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2번씩 집앞 공원으로 걸으러 나간다.
나는 운동이라고 하지만 사실 지금 빨리 못걷는지라 거의 산책수준이다.
특히 아침은 아침이라도 햇살이 따가워서 1시간쯤 걷고나면 온몸이 흠뻑 젖는다.
그래도 내 평생에 이렇게 시간맞춰 딱딱 운동을 하고, 더더구나 남들이 모두 출근한 시간에 이렇게 산책이라니, 이것도 나름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시간이라 생가하면 걷는 길이 즐거워진다.
아침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아 좀 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걷게 되는데 아주 드물지만 이곳에서도 책읽는 사람이 눈에 띈다.
며칠 전 아침에는 공원 내 그늘이 드리워진 계단에 한 청년이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복장은 자전거 라이딩 복장- 헬멧까지 야무지게 쓴 모습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2권의 책을 옆에 쌓아놓고 나머지 1권은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 그 1권은 거의 다 읽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같이 데려온듯한 멋지게 생긴 개 1마리.
주인이 책읽는 모습을 배려하는건지, 아니면 주인이 자전거 타고 올때 같이 뛰어오느라 지친 것인지 너무 얌전하게 앉아 그늘과 바람을 즐기고 있는 모습.
그냥 그 자체로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정말 보고 싶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3권의 분량이 비슷하고 책의 꾸밈새가 비슷한 걸로 보아 시리즈물인듯 보였다.
어제는 공원 곳곳이 좀 어수선 했다.
공원관리팀 여러분들이 곳곳에서 청소를 하고 보수도 하고 그러느라 좀 분주한 모습.
한참 걷다보니 공원관리팀 조끼를 입은 여러분들이 앉아서 쉬고 계시더라.
그런데 그 중 나이가 좀 지긋하신 여자분 한분이 다른 분들과 약간 떨어져서 앉아 책을 읽고 계시는거다.
역시 무슨 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하는 중간 잠시의 틈을 이용해 그 작은 그늘틈에서 6월의 아침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모습, 공원관리팀의 글자가 선명한 파란색 조끼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 살짝 울컥했다.
물건에 마음이 담기지 않을 때는 그저 그것은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집 20살짜리 딸래미가 아직도 집에 있을 때는 끼고 사는 너덜너덜하고 찢어지고 시커무죽죽한(원래는 하얀색이었던) 애착인형 같은건 그냥 물건일수가 없다.
딸에게 제발 좀 버려라고 하면서, 아무리 눈에 거슬려도 내맘대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딸아이의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것. 그 애착인형을 단지 물건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책은 단지 책일뿐이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도 아무리 감탄하며 읽은 책도 그 순간이 지나면 잊혀질 책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 내 인생에서 소중한 기억이 되어주거나 내 인생의 반짝였던 순간을 함께 했거나 그런 내 삶의 한 장면을 품고 있는 책이 있다.
인형이 특별해지면 애착 인형이 되듯이, 책 역시도 특별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씨가 모으고 쓴 이야기들의 모음인 이 책에는 꼭 반드시 그 책이어야만 하는 책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여있다. 솔직히 책을 읽기 전에는 책에 얽힌 사연들이 뭐 그리 많을것이며 그런 책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들이 책과 얽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작을 여는 이야기는 한 노신사의 방문인데 이 분은1963년에 출판된 구라다 하쿠조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을 찾는다. 젊은 시절 마음을 둔 여인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할까 연애편지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다 이 책의 앞부분을 읽고는 아 이거다 하면서 연애편지를 술술 써내서 그 여인에게 완성된 연애편지를 건넬 수 있었다는 이야기.
비록 그 여인과 맺어지지는 못했지만 젊은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노년의 신사는 이 책을 찾았다는 소식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택배를 마다 하고 직접 상경하여 책을 고이 모셔간다. 그리고 남긴 말이
"오랫동안 찾아다닌 내 젊은 시절의 고운 사랑 같은 책을 찾았는데 어찌 우편으로 받겠소? 내가 직접 모셔가야지."(23쪽)
노신사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저 말이 저자로 하여금 책에 얽힌 이야기를 수집하는 길로 들어서게 한다.
나라도 저런 말을 듣는 다면 마음 한켠이 뭉클해지리라.
아무리 찾기 어려운 책도 그 책을 찾는 마음이 간절하면 어느날 그냥 문득 나타나기도 한단다.
때로 사람이 책을 찾는게 아니라 책이 사람에게 와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표현하는데 어쩌면 사물들간의 인연과 간절함이 그런 힘을 가지게 할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학창시절의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준 시집을 찾는 이는 사실은 시집이 아니라 그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캐나다 이민을 택해 연인이 떠나버리자 선물받았던 시집과 함께 모든 책을 헌책방에 처분해버렸던 K씨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책을 다시 찾는다. 시집을 찾아 가지고 있으면 그 연인을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다린다고..... 그들이 헤어졌던 이유는 그들이 남자와 남자 동성간이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바람에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게 됐던 것. 1970년대에 커밍아웃이라니 그들이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단박에 와닿으며 지금 그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 애틋하게 사무쳐 온다.
부디 시집이 그리운 이를 데려다 주길 같이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병으로 죽은 아내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맞선을 볼때 아내를 꼬드기기 위해서 읽은척하며(실제로는 앞부분밖에 안읽었던) 함께 얘기했던 책을 찾는 중년의 남자,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했던 책을 읽지 않았던게 끝까지 마음에 걸려 다시 찾고자 하는 이, 철학을 공부하던 동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그 동생을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면서 동생이 권했던 책을 찾는, 그래서 책이 너무 두꺼우니 읽다가 어려우면 덤벨로도 쓰면서 천천히 읽겠다는 근육맨, 시집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채로 외워 완벽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싶었던 이는 먼 훗날 다시 그 시집을 찾으면서 삶의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책에 얽혀 있는 이야기들은 정말로 너무나 다양해서 아 정말 사람들은 누구나가 모두 특별한 존재구나.
또한 모든 책은 누군가에게는 또 특별한 무엇이 되는구나
문득 나와 나의 서재와 나의 책을 둘러보게 하는 이야기들로 꽉 채워진 이 책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집 서재 제일 아래칸을 훑어봤다.
그 칸은 오랜동안 몇번의 이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오래된 책들을 처분하는 과정에서도 버리지 않고 끝끝내 안고 온 오래된 책들이 꽂혀 있다.
거기서 두권을 살짝 꺼내 먼지를 틀고 한장씩 한장씩 열어본다.
알라딘의 검색에서는 1989년 4월에 출간된 증보판이 뜨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979년에 발간된 초판본이다.
내가 이 시집을 산게 1986년 고3때였는데 참 어지간히도 안팔렸던가 보다.
여전히 초판이 서점에 남아 있었으니......
출간된지 40년이 넘었으니 시집의 페이지마다 둘레 1cm정도는 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집은 아마 내가 죽기전까지도 계속 가지고 갈, 혹시 잃어버린다면 책을 찾아주는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씨에게 찾아달라고 의뢰할지도 모르는 책이다.
별 사연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시를 아주 쉽게 우습게 알던 내가 우연히 시집의 제목이 있어보여 샀던 이 시집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아 이런 시를 쓰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절절하게 피를 토하듯 말을 토해내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어 찾아본 작가의 연혁에서 그가 단국대 사학과를 나온걸 알았다.
그리고 그 때 내 진로는 그냥 사학과로 결정되어졌다.
한번도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내가 고3때 읽은 이 시집 하나로 단박에 사학과로 진로를 결정해버린게 한 이 시집은 어쩌면 충동적이고, 그만큼 에너지가 넘쳤던 내 젊은 날의 길잡이가 아니었을까?
그저 젊음 하나로 빛나고, 그렇기에 한순간의 충동적인 결정도 가능했던 내 어린 시절의 표상같은 책
오랫만에 먼지를 틀고 책속 시들을 들춰가며 읽는데 여전히 신동엽 시인의 시는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고종석 작가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도 꺼내놓고 먼지를 튼다.
이 책은 책의 내용보다도 연애시절 남편이 내게 선물한 책이다.
남편이 내게 선물한 유일한 책. 참 오래도 연애하면서 책선물은 진짜 안했구나.
책의 뒷면에 김용택 시인의 시 "참 좋은 당신"을 써주며 몇자 적은 말이 오래된 연인에게도 심쿵할 수 있구나 했던....
연애 시절의 마지막 설렘을 기억하는 책이 이 책이구나
이 책은 설사 잃어버린다 해도 어디에도 찾아달라 할 수 없는 , 세상 유일한 책
며칠전과 어제 운동길에 만났던 그 청년과 여성분도 어쩌면 그 순간의 책이 무언가 빛나는 한순간을 담은 책일 수도 있을 테고, 이 글을 읽어줄 알라딘 서재의 여러 지인분들도 그런 빛나는 순간의 책이 다들 어딘가 한편쯤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여전히 책을 읽는 것은 소중한 시간이다.
앞으로 또 어떤 책이 나에게 새로운 빛남을 만들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