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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표면상으로는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가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없다.
-<토지> 서문 중
나는 표면상으로는 소설을 읽었다. 시대의 질곡 속에서 들려오는 민초들의 포효는 말줄임표였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따름이라는 작자의 얘기는 사무치는 겸손이었다. 이것은 단지, 저 피안을 응시하며 자맥질하는 허무한 몸짓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도저히 얘기할 수 없다. 나는 전율없이 <토지>를 회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바람과도 같이 영성을 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토지 19권 p.331
박경리가 엮은 언어의 틈새에는 나를 향해 달겨드는 별빛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언어의 마성을 초월했다. 유일하게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에의 천착은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 2011년 8월 7일, 1994년 8월 15일 작가가 마침내 끝을 맺은, 1945년 8월 15일의 얘기를 읽어냈다. 문득 깨어보니 독도분쟁은 한창이었고 동경에서는 한류 반대 시위가 일고 한국의 여성 격투기 선수는 일본의 남성 개그맨 세 명에게 무참하게 구타당했다. 역사적 기억들은 하나의 화인 같다. 후손들은 그 화인 주위를 또 맴돈다.
<토지>는 몇 차례 드라마화되었다. 주로 아버지의 재종형인 친일파 조군구에게 가산을 수탈당한 최참판댁 여주인 최서희의 집념어린 복수와 하인 길상과의 애정사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었다. 지금도 당시 서희역의 안연홍이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테야!"라며 훗날의 복수를 기약하던 당돌한 모습의 잔향이 크다. 더불어 평사리의 상민 이용과 무당의 딸 월선의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월선역의 청순하고 아름다웠던 선우은숙의 촉촉했던 눈시울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토지>에 있어 이 대목들은 일부를 차지할 따름이다. 600여 명이 넘는 인간 군상이 구한말부터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밀착하여 엮어내는 삶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토지>가 출발점은 소설이었을지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피를 따라 흐르는 눈물어린 조상들의 삶의 집단 기억을 선택받은 저자가 대필한 것이 아닐까. 숙명의 과업을 걸머지고 고행길을 걷다 저 하늘로 떠나버린 작가. 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를 자문하며 쓰지 않을 수 없던 그에게 <토지>를 읽는 일은 하나의 채무를 지는 것과 같다.
*생에 대한 연민, 그러나 삶에 대한 찬사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토지>는 시작하고 끝난다. '한'에 대한 얘기는 전체를 관통한다. 서희와 혼인한 하인 출신의 길상이 어린 시절 양육되었던 절에 장엄한 '관음탱화'를 향한 얘기들은 결국 작가가 삶의 본질에 대해 하고 싶어하던 얘기다. 슬픔과 외로움. 우리 모두는 슬프고 외롭다. 가지지 못할 것들을 끊임없이 소망하고 희망의 여백을 언제나 포기하기 않기에 한없이 슬프다. 생의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결핍과 만난다. 그러니 저마다 딛고 선 발뒤꿈치에 뭉친 울음 한 덩어리씩은 숨기고 있다.
결국 논둑길에 퍼질러 앉아서 두 늙은 여자는 익어가는 벼를 등지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토지 17권 p.333>
존재의 근원, 생명과 닿아 있는 한은 신비롭게도 허무로 흐르지 않는다. 삶의 존귀함과 진실에의 천착은 오도마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삶 자체가 존재하며 그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웠다. 그런 하나하나가 무리지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엄숙하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개미들의 행군처럼 물고기들의 군무처럼. 그러나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들,
-<토지 20권 p.268>
*개인에 밀착하는 민족의식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은 개개인의 삶으로 스며들어 온다. 전도부인 여옥이 부유한 역관 집안의 딸로 권문세가로 시집 간 명희에게 이젠 깨끗한 것보다 진실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는 장면은 작가의 독자들을 향한 준엄한 질타 같다. 민족주의는 자아에 대한 방어요, 민족적 존엄은 결국 내 자신의 존엄이기 때문이라는 서의돈의 얘기는 구한말 의병투쟁에서 동학전쟁, 항일투쟁에 이어지는 민족적 움직임이 가지는 본질적 의의를 얘기한다. <토지>에 나오는 사내들은 개인의 영락, 소망, 삶에 대한 기대 들을 가슴 한 켠에 묻고 민족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산화한다. 그 산화는 그러나 다시 개인의 소망과 내 자신의 존엄으로 귀환한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고리타분한 민족적 자긍심 고취나 맹목적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내 자신을 존귀하게 대우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딛고 서야 할 대지의 좌표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 그것은 결국 또 내가 삶을 제대로 사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다.
*물고기들의 군무(펄떡이는 은어처럼...)
<토지>에는 '나약하며 사악하고 선량하면서도 노회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열정과 냉담, 온갖 특성의 인간'<토지 19권 p.88 >들의 군무가 펼쳐진다.
가장 악랄한, 잔인무도한 악인이 선량하고 정직한 아우를 껴안고서 눈물을 흘린다.
-<토지 9권 p.429>
살인자의 자식이 되어 버린 형과 아우는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형은 일제의 주구로, 아우는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만주로 나르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형제는 공통의 비애와 슬픔 안에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재회한다. 우리의 가슴 속에 한 명쯤 있는 형과 아우의 마음. 결국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모습. 모든 모순과 대립은 생명이기에 삶이기에 가능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기적이며 경위 바른 김이평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본래 최참판가의 노비출신으로 면천한 작인이다. 마을 장정들이 친일파 조준구가 들어앉은 최참판댁을 습격할 때 슬며시 몸을 감추었다 다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비겁한 것이기도 하지만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악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사회악의 축출에 가담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안위를 도모하며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 작은 죄책감 하나를 키우는 그의 모습은 도처에 있다.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에 가담하며 축재하는 아들 두만에게 내지르는 일성은 생존과 보신에 엉켜 붙은 자신에게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통곡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자체로 찬란하고 신비로운 것이기에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기도 하다.
*희망고문
"어머니! 이,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토지 21권 p.395>
서희를 휘감은 쇠사슬은 모조리 풀어져 땅에 떨어졌을까. 그로부터 오년 뒤 벌어진 민족상잔의 비극은 최씨가에게 어떤 비애의 자락을 드리웠을까. 아니, 어미는 하인과 통정하여 집을 나가버리고 아비마저 교살당한 휑한 집안을 집안 사람에게 빼앗겼다 이역만리 만주에까지 가서 결국 되찾게 되는 이 집념의 여인을 휘감았던 쇠사슬은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풀어질 수나 있을까. 그것은 차안에서 끊임없이 피안을 기웃거리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휘감을 수밖에 없는 숙명의 구속이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토지 5권 p.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