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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7] 이유 없는 인내심은 없다


군 입대를 며칠 앞두고 있었을 때 어머니가 제 손을 잡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형제들에 비해서 나를 닮아서 유독 인내가 강하니 군 생활을 잘 견뎌낼 거다."

그 때부터 내 마음속에 '인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폐쇄적인 군대 사회를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탈없이 전역할 수 있었던 것도 특유의 인내력 덕분입니다. 그 이후에도 나에게 '인내'를 가르쳐준 사람은 많았습니다. 창작욕구에 불타고 있을 때 나의 인내심을 자극시켜준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한마디였습니다. 

젊은 때는 여러 가지 관념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몰려들어서 시끄럽게 머리 속을 울리고 있지만, 그 하나하나를 모조리 포착하여 성급하게 발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종합되기를 기다리고 더욱 충분히 사색함으로써, 즉 하나의 관념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개개의 세부가 자연히 하나의 핵으로까지 응집하여, 한 폭의 당당한 큰 화면을 이루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붓을 들고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며, 그 이전에는 붓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거장이 창조하였던 위대한 인물들은, 이따금 긴 긴 집요한 노력에서 탄생된 것입니다. 
-도스또옙스끼, J.R. 마리의 '도스또옙스끼의 문학과 사상'

아이들에게 인내를 가르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인내'는 다른 덕목과 마찬가지로 가르친다고 해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내는 나의 것이고 아이의 인내는 아이의 것입니다. 어느날 민준이가 사촌누나와 놀이터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난 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고 사과를 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을 했지만, 사촌누나도 화가 났는지 화해를 할 의향이 없었습니다. 애써 사과를 한 민준이의 마음이 복잡해지고 서글퍼하는 모습이 표정에 그대로 읽혔습니다. 인내를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나는 '시간'이라는 친구를 불러냅니다. 

"민준아, 시간은 참 똑똑한 친구야. 시간에게 좀 맡겨놓으면 어떨까?"

민준이와 다른 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민준이는 잘 참아 주었습니다. 다행히 조금 후에 사촌누나도 민준이에게 사과를 해서 둘은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화해를 하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역시 아이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민서와 민준이 모두 나에게 하는 말투가 있습니다. 예컨대 민서가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나 아팠는데 참았어!"입니다. '~했는데 참았어.'라는 말은 스스로가 인내의 가치를 아는 것이므로 당연히 아이의 요구대로 칭찬을 해줘야 합니다. 엄마 없이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할 때 민서는 엄마 보고 싶다고 마구 울었지만 민준이는 "엄마 보고 싶은데 나 지금 참고 있어."라고 말하며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은데 민준이 참는 거 보고 참고 있어."라고 칭찬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민서가 워낙 서럽게 우는 통에 민준이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그 동안은 10분 동안 우는 시간을 정해 놓고 맘껏 울도록 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인내에 대해서 생각할 때 막연히 참는 것과 인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참는 것은 인내라고 할 수 없으니 참는 이유가 있을 때는 참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감정이 가는 대로 놔둬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인내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동양의 인내는 확실한 명분이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연히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반드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인내죠. 전국시대의 형세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진(秦)나라를 위협하던 강대국은 조(趙)나라였습니다. 장평대전이라는 전쟁에서 조나라 병사 45만명이 몰살당하기 전에 조나라와 진나라의 전세는 비등했습니다. 조나라를 부국강벽하게 만든 불멸의 파트너는 유세가 인상여와 장군 염파였습니다. 두 사람이 불멸의 파트너가 된 데에는 인상여의 인내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염파 장군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전쟁터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생했는데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유세를 하면서 세 치 혀를 쓸 뿐인데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염파 장군은 길 가다가 인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를 줘야겠다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상여는 멀리서 염파 장군이 보이면 일부러 길을 비켜 갔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부딪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인상여의 측근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결국 이별을 고하자 인상여가 말을 꺼냅니다.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의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파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이유는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염파·인상여 열전'

이 말을 들은 염파 장군은 부끄러움에 사무쳐 웃옷을 벗고 가시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인상여 집 마당에서 사죄를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조나라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인상여는 단지 인내를 한 것이 아니라 인내를 한 이유를 드러내서 염파 장군을 깨우쳤습니다. 참으로 값진 인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상여의 인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인내는 바로 '사마천'의 인내입니다. 사마천은 비운의 영웅 이릉 장군이 적군[흉노족]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유일하게 한무제 앞에서 변호를 자처했다가 화를 입어서 사형의 죄를 얻었지만 생식기를 거세하는 혹형인 궁형(宮刑)을 선택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대부로서 궁형을 당해 환관(宦官)이 된 자는 함께 자리를 하거나 말을 섞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당대 실정 속에서도 굳이 목숨을 연명하게 된 사정을 친구인 임안에게만 설명을 합니다. 그 구절 중에서 명문 중의 명문을 소개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사마천, <보임안서> 일부

사마천은 세상에 반드시 남겨야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가볍게 목숨을 끊을 수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중국 3,000년 통사를 정리하는 선친의 작업을 마무리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비분강개하며 써내려간 52만 6,500자에 이르는 대작 <사기(史記)>가 태어난 것도 결국 '인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인내 역시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한(漢)나라의 통일 작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신 장군이 소시적에 동네 건달과 시비가 붙어서 그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는 수모를 참았다는 유명한 과하지욕(胯下之辱) 역시 동양의 인내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한신이 단지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면 굴욕이 되었겠지만, 뜻과 기상이 높은데 건달을 죽이는 죄를 지으면 모든 게 한 순간의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몸의 굴욕을 자처한 것입니다. 

아이에게 인내를 가르쳐줄 때는 부모가 몸소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는 부모님이 왜 인내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합니다. 인내를 해야 하는 이유를 들으면 아이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어서 인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인내, 목표가 있는 인내는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할 때, 일이나 인간관계의 옳음이 명확할 때 빛이 날 수 있습니다. 인내심은 결국 자신감과 정의가 행동으로 표현된 것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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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이거 시험에 나오는 거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부모 강의를 하다가 강사가 마치 학생에게 말하듯 시험에 나온다고 하는 말에 부모님들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나는 무척 진지하게 말하는 거거든요. 앞서 육아를 '오디션'에 배유한 것과 같이 부모님들은 항상 시험을 치릅니다. 다만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님이 적을 뿐입니다. 시험 결과는 실시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야구에 배트스피드(bat speed)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방망이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휘두르거나, 공이 무척 느리게 보이는 느낌을 말합니다. 배트스피드가 좋으면 아무리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를 만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집중력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아이들과 오랫동안 책 놀이를 함께 하면서 제가 무척 신경 쓴 부분은 '순간 집중력'입니다. 아이들은 순간 집중력가 엄청나게 뛰어나기 때문에 모두가 내 선생님입니다. 순식간에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 아이의 감각과 감정이 어느 정도 속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에 비해순간 집중력이 약합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쌓인 관념과 타성 등이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에 가면 그림책이나 아동문학을 보려고 어린이 자료실에 갑니다. 어린이 자료실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많고, 아이들 키높이에 맞게 책이 놓여 있어서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리고 엄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거나 옆에 앉혀 놓고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입니다. 어린이 자료실에서 머물러 풍경을 바라보면서 지친 마음을 축이고 위로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조용한 연못에 파문이 일 듯, 편안한 마음을 확 깨는 모습을 간간히 보게 됩니다.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을 때, 아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와! 코끼리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엄마는 귀찮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OO야, 책 다 읽고 나서 이야기 나누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어머니는 강의에서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랑 책을 읽을 때, 아이가 자꾸 끼어들어요. 좀 집중력을 가지면 좋겠는데 자꾸 산만한 것 같아 걱정이에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의 집중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어머니의 집중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당연히 아이의 집중력이죠!"라고 말합니다. 나는 "아이는 지금 충분히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하면서 다른 어머니들의 표정을 봅니다. 장내가 술렁이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어머니들의 표정이 해맑게 피어납니다. 부모님은 그림책을 읽다가 코끼리를 발견하는 아이의 순간 집중력에 맞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스승으로 삼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아이와 교감한다는 것은 아주 섬세하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거든요.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떠나버리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진중하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 <중용> 1장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사연도 생각납니다. 가족들이 <책 먹는 여우>를 함께 읽으면서 책 놀이를 할 때였습니다. 여우 아저씨는 책을 너무 사랑해서 도서관 책을 훔쳐 먹다가 감옥에 갇히지만, 이내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거든요. 아이는 아저씨의 '펜'에 집중했어요. 

"나도 여우 아저씨처럼 마술펜이 있었다면 그림을 잘 그릴 텐데."

이 때 부모님의 대답이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OO야, 그건 여우 아저씨가 책을 엄청 많이 읽어서 머리가 똑똑해진 거란다. 마술펜 같은 것은 없어."

아이가 잘못 생각한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보이지만 모녀는 교감에 실패했습니다. 순간집중력의 핵심은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느끼느냐입니다. 설령 아이가 착각한다고 하더라도 착각한 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우리 딸이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구나. 우리 한 번 그림 그려볼까?"라고 했다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우리 어른들은 '순간'을 번번이 놓칩니다. 나도 역시 놓칩니다. 아이들과 가족들은 시시각각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부모님은 아이가 보내는 위험신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에게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집중력입니다. 시민활동과 사업체 운영을 하느라 가족들에게 소홀할 때 아내와 아이들은 나에게 계속 위험신호를 보냈습니다. 나는 오랜 집착과 스트레스 때문에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위험신호를 읽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다섯 살배기 민준이가 세 살 때 나에게 했던 '최후통첩'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오더군요. 만약 그것마저 놓쳤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일주일에 5일을 회사에서 밤샘한답시고 집을 비우고 있었는데, 주말에 집에 와 보니 세 살배기 민준이가 침대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더군요. 민준이 옆에 앉아서 '민준아, 왜 그래?'하고 물어봤더니 민준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빠랑 놀고 싶은데, 아빠는 나가 버려."

나는 나에게 남은 마지막 집중력을 발휘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더 이상 민준이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인생에서 이런 기회, 또는 위기가 드물게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럴 때는 나 자신을 '초기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 민준이가 열어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가족을 위해 나의 생활과 삶을 재구성하고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집중력 중에서 최고의 집중력은 '삶'과 '죽음'에 관한 집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선비들을 존경하는 까닭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을 순간을 제대로 죽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학문을 하는 선비의 모습은 자못 비장하지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의병운동을 주도한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 끌려 갔습니다.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곡기를 끊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대마도에 함께 끌려 간 제자들은 면암 선생과 함께 죽기로 결심했지만, 면암 선생은 오히려 호통을 칩니다. 이역만리에서 죽어야 할 사람은 자기 한 사람이면 족하며, 나머지는 생생히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함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선비의 집중력은 사마천이 벗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대로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 반고, <한서>, '사마천전', 보임안서(報任安書) 일부

생식기를 절단당하는 극형인 궁형(宮刑)을 받으면 당시의 모든 사나이들이 수치에 못 이겨 자살을 하지만, 사마천은 지금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엄청난 집중력이죠.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순간에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인간의 고결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의 하나가 소크라테스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먹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몹시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 순간에 하필이면 이웃에게 빚진 닭 값을 대신 물어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자신의 삶과 소중한 일상에 대한 집중력이 없다면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죠. 로고데라피로 유명한 심리치료사 빅토르 에밀 플랑크 박사의 일화도 깊은 감명을 줍니다. 프랑클 박사가 보살핀 환자 중에서 임종이 임박한 한 환자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프랑클 박사에게 "밤중에 일어나지 않으실 수 있게 지금 모르핀을 놔주세요"라고 부탁하죠. 프랑클 박사는 "비할 데없이 아름다운 업적"이라는 칭송을 보냅니다. 아이들은 상식과 편견에 젖어 있는 부모님보다는 아이들의 말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주는 부모님에게 깊이 배웁니다. 그리고 사소한 어떤 일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발견하는 모습을 통해서 인생을 배워갑니다. 부모가 아이의 말에 집중하지 않으면 아이는 자신의 머리속에서 떠오른 생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집중을 하지 않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의 집중력을 발견해주는 것만큼 강력한 집중력 훈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경고 신호인 삶의 집중력은 가족의 행복을 좌우할 수도 있으므로 부모가 반드시 익혀야 합니다. 즉, 눈과 귀를 열어서 가족이 보내는 신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전체가 상당히 산만해졌기 때문에 아이의 집중력을 길러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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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5] 공자의 칭찬법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차가운 목소리와 따뜻한 목소리를 구분합니다. 말을 못하는 아기도 '이 놈!'하고 인상을 쓰거나 제지를 하면 싫어하고, 밥상머리를 짚고 일어섰을 때 놀라고 칭찬해주면 기뻐합니다. 칭찬은 감정을 격동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칭찬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은 대개 위험하고 어렵듯 칭찬 역시 양날의 칼로 작용합니다. 아이는 칭찬을 통해서 진심으로 기뻐할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민준이는 개다리춤울 추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작이 엉뚱하고 우스워서 칭찬을 많이 해줬습니다. 칭찬을 해주니 신나서 계속 개다리춤을 춥니다. 새로운 개다리춤 동작을 생각해내면 한번 보라고 하면서 또 춤을 춥니다. 칭찬을 해달라는 말입니다. 솔직히 가끔은 귀찮기도 합니다. 민준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갔을 때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내가 만든 일종의 필살기는 아이들이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 '어이쿠' 하면서 손을 뒤로 튕겨나가는 동작을 하거나 손바닥이 아프다는 동작을 하면서 "점심 때 뭐 먹었는데 이렇게 힘이 세?!" 물어봅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신이 나서 민준이 유치원 갈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해달라고 합니다. 나는 하이파이브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힘세고 밥 많이 먹은 것에 대한 일종의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민준이 유치원에 갈 때마다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서 자신이 얼마나 힘이 세고, 밥을 잘 먹었는지 하이파이브를 해달라고 하면 성가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내가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을 얼굴에 담아서 동작을 취하거나 성의 없이 칭찬을 하면 아이들은 조용히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를 받는 까닭은 부모님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알아봄'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지지하고 긍정한다는 말인데, 칭찬이 아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쑥쑥 자라게 하는 까닭은 자존감의 원천인 '알아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순간 부모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칭찬할 때 '알아봄'의 마음을 담아서 해주시고 계신가요? 아이들이 자꾸 칭찬을 요구해서 귀찮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셨나요? 
공자는 제자들과 대화하면서 제자의 성격에 맞게 대화를 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것이 스승 공자의 가장 위대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토대가 굳건하기 때문에 공자의 칭찬 역시 제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영되었습니다. 

공자께서 천한 아비를 둔 중궁에 대해서 이르셨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좋으면 비록 쓰지 않으려 한들 산천의 귀신이 버려두겠느냐?"
- <논어> 6-4

공자의 제자 중에서 신분이 천한 중궁의 능력과 고민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감을 가지라는 스승의 칭찬이 인상적입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중궁이 '덕행'에 뛰어났다고 특별히 언급한 부분이 나오며, 중궁과 다스림에 대한 깊은 의견을 나누고 인에 대해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스승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은 중궁의 기분이 어떨까요? 열심히 하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신분과 상관 없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면 어떤 식으로든 빛을 보리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신의 한 수'처럼 공자의 칭찬은 중궁의 가슴속에 담겨서 인생을 빛냈을 것입니다. 
공자가 제자 중에서 가장 아꼈던 안연에 대해서는 많은 칭찬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회(顔回)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이 달라지게 된 과정을 드러내준 이 칭찬은 특기할 만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회와 종일토록 말을 해 봐도 내 뜻에 반대한 적이 없어 어리석은 사람 같다. 그러나 물러가 그 자신을 살펴보고, 또 나의 뜻을 발휘하고 있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다."
- <논어> 2-9

공자는 처음에 안회에 대해서 고분고분하고 말 잘 따르는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지만 제자 안회의 이의제기가 없었던 것은 안회가 스승의 주장에 대해서 진심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자로처럼 스승에게 따져 묻거나 중궁처럼 반론을 펼치면서 대화를 더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별 말 없이 따르는 모습에 다소 섭섭한 감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의 가장 큰 마음은 흡족함입니다. ""회는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말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논어11-3)라는 말처럼 공자는 얼핏 들으면 푸념처럼 들리는 묘한 말을 많이 남겼습니다. 반어(反語)와 은근한 비유를 많이 쓰기 때문에 시를 읽듯이 거리를 두고 말을 음미하거나 깊은 감정이입을 하거나, 현장에 실제 있었던 것처럼 느끼면서 논어 구절을 살피면 여러 가지 맛이 납니다. 그래서 논어책은 여러 번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남에게 좋은 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됩니다. 예컨대 아이가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아이의 수준이 성에 차지 않을 때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가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이것은 많은 부모가 꿈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면서 '지적을 피하는 칭찬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이른바 파스칼 칭찬법입니다. 

남을 효과적으로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 한다면, 그가 사물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보통 그 측면에서는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올바른 점을 인정하면서 그의 잘못된 다른 측면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인간은 이것으로 만족을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측면에서 보는 것을 게을리 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파스칼 <팡세> 일부

대학 다닐 때 철학자 스피노자를 참 좋아해서 교수님께 스피노자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교수님은 특정 철학자의 저작을 읽는 것은 가장 훌륭한 철학 공부라고 칭찬하시면서 나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남겨주신 말씀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네가 스피노자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철학사를 읽어 봐라. 전체 철학사의 입장에서 스피노자의 위치를 이해한다면 스피노자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니까."

나는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나서 많은 철학사 저작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스피노자의 철학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스피노자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공자 역시 이와 같은 칭찬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날까 하는데 그때 나를 따르는 사람은 아마 유이겠지?"
자로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공자가 말했다. "유야! 용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낫지만, 재주와 사리를 재량하는 능력은 취할 만한 것이 없구나."
- <논어> 5-6

파스칼 칭찬법의 특징은 칭찬 대상(아이)의 현재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는 데 있습니다. 한글 읽기를 잘 하는 민준이를 칭찬해주면서 받침 몇 개만 더 잘 읽으면 모든 한글을 다 읽을 수 있겠다고 칭찬하면 민준이에게 동기와 목표를 심어주는 셈이 됩니다. 더불어 민준이는 부모가 자신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고, 자신이 깊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듣기 싫어하는 지적을 해야 하는 부모님들이 만약 칭찬으로 번역해낼 수 있다면 아이의 감정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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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가족과 아이를 지키는 최종 수비수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사회운동을 몇 년 하고, 가족 먹여살린답시고 사업을 몇 년 하다가 뒤늦게 육아에 참여한 늦깎이 아빠로서 아이들과 교감을 맺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내의 신뢰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육아서와 심리학 등 내가 아는 지식을 육아에 적용하며 시행착오도 많았고 아내와의 다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차차 엄마의 자리와 아빠의 자리가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가 아이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심리학자 로버트 시어스와 그의 동료들은 다섯 살짜리 자녀를 둔 300명이 넘는 미국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 양육 관행을 조사했다. 26년 후에 또 다른 연구자 집단이 이 원래 연구 대상의 자식들 중 일부와 접촉했다. 그 목적은 그들의 감정이입의 정도를 측정하여, 그것을 시어스의 원래 조사 결과와 비교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의 연구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성인기 감정이입의 가장 강력한 예측자는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양육 관여였다. 이 요소는 몇몇 어머니의 관련 예측자보다 더 나은 예측자임이 증명되었으며, 이는 소년과 소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났다.
- 로스D 파크, 아민 A 브로, <나쁜 아빠>(이학사), 27쪽


하 지만 육아에 있어서 아버지의 자리는 마치 변방과 같습니다. 문화센터나 공공도서관에서 ‘가족과 함께 함는 책놀이 잔치’이라는 행사를 마련하면 참여 부모의 10% 정도가 아버지입니다. (10가족 중의 1가족) 뿐만 아니라 ‘아빠와 함께 하는 책놀이 잔치’라고 ‘아빠’를 명시했을 때도 아버지의 참여는 50%가 겨우 넘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참여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아버지들이 참여할 때는 유심히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같이 온 경우는 대개 아버지는 뒤쪽으로 물러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구경을 합니다. 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책 놀이에 참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편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회사와 주주의 관계처럼 됩니다.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보고를 하고, 돈이 많이 드는 완구나 책을 구매할 때 아버지가 가끔 이의제기를 하는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이처럼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가족의 행복은 점점 달아납니다. 나는 육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아버지로부터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아버지로 변신했는데, 그 과정을 동양철학의 한 구절로 담았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을 것이다."
- <논어> 4-25

육 아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간직하는 최소한의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와 가족을 향한 사랑과 선의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 일상생활에서 이 선을 시나브로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구 세트를 사겠다는 어머니의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주장이 충돌할 때 아버지는 아이의 앞길을 막아세우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지나치다고 생각했거나 가정형편상 무리라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원망하며 싸웁니다. 부부 간의 신뢰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만약 아내와 남편이 아이에 대한 선의와 사랑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지켜준다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들어도 자세히 들어보고 설득을 하거나 반영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갈등이 심화된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대방을 부정하거나 비하하고, 아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소신껏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육아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아이에 대한 사랑과 선의로 충만합니다. 신뢰의 문제는 엄연히 있는 사랑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덕을 살펴보는 다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과 아이에 대한 선의를 존중하는 것이 신뢰의 첫 번째 원칙이라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두 번째 원칙입니다. <논어>를 읽을 때는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기분이 좋은데, 특히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이해’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와 자로의 신뢰 관계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유(자로)의 비파 솜씨로 어찌 내 문하에서 탈 수 있느냐?”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유는 이미 수준이 당(堂) 위에 올라 있다. 다만 방[室]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다.”
- <논어> 11-14


자 로는 공자와 가장 나이차가 적을 뿐만 아니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불만이 있을 때 자로가 대표로 따져 묻기도 하고, 공자가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하기도 해서 때로는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비파 사건 역시 공자와 자로의 친근한 관계를 보여주는 모습이지만, 제자들은 공자에게 꾸지람을 받는 자로를 오해한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알아줌’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부럽습니다. 부부 사이도 이처럼 알아줄 수 있다면 신뢰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공자가 모함을 받았을 때 제자가 버팀목이 되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공(子貢)은 공자보다 위세가 더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공자 사후에 나라의 선비들은 자공을 찬양하기 위해서 공자를 헐뜯기도 했습니다. 이때 자공이 보여준 모습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공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에게 말하였다. "자공이 중니보다 어질도다." 자복경백이 그 말을 자공에게 전하니, 자공이 말했다. "궁실의 담에 비유하면, 나의 담은 어깨에 닿아서 집안의 좋은 것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요함을 볼 수 없다. 그 문에 들어간 자가 적으니, 무숙의 말이 또한 마땅치 않겠는가?"
- <논어> 19-23

진 자금이 자공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겸손해서 그렇지, 중니가 어찌 그대보다 어질겠는가?" 자공이 말했다. "군자란 한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니,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님께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생님께서 나라를 얻어 다스린다면, 이른바 민생을 세워 주매 민생이 서고, 덕으로 인도하매 백성이 따르고, 인정으로 편안하게 하매 백성이 모여들고, 예약으로 고무시키매 백성이 화하게 되어, 살아계실 때는 사람마다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신 때에는 모두 슬퍼한다는 것이니, 어떻게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 <논어> 19-25


공 자가 자로를 변호한 일과 자공이 공자를 변호한 일의 공통점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므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습니다. 반면 형제들이나 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배우자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무시하거나,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의지할 사람은 가족밖에 없습니다.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호응을 하면 배우자의 자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신뢰의 끈은 견고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형성하는 육아의 기초일 뿐 서로가 채워야 하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그 어떤 육아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아내에게 육아를 맡겨놓고 돈을 벌거나 바깥일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않지만, 집에 있을 때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 돌보는 것을 피하지 않고 자주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면 육아와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생활까지 좋은 기운이 뻗칩니다. 사람이 가족의 사랑으로 태어난 것처럼, 가족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아이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부모님에게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사랑’의 개념이 무척이나 폭넓고 깊은데, 특히 ‘가족의 사랑’을 으뜸으로 칩니다. 심지어 이상적 인물로 추앙받는 순임금의 아버지가 만약 죄를 받는다면 임금 자리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숨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입니다. 따라서 가정교육이 모든 교육에 앞서고, 가정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사회체제와 제도로 확장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은 사회의 요구에 맞게 아이를 키우고, 학교나 학원의 지시에 복종하는 세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가족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기 때문이고, 가족의 자존감이 이 지경까지 떨어진 까닭은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최소한의 신뢰의 끈만 붙잡는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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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3] 아이를 혼내는 동양의 지혜


불가피하게 아이를 혼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부모님들이 무너집니다. 무턱대고 혼을 내거나, 아니면 벌벌 떱니다. 혼을 낸다는 것은 마음을 뒤집어엎는 일입니다. 국가로 따지면 정변이나 전쟁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는 노자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노자 <도덕경>에는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비장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무릇 군대를 좋아함은 상서롭지 못하여 조물주는 이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모시고 사는 자는 그러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머물 적에는 왼쪽을 귀히 여기고 군대를 부릴 적에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어서 군자가 다룰 물건이 아니다... 이기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건만 이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리라, 무릇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길한 일에는 왼편을 숭상하고 흉한 일에는 오른편을 숭상하니 이런 까닭으로 부장은 왼쪽이 자리하고 상장은 오른쪽에 자리하거니와 이는 전쟁을 상례(喪禮)로 삼는 것을 말함이다. 사람 죽인 것이 많으면 슬피 울어 애도하거니와 전쟁에 이겼다 하더라도 상례로 삼아야 한다. 
- 노자, <도덕경>, 31장

조정에서는 우승상이 좌승상의 상급자가 되고, 전쟁터에서는 좌장군이 우장군의 상급자가 되는 까닭은 임금이 ‘삶’의 위치에 있느냐, ‘죽음’의 위치에 있느냐 차이입니다. 즉, 평상시에 임금은 남쪽을 향해 앉아 있기 때문에[남면(南面)] 우승상이 임금의 오른쪽이 되고, 전쟁시에 임금은 북쪽을 향해 앉아 있기 때문에[북면(北面)] 좌장군이 임금의 오른쪽이 됩니다. 위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의 사령관 중에서 가장 부끄러운 자는 적의 목을 많이 벤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졸장부 중에서 졸장부 취급을 받습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 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백기 장군은 목을 벤 장졸만 100만명이 넘고, 절대 라이벌인 조나라 병사 45만명을 일거에 생매장할 정도로 전과를 올렸지만 왕에게 자결 명령을 받을 때는 조나라 병사 죽인 일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사기열전 ‘백기왕전열전’) 벌을 주는 것에 관한 조금 더 직접적인 구절에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강하게 드러납니다. 

맹손씨가 양부에게 형법을 총괄하게 하였다. 양부가 증자에게 형법을 관장하는 방법을 물었다. 증자가 말했다. 
“위에서 도(道)를 잃어 민심이 흩어진 지 오래다. 범죄의 정상을 알더라도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
<논어>, ‘자장19’

전쟁이든 형벌이든 채찍을 손에 들 때 공통적으로 지키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시험을 잘 치는 아이가 꼭 지혜롭지 않고, 시험을 못 치는 아이가 지혜롭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벌을 받는 사람 역시 잘못한 경우보다 불가피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 상황을 서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안타까운 마음 안에는 일을 이렇게 만드는 데 원인을 제공한 지도자와 어른들의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미안함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 맹자의 ‘망민(罔民)’입니다. 망민이란 백성을 그물질한다는 뜻입니다. 

맹자가 왕에게 말했다. 
“일정한 생업이[항산(恒産)] 없어도 떳떳한 마음[항심(恒心)]을 가지는 자는 오직 선비뿐입니다. 백성은 일정한 생업 없이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만일 떳덧한 마음이 없으면 거리낌이 없게 되고 사치한 것을 일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된 백성을 쫓아 형벌을 가하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 1-7

죄의 목록을 정해놓으면 사람들은 목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죄의 목록을 정한 취지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아이를 혼낸다는 것은 부모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고, 스스로에게 채찍을 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혼을 낼 때는 아이가 명백한 잘못을 하거나, 선을 넘었거나 하는 상황입니다. 대개 사전에 어떤 경우 혼이 난다는 것이 합의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이 원칙에 의거해서 혼을 낼 때 부모님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은 ‘감정’입니다. 혼을 낼 때는 이성만 작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동양의 사고방식은 혼을 낼 때일수록 감정을 함께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감정을 작동시키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형벌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거나 정벌을 당하는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 칼을 겨누는 적군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혼내기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양이 혼을 내는 지혜입니다. 혼을 낼 때는 감정이 뒤엎어지면서 행동과 말, 논리 하나하나가 엄중히 새겨집니다. 이 엄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혼내며, 엄중함에 압도되기 때문에 감히 혼내지 못합니다. 혼낼 줄 아는 부모님은 어렸을 적에 제대로 혼나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어렸을 적에 제대로 혼이 난 적이 없기 때문에 혼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크게 혼났다고 해서 제대로 혼나는 것이 아니라, 혼이 날 때 마음속에 부당하다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 있지 않도록 정확하게 혼이 나는 것이 제대로 혼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가지고 실제 생활에서 아이를 어떻게 혼내는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혼을 낼 때는 이유가 보편타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에 일관성이 없거나 논리적 결함이 있거나 혼내는 사람의 자격 시비가 걸린다면 영(令)이 서질 않습니다. 형 민준이는 동생 민서보다 두 살이 많기 때문에 민준이가 민서를 때리거나 밀치고 민서가 우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민준이가 민서를 때리고 민서가 울었다고 해서 혼내거나 지적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인 내가 명백히 알고 있고, 민준이의 행동에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 혼을 냅니다. 

민준이와 민서에게 똑같이 감자칩을 주었습니다. 감자칩을 좋아하는 민준이는 얼른 봉지를 비우고 민서의 봉지에서 감자 두 조각을 빼앗았습니다. 힘이 센 것을 이용해서 동생의 것을 빼앗는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따끔하게 지적하고 민서에게 돌려주라고 말했습니다. 민준이는 기분이 나빴는지 감자 두 개를 던져 버렸습니다. 명백한 이유로 혼이 날 때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 역시 혼을 내는 사유가 됩니다. 나는 엄하게 민준이를 꾸짖었습니다. 민준이는 서럽게 웁니다. 민준이에게 아빠는 밖에 나가겠다고 말하고는 현관 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2~3분 정도 있다가 다시 들어갔습니다. 민준이는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듯합니다. 감자칩을 좋아하는 민준이가 동생 것을 먹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동생에게 부탁을 해서 충분히 얻어낼 수 있었지만 힘으로 빼앗은 것은 누가 뭐래도 교육을 잘못 시킨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혼이 난 아이에게 부모는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준이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아빠한테 혼나서 많이 속상하냐고 물었더니 민준이는 힘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민준이에게 혼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민준이는 내가 왜 나갔는지 궁금했는지 물어봅니다. 나는 “처음에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갔지만, 밖에서 생각해 보니 혼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혼을 내는 가장 커다란 원칙은 가급적 혼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혼을 내야 한다면, 혼내고 난 이후에 반드시 두 팔로 안아주고 혼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붙입니다. 민준이를 크게 혼낸 날 몇 분 뒤에 민준이가 “아빠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아빠가 혼냈는데도 사랑해?”라고 물어봤더니 그래도 사랑한다고 합니다. 민준이가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가 더 의미심장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민준이는 감자칩 남은 세 개 중에서 두 개를 꺼내서 민서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한 개면 충분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준이가 감자칩 한 개를 민서에게 주자 민서가 고맙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감정이 한바탕 파도를 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혼을 내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아이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혼을 내지 않는다는 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모라면 최소한 혼을 내는 목표를 정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혼을 내는 이유는 나중에 혼을 낼 상황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철이 들면서 점점 혼날 일이 없어졌듯이 시간이 흘러가면 혼을 낼 일이 거의 없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혼을 내는 사람의 마음과 혼이 나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헤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님들은 혼난 이유를 먼저 생각하고, 아이들은 이유보다는 혼난 경험 자체, 또는 감정을 먼저 생각합니다. 부모의 메시지가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혼나서 다친 아이의 감정을 어루만져주고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민준이에게 혼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민준이는 그제서야 빼앗은 감자를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아이를 혼내고 난 후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으면 부모가 아이를 혼내는 이유는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혼 낸 일 자체만 아이의 뇌리에 남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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