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로 찾아온 죽음
죽음에 관해 친근한 감정을 느끼는 때가 있다.
이때는 자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매우 묘하다.
이것은 격정의 풍랑을 견디는 제주인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데,
그들은 죽음을 초월한다기보다는 죽음을 일상화시키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며칠 전부터의 경험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불의의 사고로 사촌형은 영안실에 고이 누워 있었다.
흑빛 얼굴을 하고 사촌형의 영정에 절을 하는데,
사촌형의 형님이 맞절하고 나서 한마디 한다.
"봐라~ 웃고 있지 않니?"
묘한 감정과 함께 나는 제주인의 정체성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주는 오래 전부터 샤머니즘이 일상화된 곳으로
오랜 박해와 학살 때문인지는 몰라도, 죽음에 대해 어느 곳보다도 초연한 동네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촌형님은 매우 행복한 사람인데,
직장동료들과 형제들이 근 보름간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망인과 함께 보름을 지낸 사람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웃다가 울다가 망인의 흉을 보기도 하고,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녀석들은 괜히 망인 탓을 한다.
그보다 좀 양심적인 녀석들은 망인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지 용서를 구한다.
망인과 생인이 뒤섞인 공간,
그것이 장례식장의 풍경이다.
망인은 말만 할 수 업을 뿐 생인과 함께 놀고 먹고 울고 대화한다.
형님의 회사 동료인 듯한 사나이가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한다.
사촌형님들과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마워한다.
망인에게 남아 있는 감정과 슬픔을 쏟아 주는 것은 망인에 대한 찬사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이성적으로, 즉 서울 사람의 관점에서 말을 붙이자면,
망인은 직장 동료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이런 식의 사고가 없었지만,
이 사고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그 위험이 망인에게서 직장 동료들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했다.
나는 윷놀이를 해서 1만원을 땄는데, 화투를 쳐서 1만원을 잃었다.
망인에게 나는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나 보다.
장지로 이동해서 하관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준다.
망인을 떠나보내는 것이 슬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슬프게만 볼 수 없다.
웃고 떠들고 그러다가 울고
인간의 희노애락이 다 지나가는 날이 바로 장례의 시간이다.
공교롭게도 망인은 우리 아버지 무덤 앞에 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무덤에 대고 또 야단을 친다.
"뭐 얻어먹을 거 있다고 벌써 여기 누워 있느냐?"
나는 마음 속으로 끄덕였다.
가끔 어머니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은데,
제주의 샤머니즘을 일상화하고 체화한 보통 제주인에서 내가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 손을 할머니 손에 두며
"가실 때 우리 승주 병도 다 들고 갑서~~"
나는 할머니 손을 잡으면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더러 마루에 누우라고 하고,
그 위로 아버지의 관이 지나갔다.
내 병이며 불행을 다 쓸어가야 한다나~
나는 착하게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내 위로 지나갔다.
지금도 사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죽음이 날짜를 정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거리는 짓이 참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거를 한마디로 해석하면
"삶과 죽음이라는 두 단어로 초기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기분은 망인과 함께 있을 때라야 실감이 날 것 같다.
1년 전만 해도 '죽음'이란 나에게 전설에 불과했지만,
세 번에 죽음을 만나며 죽음은 바로 내 옆에 있다.
세 번의 죽음 안에 내가 들어가서 이상할 게 또 무어랴~
죽음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손님이기에,
나는 죽음과 맞절하며 생의 에너지를 뽐낼 뿐이다.
- 이 글을 쓰는 구차한 병명
나의 상황이 그다지 어둡지는 않으며, 좀 야릇할 뿐이라는 것을 환기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