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답사여행의 첫 기억은 대학 일학년때 지리학 교수님과 함께 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회교육과여서 전공수업으로 지리도 들어야 했는데 지리학강의 끝에 답사여행이 있었던 거다. 당시엔 여행이란 경험도 별로 없었던 때고 더군다나 답사여행이란 것은 처음이라 그때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 인생에 여행이란 것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깊이 새기게 된 경험이었다.
전라남도 순천의 낙안읍성으로 답사를 갔는데 지금은 낙안읍성 민속마을이라고 조성이 잘 되어있지만 그 당시는 그저 초가집 기와집들이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아마도 민속마을을 조성하려고 곳곳에 공사중이었던 듯 하다. 여행이란 관광지로 잘 개발된 곳을 다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배낭하나 달랑 메고 시골길을 누비며 한국의 가옥형태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경험이 너무 뿌듯했다. 그저 그런 골목길, 그저 그런 돌장식, 그저 그런 가옥의 배치속에 다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다니. 그때 처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건 예전과 다르다`라는 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런 내가 본격적으로 답사여행을 다니기 시작한것은 결혼을 하고 대전으로 이사를 하고서부터다. 사회 시간에 대전은 교통의 중심지라고 배우고 외웠는데 실제로 살아보니 몸소 느낀 것이다. 일단 생소했던 충청도 지방 이곳 저곳을 둘러보러 다녔고 국토의 중앙에 있는 탓에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맘만 먹으면 당일 여행도 가능했다. 그러니 주말마다 어린 아기들을 끌고 남편이랑 둘이서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다행히 남편도 답사여행 마니아 ㅎㅎ)
1993년 유홍준 교수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불지른 답사여행의 한을 그때 다 푼 것이다. 책에 나오는 곳도 가보고 무작정 길을 가다가 문화재 안내판이 있으면 들러보기도 했다. 그땐 네비도 없던 때라 지도를 열심히 읽어가며 돌아다녀서 전국의 도로망을 속속들이 꽤뚫게 된것이 부수적으로 얻은 수확이다ㅎㅎ. 길이 아직 없어서 고생한 적도 있고, 힘들게 갔는데 아직 공개를 안하고 공사중인 곳이어서 실망한 적도 있지만 그땐 목적지가 따로 있었던 여행길에서도 가는 길에 나타나는 문화유적 표지판만 보면 자꾸만 샛길로 빠지곤 했고 그 유적들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마치 내가 발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땐 아이들도 어릴 때라 데리고 다니는게 심히 고생스럽기도 했고 무슨 정신에 그렇게 애들을 끌고 다녔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의 거의 대부분의 추억들이 그 시절 답사여행에서 생긴 것이다.
지금도 뿌듯한 기억중 하나는 익산 여행중에 찾아갔던 왕궁리 5층 석탑이다. 당시 막 유물을 발굴하던 중이라 발굴터에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하지 않았는데 우리 가족이 하도 관심있게 기웃거리니까 관계자분께서 직접 발굴한 유물들을 보여주시고 그곳 화장실터 발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신라시대 화장실터라니! 그땐 저런 막대기로 뒤처리를 했다니! 말씀해주시는 게 모두 신기하고 놀라웠는데 그런 곳이 이제는 백제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니 마치 내가 발굴해 낸것 같은 답사여행의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바다만 보며 살아온 내게 생경하면서도 나를 사로잡은 풍경은 산과 어우러져 휘돌아 흐르는 강의 풍경과 그 강변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마을의 풍경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이번 남한강을 따라 여행하는 답사여행기는 울림을 주는 장면이 많았다. 영월, 충주, 단양, 제천등은 실제로 가보았을때도 강변의 풍경에 넋을 놓았던 곳들인데 그런 곳을 유홍준 교수님의 가이드와 함께 하니 그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원래 강물은 직선으로 흐를 때보다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돌아 갈때가 아름다운 법이라는데 4대강 사업이후 강변 풍광이 어떻게 변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쉬운 부분이다. 작년 여름엔 춘천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아주 잘 정비된 `4대강 종주 한강 자전거길`을 보았다. 애들은 자전거 타기 좋겠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유홍준 교수가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천연스런 모래톱이 반듯한 고수부지로 정비되고 곧게 뻗은 자전거길이 나있는 모습들이 나는 그렇게 좋아보이지만은 않더라. 여름이었는데 주변에 나무 하나 없는 땡볕에 자전거 타고 달리다 일사병에 걸리지 않을까 싶고.
우리 가족은 2006년 경기도 분당으로 이사했고 남편은 승진을 할 수록 더욱 바빠져서 주말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고, 교통체증도 심해서 주말 여행을 떠나기는 힘들어졌다. 지금은 애들도 바빠서 여행이라도 한번 가려면 오만가지를 고려해야 겨우 떠날 수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한번 가는 길에 더 욕심을 내서 이것 저것 보려고 한다. 이제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은 불만을 표시한다. 대체 볼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중간에 딴길로 새는지 답답한 것이다. 특히나 아무것도 없는 절터, 폐사지에 갈때면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시위를 하기도 하는데 책에서 유홍준 교수님이 남한강변 폐사지에 대해 쓰신 글을 보며 너희도 언젠가 그 깊은 뜻을 이해할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웃음이 났다.
사실 나도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빈 절터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 난감했었다. 의외로 우리 국토엔 ㅇㅇ사터가 많고 찾아가보면 옛 절터와 탑, 승탑, 탑비가 외롭게 우두커니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 볼 것 없는 곳에 몇번을 가보다보니 비로소 폐사지를 찾는 마음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처음 감동을 느꼈던 곳은 경주의 감은사터에서였다.
지금은 텅 비어 흔적만 남은 그 곳을 보다보면 `머릿속은 무엇에 빨려가듯 텅비고 마음은 넓게 열리는(342쪽)`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러 가는 그 느낌을 이해 한다. 그 곳에 어떤 세상이 있었을지 상상해보게 되고 그 시간의 흐름이 내 몸을 통과하는 동안 이 찰나의 순간에서 바둥거리는 내 한심함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 그래서 `나는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고 권했는데 정호승 시인은 <폐사지처럼 산다>라는 시에서 아예 폐사지에 살듯 하라고 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중략)
폐사지에서 일어나는 정서가 이렇게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유는 뭘까? 더 큰 슬픔을 만날 때 슬픔이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상이 <날개>에서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라고 한 말이 이런 것인가? 아무도 가르쳐준 일 없는 불가의 공(空)개념이 저절로 다가오는 것만 같다. (342쪽)
이 책을 읽으며 답사여행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또다시 일정을 이리 저리 짜서 답사여행을 가봐야겠다는 결심도 굳게 섰다. 가는길에 보이는 폐사지터에 들르면 다시 한번 정호승 시인의 시도 떠올려보고 마을의 소박한 풍경에도 눈길을 한번 더 줄 것이다. 유홍준 교수님은 언제나 내 여행의 든든한 가이드이시다^^ 게다가 다음편은 수도권 답사기라니 가깝고 얼마나 좋은가!! 또 다음 답사기를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