도 하고 매우 희망적이기도 한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1년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혼쭐이 나는데, 온갖 회유와 책략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전체 의석 204석 중 공화당(박정희)은 113석, 신민당은 89석으로 개헌 저지선을 20석이나 상회했어요. 이제는 쿠데타 빼놓고 다른 방법으로는 장기집권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어요. 신민당은 임시국회도 단독으로 소집할 수 있게 됐스니다. 장관을 출석시켜 따질 수도 있게 됐어요. 역사상 최초의 균형국회가 탄생한 겁니다."(166~167쪽)
이런 변수 외에도 역사과정 속에서 중요한 변수는 역시 '인물'이다.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민심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평가하는 역사적인 정치인을 세 명만 거론하면 조봉암, 김대중, 김영삼을 들 수 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집권 야욕과 자유당의 횡보에 맞서 민의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토지개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승만의 극단적 반공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대항할 만큼 배포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선 과정을 통해서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할살 같은 당시의 금기어를 건드리기도 하고,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평화통일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선거 국면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간첩 혐의로 조봉암을 사형시켜 버리고 만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전성기는 바로 '40대 기수론'을 들고 일어섰을 때의 시절이 아닐까 한다. 각각 박정희와 전두환 신군부의 서릿발에 맞서 선거판을 흔들고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들이 활약했던 당시에는 유권자들이 투표할 맛이 났을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이후로 그만큼 뚜렷한 색채와 의기를 가진 정치인들이 등장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정치판의 흥행을 떨어뜨린 주요인이 되었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는 현대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로 구분해도 좋을 만큼 특징이 있다. 저자는 단지 선거의 결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거의 당사자들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또는 집권야욕을 깨뜨리기 위해 땀흘리고 뛰었던 열정적인 흔적들을 살펴보라고 강조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사 역시 부침이 있고 때로는 도도하고 때로는 격정적인 흐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하는 만큼 정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은 '정치적 자해'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정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 흐름 속에서 시대적 요구를 포착하고 실책을 빨리 찾아내 대처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치는 승부이기 때문에 후보든 유권자든 경쟁력이 없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선거의 진정한 주인공인 유권자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에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하다 못해 투표율 비교 등을 통해 명백한 당대의 민심을 확인시켜 주었으면 좋을 텐데, 민심에 관한 기록은 추상적이기 그지 없다. 이 책의 소비자들은 대체로 선거에 입후보하기보다는 선거판을 관조하고 선택을 하는 유권자이기 때문에 유권자로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을 붙잡고 하루만에 다 읽었는데,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선거의 역사인데도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