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못생겼다' 

속으로 생각했다. '웬만하면 봐주겠는데...' 

지하철 안으로 갓난아기를 안은 새색시가 들어온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잠자는 갓난아기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었던 셈이다. '정말 못났다' 납작한 코며 툭 튀어나온 입술. 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어라, 그런데 이 새색시 좀 보게. 내 마음을 읽었나? 손으로 자꾸 콧대를 세워준다. 아마 그러면 콧대가 실제로 선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도가 지나쳤다. 자고 있던 아이가 그만 깨고 말았다. 울음을 터뜨리면서. 당황한 새색시. 얼른 코에서 손을 때고 얼르느라 정신 없다.  

풋,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 머리를 맞은듯한 충격.  

생김새란 생겨난 모양새다. 생겨난 모양새를 고치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 세상이다. 그러니 돈 들여 고치기 보다 어렸을 적부터 그 생김새를 바꾸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선뜻 이해가 간다. 잘난 자식을 만드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면 그 잘난 이라는 말엔 잘 생긴이란 모습도 포함되어져야만 한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참 잘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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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고로 80분마다 기억을 잊는 수학박사. 그리고 그의 집에서 식사와 청소를 담당하는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 이 세명이 엮어가는 사랑.우정이 소설의 큰 줄거리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를 보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아야 하는 박사의 아픔이나, 남편과 헤어져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가정부의 아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전해주는 정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의 외로움, 그리고 박사의 형수지만 과거 그를 사랑했던 여인으로서의 애달픔 등은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소설은 애틋함을 더한다. 물론 이들 사이에 신뢰와 우정이 커가는 모습에 흐믓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흐믓함과 애틋함, 바로 이 정서가 소설을 관통하면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여기에 덤으로 박사가 말해주는 숫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넘어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도 보여준다.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51쪽 

박사의 수업을 들으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가 모른다, 알 수 없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른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향한 도표다. 91쪽 

아무튼 그는 그 초라한 손가락으로 드넓은 하늘의 한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무도 구별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113쪽 

수학 또는 수치 대신 인생을 집어넣어도 의미는 통한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인생을 알 수 없다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새로운 진리를 향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조용한 진리를 대할 때 때론 환호하고 때론 절망하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인생은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이며 그 속에서 사랑 또한 수와 같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사랑의 크기는 0에서부터 무한대까지 다양하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향해 나갈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박사의 온전한 정신의 한계가 80분도 채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만, 비록 박사가 자신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와 함께 나눴던 추억의 크기는 무한하기에 이들의 사랑과 애정은 절대 나누어지지도 빼지지도 않고 끝없이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이처럼 나눗셈과 뺄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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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할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배워왔니?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 

노인으로 태어나 점차 젊어지게 되는 벤자민 버튼은 거동이 자유로워지자 집을 떠나 여행에 나선다. 몇년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그를 키워준 어머니가 건넨 첫마디가 바로 "반복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배워왔니?"다. 

일상의 지루함은 반복에서 비롯된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간혹 그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탈출을 감행하는 모험심으로 꽉 찬 사람들도 있다. 반복은 지겨움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반복이 꼭 지겨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운동을 하든, 악기를 다루든, 기계를 만지든 간에 반복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력을 쌓을 수 없다. 소위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반복은 되풀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는 번복이 필요하다. 번복이란 뒤집어 엎는 것을 말한다. 반복 속의 번복 또는 번복을 통한 반복이 반복의 지루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즉 판박이 같은 반복만으로는 발전이나 변화는 있을 수 없다. 반복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차이점을 간파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번복의 거름이 된다. 즉 반복이라고 해서 똑같은 반복인 것이 아니라 번복의 반복이 되는 것이다. 번복을 갖춘 반복의 힘은 가치를 생산한다.  

그래서, 반복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배운 다는 것은 인생의 큰 기쁨이 된다. 단지 그 기쁨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대부분 반복 속에 파묻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번복의 순간을 찾아내지 못하고 반복을 뛰쳐나와 또다른 반복만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반복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찻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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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어린아이가 되면서 생을 마감한다는 발상은 기발하다. 하지만 그냥 기발한 발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는 생각보다 풍부하고 잔잔한 감동을 전달한다.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이 큰 줄기를 형성하는듯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시간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노인에서 어린아이로의 성장은 살아가는 동안 늦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겪는 경험들은 모두가 처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벤자민버튼의 입장에서는 아주 늦은 나이에 겪는 일이 된다. 그러나 늦더라도 처음은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도 벤자민버튼은 자신의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가치 있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하고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 거니까. 최고로 잘할 수도 있고 최고로 못할 수도 있고. 난 네가 최고로 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단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단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이것은 또한 영화 속에서 영국해협을 건너는 엘리자베스 에봇 여사의 일화를 통해 보여진다. 

젏었을 적 해협을 거의 다 건너기 전 포기하고 말았던 그녀에게 기자들은 다시 도전할 것인지를 묻는다. 여사는 "왜 하면 안되죠"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남들은 불가능할거라 생각한 나이에 34시간 22분을 헤엄쳐 해협을 건넌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래서 세상엔 결코 늦은 일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끝없는 도전정신을 자극시킨다. 나이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말라고. 우리 모두 시간을 거꾸로 먹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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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영상포엠 충남 당진 편에선 굴따는 70노파의 모습이 보여졌다. 갯벌에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굴을 따는 노파는 바구니 가득 굴을 따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욕심껏 굴을 따지 못하는 것은 가득찬 바구니를 들고서 갯벌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구니는 한가득 차지 못하고 조금은 허전한듯 비어있다.  

제작자는 넌지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마음을 비우시는건 어때요? 할머니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한다.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사느냐고. 욕심은 죽었을 때 비로소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머니의 말은 머리에 쿵 하고 충격을 던져주었다. 무소유의 정신, 허허로움 속에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교훈은 할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영혼을 부러워하던 이에게 그야말로 70년이라는 삶의 세월이 묻어나는 한마디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없이 가벼워지고자 하는 영혼에 천만근 추를 매달아놓은듯 땅에 다리를 박고서 삶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삶이란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 하지만, 그 중간 중간 손 안에 많은 것을 채우고 또 채우기도 한다. 할머니가 말한 욕심은 손 안에 채웠던 그 순간들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입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남의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 호주머니에 넣어두기 위해서 등등, 결국 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던가. 그 손에 쥐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할머니의 욕심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욕심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게 인생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손 한 움큼 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바구니 가득 굴을 담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손 한 움큼의 욕심. 살아가는 의지를 불태우고 만족감에 행복할 수 있는 그 적당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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