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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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안온하다. 자잘한 문제들이 출몰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 단조롭기도 하다.
저기는 위험하다. 어려운 과제들이 출몰한다. 그 과제들은 미처 통제하지 못하고 파멸할 수도 있을 만큼 도전적이고 위험하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더 쉽다.
그런데 인간들은 저기에 간다.  

무엇을 위해? 영웅심, 호기,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 경제적 이익, 모험심?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설명할 수 없고 포착할 수 없는 그 여백을 응시하며
해발고도 8.848미터,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전진하는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다. 
현명한 분별에 대한 욕구의 승리.
-머리말 

살아서 남은 자의 증언이다. 저자 존 크라카우어는 이 증언이 무자비할 정도로 정직하기를 원했다. 평지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희박한 산소량에 허덕이며 보고 들었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었기에 다른 생존자들과 접촉하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채집하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1996년 5월 내가 무자비할 정도로 날것인 청춘에 허덕이고 있을 때 존 크라카우어는 잡지사의 의뢰로 로브 홀이라는 유명한 가이드가 인솔하는 등반대의 여덟 고객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된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려는 그의 발걸음이 전적으로 타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소년시절 간직했던 미완의 꿈이기도 했다. 마흔일곱 살의 일본 여인, 댈러스 출신의 병리학자, 지천명을 넘긴 홍콩의 출판업자, 야근과 건설현장 인부 부업으로 등반비용을 마련한 우체국 직원, 브리즈번의 마취 전문의.  

1996년 봄의 에베레스트 산비탈에는 적지 않은 몽상가들이 모여 있었다. <중략>
 에베레스트는 항시 괴짜,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 구제불능의 로맨티스트, 비현실적인 사람들을 유혹해 왔으니까.
-p.135 

기나긴 행군과 적응 훈련 끝에 세계의 지붕을 밟은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의 복선이었다. 참사는 하산 과정에서 벌어진다.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으로 조난당한 그들은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된다.  

저자는 적절한 열정과 무모한 정상 정복열의 경계선이 아주 모호해져 버리고 그리하여 에베레스트 산비탈에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된다고 얘기한다. 적절함과 무모함. 배테랑 가이드 로브 홀과 스콧 피셔도 그 경계에서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게 된다. 산소도 없이 8.748  미터 지점에서 계속 버티며 가족들의 호소에도 결국 그곳을 떠나지 않은 로브 홀. 그는 끊임없이 자기 팀원들의 안위를 묻고 의심하고 기다렸다. 맥락이 닿지 않는 강박적인 확인, 의심. 희박한 공기 속에서 거의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마냥 자신의 역할을 챙기며 정작 자신은 방기했던 그의 최후가 애잔하다.  

에베레스트 등반도 대단히 상업화된 일면이 있다고 한다. 주변국에 허가를 받고 등반대에 들어가 등정을 하는 데에는 고가의 비용이 들고 그 등반대의 가이드, 셰르파 들에게는 경제적인 이득, 공명심에 대한 욕망이 체력, 능력이 안 되는 고객들을 무리하게 정상에 올려 놓으려는 역작용을 낳기도 한다. 에베레스트의 자연 경관을 해치는 각종 쓰레기 투척 문제도 있다고 한다. 존 크라카우어는 애초 이 부분에 대한 기사 의뢰를 받았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조난 사고를 당한 비극적인 등반대의 일원으로서 악전고투를 벌이며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특히 영리적인 목적으로 조직된 등반대가 조난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즉각 정상 등반 계획을 연기하는 모습, 고행에 가까운 등반 과정을 묵묵히 감내하고 동료들을 챙기는 모습 등은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살아남고 마는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응시를 가능케 한다. 

도덕적인 교훈을 얻자는 것이 아니다. 등떠밀지 않았는데 파멸을 각오하고 덤비는 무모한 열정을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다. 영하 70도까지 떨어지는 체감 온도, 희박한 산소로 호흡 곤란을 일으키면서도 거대하고 냉혹한 자연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마지막 인간의 존엄. 실패한 영광의 전례를 보고 듣고도 또 오늘도 에레베스트를 오르고 있을 사람들.  

인간은 속절없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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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yours 2011-08-2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듣고 구입해놓았는데 아직 읽지를 못했어요. 블랑카 님 리뷰 보니, 여름의 끝을 이 책으로 마무리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blanca 2011-08-25 22:30   좋아요 0 | URL
자노아님, 지금 딱 어울리는 책이에요. 특별한 이유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입까지 하셨다니 이제 시작만 하시면 되겠네요^^

oren 2011-08-2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와 제목만 봐도 숨이 차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blanca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1895년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했던 머메리가 쓴 책 속의 구절들이 새삼 떠오릅니다.
* * *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blanca 2011-08-25 22:34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oren님이 언급하신 '비박'이 무엇인지 이 책에서 정확히 알게 되었답니다. 지리산 등반과 겹쳐져서 oren님 생각도 났답니다. 머메리도 혹시 등반 과정에서 죽게 되었나요? 이 책에 유명한 산악인들의 얘기가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인생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절감하며 사는 것 같았어요. 죽음 앞에서도 더 담대하게 대처하고요. 인용해 주신 머메리의 얘기는 흡사 철학자의 말 같아요.

oren 2011-08-26 09:33   좋아요 0 | URL
머메리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경제학 저서까지 출판한 지식인이었죠(존 메이나드 케인즈 명저『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도 머메리의 저서와 사상에 대해 꽤나 자세하고 길게 다루고 있을 정도입니다).

머메리는 19세기 말에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에 도전한 위대한 등반가였습니다. 그는 두번의 등정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하여 친구들과 헤어져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보인 마지막 모습이었답니다. 머메리는 그렇게 낭가파르밧 최초의 희생자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죠(낭가파르밧 초등은 1953년 7월3일 헤르만불(H. Buhl)에 의해 성공).

19세기의 반항아가 남긴 한 마디는 알피니즘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고, 알피니스트들은 그 누구도 머메리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없게 됩니다. "길이면 가지 말아라."

* * *

위험에는 다른 학업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육과 정화(淨化)의 힘이 있으며, 사람이 자기가 '완전히 사치와 유약에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다. 산은 이따금 일을 좀 지나치게 밀어부쳐서 교수대, 교수틀, 낙하 발판 등의 시설을 다 갖춘 사형 집행인조차 도저히 더 훌륭하기를 바랄 수 없는 절박한 사멸(死滅)의 환영(幻影)을 산의 신봉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그라지는 저녁 노을이 절규하는 바람과 눈에 쫓겨 발걸음을 재촉하고 복수의 여신들이 능선을 따라 미친 듯이 대상을 사냥할 때, 절벽은 흔히 냉혹하고 절망적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용감한 동료들과 불굴의 정신은 몰려드는 위난의 거미줄을 잘라 내고, "세월이 지나 옛 일을 회상하는 것도 즐겁노라"는 느낌 또한 언제나 있는 것이다.
- 머메리,『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2011-08-2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예요. 구제불능의 이기심과 허영의 화신인가 하는 순간, 또 달리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이 책에 흥미가 가네요...

blanca 2011-08-25 22:35   좋아요 0 | URL
예, 섬님, 저는 특히 요새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도 그렇고요. 무어라 쉽게 단언할 수는 없는 것 같아서요. 제가 죽을 때까지 배워가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2011-08-25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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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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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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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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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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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8-26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누군가가 이 책에 대해 언급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요.
그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새 잊고 있었네요.
그런데 블랑카님의 글을 읽고 나니, 마치 저도 이 책을 읽은 듯 한 기분이 들어요! ^^


blanca 2011-08-26 21:30   좋아요 0 | URL
은희경님의 서재에도 있더라고요. 아주 독특하고도 인상적인 책이었답니다. 르포식인데 또 정작 저자가 그 사활을 건 체험의 중심에 있어서 단순히 관찰자도 아니고 생생하고 정직하게 묘사하고 싶었지만 각종 상황상 자신이 착각하고 실수로 서술한 부분도 고백하는 대목도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1-08-26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절대 에베레스트 등정은 하지 않을랍니다...... ㅋㅋㅋㅋ

blanca 2011-08-26 21:30   좋아요 0 | URL
마고님 ㅋㅋㅋ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저한테 어마어마한 돈을 준다고 해도 차마 하지 못할 것 같답니다. ㅋㅋㅋ

블루데이지 2011-08-26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지에 사는 지금의 제 모습도 어쩔땐 참~ 봐주기가 힘든데...ㅋㅋ
고통을 자처하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blanca 2011-08-26 21:33   좋아요 0 | URL
이 책 앞에서 제 고민들이 무색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백만장자 여성 등반자도 나오는데 거의 실신하다시피 하면서도 정상에 오르는 모습은 과연 인간이란 정말 다채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답니다. 파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매혹적이라는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아요.

비로그인 2011-08-2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에베레스트 등반 관련해서 상업적인 면을 폭로하는 책 소개를 본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허영을 부추켜 그곳에 이르게 하고, 그 곳에서 온갖 추악한 면들이 벌어지는.. 찾아보니 <에베레스트의 진실> 이네요.

누가 보는가에 따라 다른 장면들이 존재할거라 생각합니다. 극과 극의 책들이 나와도 에베레스트는 그저 조용히 거기에 있는 것이겠지요..?

blanca 2011-08-26 21:36   좋아요 0 | URL
저도 놀랐어요. 어떻게 에베레스트에까지 상업성이 침투했을까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잖아요. 산소통 같은 쓰레기도 산에 마구 버려져 있는 게 조금씩 정화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책에서의 조난 사고도 두 유명 가이드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다고 얘기되는 걸 보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동기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