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종일 삭이고 또 삭인다. 입으로 넣은 음식물을 삭여야 하고, 상대로 인해 마음 속에 일어난 화를 삭여야 한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을 대한다면 삭이는 일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먹고 대하는 것들이 마냥 좋은 것일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삭이고 또 삭여야만 한다. 힘을 들여 시간을 들여 삭여야만 한다.

 

잘 삭일 수 있다면 잘 사귈수도 있다. 아니, 반대로 잘 사귈수만 있다면 잘 삭일 수 있다. 꼭 몸에 좋은 것만을, 좋은 사람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독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피톤치드처럼 자연이 갖는 독 성분이 내 몸에 이로운 작용을 하듯, 독이 독이 되지 않도록 잘 사귀기만 한다면 오히려 잘 삭아 몸에 좋은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탓할 일이 아니라 삭이는 내 몸을 잘 지켜보아야 할 이이다. 특히 시간을 들일 일이다. 공을 들일 일이다. 삭이는 것은 뚝딱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거름으로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스턴트는 사귀기는 쉬워도 삭이기는 힘들다. 잘 삭이려면 쉬운 것만을 찾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별로 없지 않던가. 몸도 마음도 잘 삭여지기를 기원해본다. 그래야 우리 삶이 세상과 잘 사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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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지리학 - 최창조의 망상록 妄想錄
최창조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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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생풍수가라 할 수 있는 최창조씨의 땅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생풍수라 함은 도선국사 이래로 전해져 온 도선풍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기본 생각은 결함이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고침의 지리학, 치유의 지리학이기도 하다. 결함이 있는 곳 즉 문제 있거나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지고지선한 사랑이 있어야하기에 비보 풍수이기도 하다. 즉 고치고 치유하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어야만 비로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생풍수의 입장에서 명당이란 완벽한 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 완전한 땅이란 없는 것이다. 자연은 말 그대로 본래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는데 뜻이 있다.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안온한 삶, 근심걱정없는 안정에 대한 욕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을 비는 묘자리 같은 음택풍수가 아니라 살아갈 집, 절터, 도읍지 같은 양택풍수라는 점이 자생풍수의 특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터를 잡는다는 것은 땅과 생명체가 기를 상통시킬 수 있는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조화로운 감정과 안정을 선사하는 곳이다. 즉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땅을 찾는 것이다. 그 방법은 본능과 직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복잡하고 미묘한 방법론(간룡법, 장풍법, 득수법, 정혈법, 좌향론)보다는 이러한 순수함을 찾아가는 것이 자생풍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이걸 인정하면 명당은 우연이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 이곳에 나는 어떻게 정착하게 됐는가. 지금 이곳이 편안하다면 바로 명당이지 않겠는가. 좋은 점은 부각시키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바꾸도록 한다. 이 바꾸려는 시도가 바로 비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과 공명할 수 있다면 비로소 명당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와 땅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벽을 쌓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래야 평안함이 찾아온다.

 

명당은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는 한 어떤 수단으로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욕심으로 잡은 자리는 그 욕심만큼의 재앙을 땅 임자에게 주는 법이다. 그렇기에 비보풍수, 즉 안좋고 떨어지는 것을 바꾸려는 노력을 들이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명당은 나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족

우리 자생풍수는 혁명이나 개벽사상의 기반으로도 기능했다. 권력의 폐해가 극심해지면 기득권의 기반을 없애고 새로운 정치를 꾸려가기 위해 새로운 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운 터에 대한 기반이 바로 자생풍수였다. 그 기반을 바탕으로 기득권과 싸우고 새로운 삶을 도모했던 것이다. 홍경래의 난이나 전봉준처럼 개벽이 실패했을 땐 정감록과 같은 도참사상이나 민족적 신흥종교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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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결혼에 대한 이런 말도 있다.

예전엔 배우기 위해서 결혼하는데, 요즘은 결혼하기 위해서 배운다.

 

이 말의 뜻은 예전엔 결혼이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는 그 스펙의 하나로 학력이 요구되는 사회가 됐다는 것일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결혼은 예전의 뜻을 지니고 있다.

 

훌륭하고 좋은 것만을 상대하고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자라면 소지섭이나 현빈을 누구나 사랑하듯, 남자라면 김태희나 송혜교 등등을 좋아하듯 말이다. 하지만 진정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남루하고 문제가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만이 진짜 사랑이라고 느끼게 됐다. 결혼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결혼은 배우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에 대한 참뜻을 온몸으로 느끼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또는 그 상대를 사랑하는게 옳은 일일까. 결혼은 끊임없는 배움을 요구한다. 사랑이 올가미가 되지는 않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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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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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란 책은 20대 중반의 한 여성이 미국 서부 3개주(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에 걸쳐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4285km를 종단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종단했던 경험을 담은 <나를 부르는 숲>을 떠올리게 만든다. 빌 브라이슨의 책은 그의 스타일답게 시종일관 유쾌하고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도 생태계가 어떻게 훼손돼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와일드>는 배불뚝이 아저씨의 유쾌한 모험담과는 달리 진중하고 자뭇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술술 읽힐 뿐만 아니라 다음 내용이 궁금해질 정도로 호기심이 가득찬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 셰릴은 40대였던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결혼생활마저 파탄을 맞아 이혼한 후 트레일 종단을 결심하게 된다.

나는 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 계획을 세우는 몇개월 동안 나를 밀어붙이는 힘이되었다. (100쪽)

그러나 계획을 세우고 떠난 모험이긴 했지만 젊은 여성 혼자 100일간 산맥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나는 도저히 내가 질 수 없는 짐을 지고 가는 중이었다. 내 육체적, 물질적 삶이 감정적, 정신적 영역까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165쪽)

 

발톱이 6개나 빠지는 힘든 길이었지만 그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 근 몇십년 이래 최대의 폭설이 내려 몇몇구간은 우회해야 할 정도로 악천후를 만났지만 말이다.

PCT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있지, 흉측한 내 발에 달려있지 않았다. 온갖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가려는 강한 의지 말이다. (338쪽)

 

100일 간의 모험이 끝나고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극한에 가까운 이런 모험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해병대 체험과 어떻게 다를까. 또는 지금 우리 산하에 불고 있는 걷기 열풍과 비슷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걸었던 길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극한의 체험과 함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100일간의 행진 중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가 느꼈던 감정은 다른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은 길을 걸었기에 가능하다. 바로 이 점이 해병대의 체험과 다른 점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힐링의 경험을 선사하는 올레길, 둘레길과 같은 걷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 또한 여기에 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도움과 배려 속에서 삶의 신비를 깨우친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549쪽)

 

3000m가 넘는 산도, 등산화를 잃어버리고 걸어야 했던 자갈투성이 길도, 얼어붙은 산등성이도, 물이 없는 상태로 건너야만 했던 사막도 모두 뛰고 넘고 돌면 끝인 것이다. 뛰고 넘고 도는 바로 그것, 그 행위를 실행해야만 하는 바로 이순간, 이곳이 진정 삶의 신비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비록 죽을만큼 힘들고 괴롭더라도 말이다. 그 다음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일테이니. 셰릴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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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탄성이 나온다. 시골이나 도시나 내리는 눈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린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바뀌기 시작한다.

 

도시는 쌓이는 눈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의 시간대로 녹아내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도시의 시간은 빠름이 장기다. 자연현상마저도 이 빠름에 휘둘린다. 쌓인 눈을 빨리 치우지 않으면 사방에서 비명이다. 그런데 시골이라고 다를까. 시간을 거슬러 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작물을 키우다 보니 눈이 많이 내리면 노심초사다. 비닐하우스가 무너질까 계속 눈을 쓸어내려야만 한다.

 

물론 이렇게 시간을 재촉하는 행위들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풍요-겨울철에도 푸르른 녹색채소를 먹는 일 따위 말이다-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얻는 대신 우린 자연스러운 풍광이 주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눈마저 짐이 된 것이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겨울 작물을 따뜻하게 보온해주는 눈의 역할은 쌓인 눈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쓸모를 따질 때에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눈 그자체가 주는 마음의 평온 또한 이익을 따지는 계산기 속에서 눈씻고 찾아봐도 차지할 공간이 없다.

 

흔히들 나이가 드니 눈이 주는 즐거움 대신 걱정이 쌓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걱정의 근원은 나이가 아니라 바로 이해타산에 젖어든 우리의 습성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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