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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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자란 더 이상의 부를 원하지 않는 상태라고 깔끔하게 정의하고 있는 이 책은 재테크는 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것임을 강조한다. 돈에서 자신으로 시선을 바꾸기 위해 300페이지가 넘는 경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란 생존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립하는 1단계와 생존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돈을 가지고 놀 수 있는 2단계, 돈을 주체 못하고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3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우리 같은 범인은 1단계 또는 2단계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3단계란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변화의 시점에서 변화를 앞서 갈 때만이 가능한 것이기에 범인의 능력 밖이 된다.

어쨌든 이 책은 부자가 왜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왜 부자가 되지 못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부자는 리스크를 관리하며 돈을 투자하고, 빈자는 리스크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에 부란 구심력을 갖는 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재테크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이 10년 후 하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인구론적으로 살펴보고, 주식의 향후 전망을 공적 자금과 연계해서 바라보며, 주식과 채권, 금과 같은 현물 자산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은연중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정답이 아니라 해답이기에 그것이 정답이 되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공부가 필요한 셈이다.

재테크의 기본은 금리에 있다는 것, 특히 수익률에 신경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20년간의 수익률 중 최고는 복리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데 이것은 리스크 없이 일정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부동산이나 주식 등의 투자는 높은 수익을 얻다가도 한두번 실패하면 결국 평균치로 수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돈은 은행 금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익률이 큰 만큼 리스크도 크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수익률을 좇는 것이 아니라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재테크에 대한 상식을 모두 무시해도 된다. 저자는 진짜 재테크는 자신의 몸값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돈을 불리는 재테크에 쏟을 시간에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킨다면 조기 은퇴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설령 회사를 나온다 해도 생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엔 고통이 따른다. 절차탁마의 과정이 없이는 절대 능력을 향상시킬 수도 없다. 일신우일신의 자세. 그것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책은 재테크란 바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임을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용하게 설득하고 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으면 하루에도 수십장의 그림을 그려야 하고, 음악을 잘 하고 싶으면 하루에도 수십곡을 작곡해야 한다는 것. 진리한 단순한 것이다. 더군다나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기 자신의 성장에 기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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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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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의 원작인 대유괴는 그야말로 명랑유쾌한 활극이다. 쫓고 쫓기는 자의 머리싸움과 어떻게 결론이 날지에 대한 궁금증이 시종일관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든다.

3인조의 무지개 동자는 억만장자 할머니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납치하고 나니 오히려 할머니가 주도적으로 유괴에 대한 작전을 짠다. 경찰을 속이고 완벽하게 돈을 받는데까지 말이다.

소설이 주는 가장 큰 반전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특히 5천만엔의 몸값을 요구하던 이들에게 100억엔으로 몸값을 올려버리는 할머니의 배짱엔 두손 두발 다 들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할머니가 그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다.

아무튼 천만과 억대의 단위가 다른 개념은 사고의 폭까지도 다르게 만든다. 흔히들 꿈이나 야망을 크게 가지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는 "돈이 힘"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돈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단의 개념 또한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목표를 10으로 정한 사람은 기껏해야 1,2,3,4,5,6,7,8,9 안에서 노는 법이다. 목표가 1000이 되면 몇백 단위에서 노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이것은 망상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은 무한한 신뢰이다. 할머니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신뢰가 없다면 이 소설은 애시당초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신뢰의 바탕엔 할머니의 헌신이 놓여져 있다. 그런데 그 헌신도 실은 재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또 아무도 손해보는 사람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 큰 돈이 오가는 과정 중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얻는다. 정말 소설같은 일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즐거울 수 있었다. 비록 내 수중엔 돈이 넉넉지 않더라도. 소설은 엉뚱하게도 돈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만들었다. 큰 돈을 얻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데에도 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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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팅게일은 “연극의 합창단처럼 2분마다 ‘전진하라, 전진하라’고 크게 노래 부르며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인간만은 되지 말자”고 말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간호사 학교는 물론 의료집단의 개혁에 큰 공헌을 했다. 그 변혁의 밑바탕엔 바로 다름아닌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해선 일체 생각않고 오직,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력이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로만 그치지 말고 한발자국 떼어보자. 어차피 흘러갈 인생의 조류라면 배 위에서 힘차게 노를 저어볼 일이지 않겠는가. 풍랑에 휩쓸려 난파당하지 않도록, 가보고 싶은 풍경을 둘러볼 수 있도록. 노를 저어야만 배는 나아가지 않겠는가. 비록 배가 꼭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지라도 노 한번 저어보지 못하고 후회하느니, 땀을 흘리고 팔에 근육이 우락부락 붙을 때까지, 햇볕에 검게 그을릴 때까지 저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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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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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때론 그 관계의 끈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혼자서 있고 싶다고 외쳐댈 때도 있겠지만, 잠시다. 외로움이라고 부르든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간에 그 고독 때문에 또다시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관계의 소멸과 생성의 반복을 인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소설은 이제 갓 스무살의 치즈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라는 무대로 들어가기 전의 두려움과 고독을 이야기한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 사람은 먼 친척뻘의 할머니 깅코. 나이를 먹을 수록 지혜도 커지는 걸까. 아무튼 깅코의 삶이 치즈의 삶에 서서히 스며들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치즈에게 다가왔다 떠나가는 남자친구, 깅코의 남자친구 할아버지 등이 정말로 아주 잔잔하게 삶이란 관계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그 관계란 어떻게 형성이 될까.

그렇게 아는 사람들을 교체해간다. 낯선 사람들 속에 자신을 내던져본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저 눈을 뜨면 닥쳐오는 그날그날을 혼자서 어떻게든 헤쳐 나간다. (188쪽)

치즈가 비로소 사회로 발을 내디디면서 느끼게 되는 관계의 정의다. 관계란 때론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다가온다.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때로는 딱딱하게 굳은 심장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누군가가 그 관계맺기의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 속에서의 수많은 순간들마다 정답이 있다면 또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누군가 옳다 그르다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불안한 것이다. 산처럼 쌓인 바나나들 속에서 한 송이를 골라내는 일에도 나는 이걸 고르길 잘한 걸까 하고 먹을 때까지도 끙끙 고민을 하겠지.(178쪽)

젠장. 정말 내가 잘 한 것일까. 고민도 하고 후회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인 사람들간의 관계맺기. 

나는 누군가를 나와 튼튼히 연결해두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혼자서 살아보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한 번은 자신이 먼저 떠나보고 싶다. 나갈까? 깨끗하게 연을 끊고, 누구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또다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겠지.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면, 파국을 맞이하고 있겠지. 그 의미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되풀이하고 있다 보면 인생도 결국 끝이 나게 될까?(150쪽)

극도의 허무감이 밀려올 때 차라리 나이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사람들에 치이고, 혼자서도 치이고. 늙는다는 것은 이런 치임에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노인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젊을 때가 정말 좋은 땔까요? 매사에 끙끙 앓고, 비관적이고, 피곤해요. 그런거, 이제 다 지겨워요. - 젊을 때는 다들 무턱대고 손을 뻗으니까... 나처럼 나이가 들면, 내밀 수 있는 손도 점점 줄어드는 법이야.(151쪽)

내밀 수 있는 손이 줄어드는 게 나이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점점 무덤덤해지는 삶일까.

전, 젊을 때 허무감을 다 써버리고 싶어요. 노인이 됐을 때 허무하지 않게.-치즈 짱, 젊어서 그런 걸 다 써버리면 안돼. 좋은 것만 남겨두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죽는 게 싫어져.-싫으세요, 죽는 거?-그럼. 당연히 싫지. 괴롭거나 아픈 건 몇 살을 먹어도 두려운 법이야.(60쪽)

아마, 그럴 것이다. 10대 때보다 20대 때보다 30대가 되면 세상을 좀더 잘 알고, 잘 대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다만 관계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의 일렁임을 표정에 드러내는 강도만 달라졌을 뿐이다. 마음 속에서의 일렁임은 큰 차이가 없지만 표정은 점점 무덤덤해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슬퍼진다. 그런 자신의 표정을 바라볼 때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도요. 그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말이에요. 변했으면 하는 부분은 안 변하고... 그 반대로 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은데.(176쪽)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마음 먹은 것과 하등의 상관없이 흘러가고, 그 흘러가는 세월은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때론 가벼운 긁힘 정도에서 끝나지만 때론 깊은 상처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나기도 할 것이다. 아픔은 나이와 상관없이 전해져온다. 다만 펑펑 울거나 조용히 흐느끼는 정도의 차이일뿐. 또는 눈물을 집어 삼키기도 하고. 그래도 어쩔 것인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오늘도 아픈 가슴을 쥐어잡고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누군가가 깊게 패인 상처를 쓰다듬어주기만을 바라면서. 나 또한 누군가의 상처를 덧내기 보다 후시딘이라도 발라줄 수 있기를... 하지만 오늘도 난 스스로의 절망감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았다고 혼자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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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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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되는 두가지 질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카메라가 대중에게 급속히 보급되면서 그림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 장면을 그대로 정지시킨채 또는 머릿속에 담아두고서 붓을 휘두르는 대신, 그 순간 손가락만 까딱하면 파일의 형태로 눈앞에 재현되는 시대에 그림이 처하는 위치는 굉장히 불안할 듯싶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미술은 대중이 처하고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굽어다보고 있다. 수십억, 수백억이라는 몸값을 지닌채 거만한 몸짓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현대미술을 대하는 대중은 왠지 주눅이 들어있다. 무엇인가 위대한 것이 숨어있을것 같은데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혹시 알 수 없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애기하는 걸 보면... 그러니까 저 뒤에는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분명해...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중략)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죽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백년, 혹은 그 이상 된 작품이나 예외적인 작품에서만 살아 있다. 현재라는 공간은 쓰레기 하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31쪽)

정말 속 시원하다. 현대의 추상화를 보면서 또는 설치미술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던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눈에 이해가 되던가. 순전히 비평가나 작가의 구라(말솜씨)로 빚어낸 예술은 아닐까 의심도 간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자격지심이 이런 비난을 함부로 뱉어낼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넌 그러니까 무식해"라는 소리가 두려워 그런가보다 라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인 에프라임 키숀은 과감히 속엣말을 꺼낸다. 간질간질하던 곳을 속시원하게 긁어준다.

실제로 지적인 속물근성은 한도 끝도 없다. 최근 나는 한 오페라 공연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지휘를 하는 15분 내내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 그리고 진보적인 관객들로부터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71쪽)

지적 허영심은 꼭 미술만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음악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영심을 이용해 비평가와 작가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현학적 어휘를 구사해 그림의 값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다. 그림은 각 가정에서 소장할 수 있는 생활예술을 뒤로하고, 투자를 넘은 투기개념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림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림이 지니고 있는 금전적 가치가 현대미술을 지탱하는 힘이 된 것이다.

요셉 보이스가 전적으로 즐겨쓰던 "그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표현처럼 진정 예술적인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해할 수 없는 허튼소리만을 지껄였다. (132쪽)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은 예술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직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교양을 지닌 식자층이다. 이 겁 많은 식자층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거만한 직업적 평론가들에게 변함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시종 난처한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168쪽)

예술을 끌어내리자. 이상하고 기이한, 그래서 폭등하는 몸값을 지니면서 전문가인체 하는 사람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내 옆에서 호흡하고,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에 눈뜨게 만들며,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도록, 예술을 말이 통하는 친구로 곁에 앉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솔직한 고백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족
물론 그러면서도 혹시 아마추어의 눈에 프로의 실력이 비쳐보이겠는냐는 질문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당구 300의 실력자가 선보이는 3쿠션을 30의 초보의 눈에는 한번의 쿠션으로밖에는 비쳐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위의 우려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꼭 하고싶다. 30의 초보자도 3쿠션의 현란한 모습을 천천히, 차분하게 설명해주면 다 이해한다. 그런데 대중을 벗어난 예술은 도대체 난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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