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쇠고기 수입과 맞물려 광우병을 둘러싸고 온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냐에 있을 것이다. 30개월 이상 된 소와 함께 7개 위험부위에 대한 안정성 여부에 따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달려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안전하다는 쪽도 불안하다는 쪽도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우병에 대한 정확한 원인과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이되어 병을 일으키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복기가 워낙 길어 정확한 인과관계 규명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젠 대놓고 정부에서도 먹기 싫으면 안먹으면 된다는 식의 발상까지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건 그렇다치고 아무튼 이런 핵심적 논란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차피 이 논란은 안정성 여부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검역에 대한 믿음으로 해결하면 차선책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검역에 대해서도 현재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또 드러나게 된다.

아 또 하고싶은 말에서 벗어났다.
광우병의 발병은 동물사료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왜 축산업체는 동물사료를 소에게 먹이기 시작했을까. 값싸게 소를 피둥피둥 살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원인은 고기에 대한 엄청난 소비로부터 시작된다. 싼값에 고기를 누구나 접할 수 있게되면서 고기 소비는 급증했다. 이 소비에 맞춘 공급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축사가 들어서 소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 소를 먹이기 위해 나무가 베어지고 곡물을 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곡물생산은 고기소비 증가를 따라잡기가 힘들다. 이때 나타난 동물사료는 손쉽게 넘어갈 수 있는 유혹이다. 소를 키우며 오염되는 물과 소 한마리를 키우는데 필요한 곡물과 토지를 위해 베어진 나무로 인한 온난화는 논외로 하자. 
귀족들이나 소수의 부자들만이 누리던 호사스러운 고기라는 음식이 일반 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그것마저 무시하지는 말자. 하지만 매일 고기를 먹는 습관으로 인해 성인병이 일반화되고 그로 인한 의료비도 엄청나다. (이 보험료만 아낀다 하더라도 농촌을 살릴 수 있는 보조금은 충분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고기이기도 하지만 절제를 하는건 어떨까. 하루에 한번씩 먹었다면 사나흘에 한번씩, 사나흘에 한번씩 먹었다면 일주일에 한번씩, 일주일에 한번씩 먹었다면 한달에 한번씩...
특정한 기념일이나 공휴일등을 고기 먹는 날로 정해 특별한 음식으로 맛보는 것은 어떨까. 고기 소비의 감소가 우리 속에 사료먹는 소들을 방목으로 키울 수 있는 건강한 소로 만들어주진 않을까.

또하나.
일본처럼 1억이 넘는 소를 키우라기 보다는, 또 축산업자들에게 지급되는 일시처방인 보조금보다는 차라리 그 지원과 보조금으로 급식업체들의 원료를 한우로 하는 건 어떨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에 보내지는 음식들에 있어서만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누이좋고 매부좋은 방법은 아닐까. 물론 이건 현재 FTA로 인해 어려운 방법이 되버렸지만 말이다.
소말고도 유기농을 통한 토지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각 지방자치별로 인근에서 나는 유기농 채소와 소, 돼지 등을 학교나 군부대에서 납품받는다면 일정한 보급으로 인한 안정적 공급으로 농촌도 살고 국민건강도 지켜질 순 없는 것일까.

너무 답답해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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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자싹입니다.

감자싹은 독이 있어서 요리를 할 때 도려내야 합니다. 그 싹을 가만히 놔 둬보니 이렇게 자라는 군요.

색깔이 강렬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깁니다. 관상용 선인장의 느낌도 줍니다.

버섯도 독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화려하다고 하죠.

아름다움은 독약과 같은 것일까요.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를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것을 소유하려 하면 역시 해를 입게 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가는건 무엇 때문일까요?

살아가면서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듯 그것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뒤늦게 알아챕니다. 때론 그 치명적 아름다움을 한발짝  뒤로 물러서봤을 때 진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는 것. 그게 살다보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잠깐 크게 심호흡 한번 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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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4-3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자싹, 이렇게 눈을 대고 보니 아름답군요.
저것도 목숨 있는 것이라서 그럴까요. 독이 있어 그럴까요.

하루살이 2008-05-1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치명적이기도 하다?

ㅇㅇ 2014-07-2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자싹은 70도 이상 가열하면 문제가 없고 항암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현재 서 있는 곳으로부터 탈출. 모든게 바뀌는 상황의 즐거움. 그러나 그 즐거움은 조만간 사라진다. 바로 인간의 쾌락적응 능력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생리적인 변화에 빠르게 익숙해지는 뛰어난 능력이 때론 행복의 지속을 방해한다.

살을 에이는 추운 날씨에서 따듯한 실내로 들어오면 천국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곧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공기가 답답해져 온다. 이런 생리적 감각적 적응은 쾌락의 변화라는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이사, 결혼, 직장과 같은 일상의 변화가 잠깐 동안만 행복감을 전해주는 것도 다 이런 쾌락적응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쾌락 또는 행복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행복에 관한 파이 도표 이론에서는 행복의 개인적 격차 중 50%가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10%가 환경, 40%가 우리의 행동과 사고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10%라는 환경의 변화와 40%라는 행동과 사고의 변화에 있다고 하겠다.

행동과 사고의 변화가 주는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목표를 세워 그것에 즐거운 마음으로 도달하는 자세에 있다. 결국 행복이란 행동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이 무료하고 또는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목표가 무엇인가를 둘러보고, 혹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왔다면, 당장 거창한 목표를 세우기보다 당장 배우고 싶었던 어떤 것을 목표로 세워볼 필요가 있다. 그 배움에 대한 열정이 행동의 변화를 줄 수 있고, 그 행동의 변화는 행복으로 향하는 승차권일 수 있다는 사실.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는 나른한 봄날에 활기를 되찾아 줄 방편임을 알게 된다.

알고싶고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한발 한발 나아가 보는 건 어떨까. 물론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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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 8848m의 에베레스트. 초모롱마. 인간이 갈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던 곳이 불과 몇 십년 사이 수많은 사람들을 허락했다. 물론 에베레스트는 절대 정복당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년이면 수십명에서 백여명까지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예전엔 겨우 한두명 성공할 뿐이었던 곳이지만, 이제는 프로 산악인들의 도움으로 여행처럼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할 비용이 200억원인 것에 비하면 껌값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에베레스트에 도전하기 위해선 입장료를 포함해 2000만원정도는 들여야 한다. 이런 상업적 산행으로 에베레스트도 시장처럼 분주하게 되버렸지만, 결코 지상과 같은 곳은 아니다.

7000m가 넘어서면 산소가 지표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것이다. 뇌는 절대적으로 산소를 필요로 한다. 그 산소가 절반으로 줄어들면 모든 신경의 중추인 뇌의 활동이 뚝 떨어진다. 그로 인해 판단력과 기억력도 그리고 손발의 움직임도 모두 둔해진다.

이 책은 누구보다 베테랑이었던 두 산악안내인이 사람들을 이끌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실종된 최악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베레스트가 왜 신의 허락이 필요로 하는 곳인지를 실감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의 기억을 조합해 당시의 사건을 회상하는 이 책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든다. 극한 경험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서 왜 산에 오르려 하는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힘도 있다. 평범한 산 조차도 왜 오르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 책을 접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최악의 조건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책은 흥미진진하다. 또한 다큐멘터리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감추어진 심리가 드러남으로써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물론 사고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인간이 왜 겸허해야 하는지 깨우쳐 주는 이 책은 또한 인간의 도전의 위대함에 눈뜨게도 만든다. 산을 좋아한다면 더욱, 산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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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아마 저자는 세월이 흐르면 인간은 성숙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세월이 주는 것은 성숙이라는 이름보다는 변화라는 말이 맞을 듯 싶다.

군에 입대하기 전,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어 퓨 굿맨>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군부대의 구타와 관련된 재판과정을 담은 영화였다. 구타란 무조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군 제대 후 다시 이 영화를 우연히 보게됐다. 그리고 구타란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실수로 타인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실수를 줄이기 위한 구타는 용납되어져야 하는가, 또는 용납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군이라는 경험은 그 대답을 다르게 만들었다.

이런 극단적 예는 아니지만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도 보면 볼 수록 다른 느낌을 주었다. 무려 5번을 봤고, 5번의 다른 느낌을 얻었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린 왕자>나 <데미안>은 중고등학교 시절 때 읽었던 느낌과 대학교 시절, 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다시 읽게 되면 그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책은 그대로인데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책들뿐만은 아니다. 밑줄을 그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들면 왜 그당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을까 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들도 있었다. 아마 세월이 흘러 다시 읽게 되면서 밑줄을 다른 색연필로 그으라고 한다면 책은 온통 무지갯빛 줄로 가득차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9편의 단편들이 책에 대한 소중함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책과의 인연을 통해 자신이 또는 타인이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인생에 대한 통찰을 잔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책을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그 책이 친구에게 불행을 가져다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는

불행이랄거 하나도 없었어. 나는 웃는 일도 우는 일도 없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담담한 매일이 되풀이되는게 불행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이 내게 있었던 지난 몇 년동안 나는 행복했다고 생각해. (93쪽)

그래서 책을 빌려줬던 친구도 깨닫는다.

슬픈 생각이나 풀 길 없는 분노를 몇 번 맛본다고 해도,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 친구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일, 갓 나온 꽁치를 먹고 맛있다는 탄성을 지르는 것, 영화를 보며 다른 사람을 의삭하지 않고 우는 것과 같은, 특별할 거 하나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 책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고.(95쪽)

이제 책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슬픈 사실 하나를 소설 속 주인공처럼 똑같이 깨닫느다. <서랍 속>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책은 그 책안에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또는 최초의 기억을 써 놨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생각한다. 과연 그 책을 만나면 자신은 그 책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럼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면... 그런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만족스러웠을 때라는 기억에 다다르자 더 오리무중이다. 그 사실에 놀랐다. 찾지 못한 것이다. 소중한 시간도, 만족스러웠던 시간도. (111쪽)

과연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변함없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다 틀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일도. 그때마다 나는 늘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벌어진 일보다 미리 생각하는 게 더 무섭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눈앞의 일을 하나씩 처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벌어진 일들이 다 끝나 사라지고, 기억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161쪽)

희. 노. 애. 락. 삶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곁을 떠난다. 세월은 그 희노애락의 깊이와 색깔을 다르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노애락에 감사할 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철이 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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