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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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나>에 대한 생각은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전쟁영화였다는 것이다. 혁명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 마냥 전쟁이 싫었다. 아바나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크면서 귀에 들려오는 쿠바에 대한 이야기들. 하지만 이것 또한 카스트로라는 독재자(독재자라는 단어엔 이미 부정적 뉘앙스가 풍기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공산주의국가일 뿐이었다.

반공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결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어는 순간 한국의 수호천사였던 미국이 결코 우방이 아님을,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것이 반공교육 속의 유치한 빨간 도깨비, 늑대의 나라가 아님을 정말 어느 순간 느닷없이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보게 되면서 몇 해전 그토록 사람을 열광시켰던 체 게바라라는 인물을 보게 된다. 물론 영화는 쿠바의 음악인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 속 쿠바 풍경 곳곳에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그림 속엔 베레모를 쓰고 있는 그가 지키고 서 있던 것이었다. 호기심은 그 때 일었다. 그가 죽은지 30년 이상이나 된 지금에서도 그는 쿠바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하는 궁금증과 함께 그에 대해 한번쯤 알아보아야 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찾아들게 됐다.

체는 그야말로 책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듯 그 시대의 완벽한 인간 그 자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 자신에 대한 완벽한 절제, 끊임없는 혁명에의 열정 등등.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못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가 되겠다는 생각 또한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체를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와 같은 치열한 삶을 살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속도전에 휘말려 자신의 그림자조차도 둘러보지 못한 세상에서 거꾸로 느림에 대한 찬양이 일고 자신을 둘러보는 종교적 소양이 반대급부로 득세하는 이 때 결코 속도의 노예도 되지 않고 게으름의 깊은 잠에도 빠지지 않는 정열적 삶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이미 성인이 되기를 메시아가 되기를 포기한 나의 삶에 있어서 혁명가는 멀고 먼 이상향일 따름이다. 하기야 책 속에선 가슴에 이루지 못할 꿈을 간직하고 살라고 했으니 비록 이루진 못한다 하더라도 포기는 말아야 할련지도 모른다.

아무튼 체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 그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향한 혁명의 수단인 저항적 폭력은 아직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혼란스런 부분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구조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새 인간형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찬성하며 자본주의의 물질적 자극을 통한 생산성이 가져오는 욕망의 부추김에 대한 거부도 찬성한다. 그러나 테러와는 다른 혁명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른 뺨을 맞았을 때 과연 왼 뺨을 내밀 것인지 상대방의 강압적 폭력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인지 나는 아직도 알 지 못한다. 다만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그가, 자신의 육체적 고통마저도 이겨내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음에 대한 그 이유만을 어렴풋이 알게 됐을 따름이다. 희미한 안개를 조금씩 걷어내는 한줄기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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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도시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 이성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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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절이라는 사건을 소재로 해서 한 지역사회의 권력층과 그들을 둘러싼 더러운 고리들을 파헤치고 있는 이 작품은 <지놈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생명이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 <에이리언4>에서 끔찍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시고니 위버의 복재실패작들을 지켜보자면 이런 참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생명체에겐 차라리 죽음이 훨씬 자비스런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옛날 의학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을 땐 아이가 어떻게 태어날 지 또 남자아이일지 여자아이일지도 알 수 없기에 아이를 미리 죽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낙태는 그외 다른 이유때문에 행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학기술의 발달은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경우엔 아들과 딸의 감별도 가능케 해줌으로써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즉 새로운 기술의 발달은 그 기술에 걸맞는 새로운 가치관 형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놈 프로젝트가 가져올 또다른 가치의 강요는 과연 무엇이 될련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SF영화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가치의 혼동은 결코 먼 이야기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정의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처리가 사회마다 다를 뿐더러 그것이 과학이나 의술과 같은 기술적 측면에서도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냥 가볍게 넘겨버리지 못 할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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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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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심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일까?

소설은 노인이 복수심으로 뱀을 죽인 이야기와 사냥꾼들의 무자비한 살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복수심에 사람을 죽이는 살쾡이를 보여준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복수라는 감정의 들끓음으로 나타나는 치열한 피의 향연들.

<노자>에선 자연이란 어질지 않은 존재로 그려진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 그러한 존재로서 아무 사심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자연의 모습이 워낙 큰데다 작은 사물 하나하나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감정없는 그들의 움직임이 인간에겐 때론 이익이 되기도 해를 끼치기도 한다. 어떤 의도가 가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인간에게 할큄을 당하는 자연들의 분노를 느낄 수가 있다. 우리의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은혜갚은 호랑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수컷의 고통을 끝내준 주인공 노인에게 암컷은 정정당당한 한판승부를 요구한다. 노인은 이 승부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그들의 분노가 뼈속에 사무쳐옴을 느낀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밀림이 점차 없어지고 온통 사막화되어가는 속에서 자연은 이제 그 복수의 본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 기온현상이란 이상한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복수심에 불탄 자연의 당연한 보복일 따름일련지도 모른다.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는 식의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 과연 인간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분노에 슬피 우는 자연의 울음을 이 책은 섬세하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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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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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 홍세화씨가 생존을 위해 택시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를 직접 쓰고 있다. 파리의 고단한 생활을 일기장 써내려가듯 써가면서 간간히 한국에서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그의 현재 생활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며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면서도 결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세화씨는 프랑스 삶 속에서 그들의 똘레랑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 똘레랑스란 타인의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자세, 법과 탈법사이의 허용되는 반법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가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평등적으로 대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똘레랑스라는 것이 바로 이성적 사유의 확장으로 가능한 것임을 우리의 정적 관념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똘레랑스라는 것이 어찌보면 공자의 말씀중의 한대목과 똑같은 사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즉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정신은 똘레랑스와 같은 자리에 놓아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의 이 똘레랑스 정신에 대한 찬가외에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는 바로 개똥 3개에 대한 우화. 서당 선생님과 3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바른 소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땐 자신이 개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나의 양심을 찌른다. 침묵도 저항의 한 수단일 수 있음을 주장하며 외치지 않고 지나온 지난 세월에 대한 부끄러움이 문득 내가 개똥 처먹는 인생을 살아왔지 않나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갖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이 자성을 요구하는 개똥이야기는 앞으로도 나에게 그 개똥을 계속 처먹고 살것인지 끊임없이 물어볼 것이다.

침묵과 개똥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책장을 덮으며 새로운 물음이 내 몸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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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풍차
시드니 셀던 지음 / 청목(청목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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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이 거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드니 셀던에게 있어 지구는 부처님 손바닥 안인가 보다. 물론 미국이라는 국적을 지닌 사랑에게 있어 세상은 세계경찰인 자신의 나라가 지키고 있는 하나의 마을일뿐일련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인간 대 인간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루마니아의 새 대사로 촌 구석의 여교수를 임명한다. 여교수는 처음엔 가족들 때문에 고사했지만 뜻하지 않은 남편의 사고사로 대사직을 응낙한다. 루마니아로 떠난 새 대사는 아무추어적 신선한 바람으로 새로운 변혁을 조금씩 이루어낸다.

한편 미국의 새 프로젝트는 좌, 우 이데올로기의 유지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부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루마니아 대사를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전문 킬러는 이 일에 실패하고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바로 아깝게 대통령직에 오르지 못했던 대통령의 친구임이 밝혀진다.

이 소설은 전문 킬러가 누구일까? 루마니아 대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해 흥미를 자아낸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을 읽어가는데 있어 조금 부담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루마니아 대사의 인간 대 인간 프로젝트라는 것이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기본 법칙 중 하나인 교환의 법칙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 과연 교환이라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동서를 넘어서 하나의 인간세계로 나가자는 데 있어 그 기본은 바로 무역에 있으며 이 무역이 그들간의 전쟁을 예방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본주의적 물물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라는 생각은 왠지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 오만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반면 이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조직과 개인에 있어 개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루마니아 대사직을 수행케 하기 위해 그 남편을 사고사로 위장시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소름이 돋는다. 주변의 사고라는 것도 어찌보면 위장된 우연일뿐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 갓 인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또 기득권의 세력 집단을 구성하던 구성원들이 사라진다 해도 또 다시 그 집단은 새로운 구성원을 만들어간다는 암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 벽을 깨뜨리려 해도 그것을 허물어뜨릴 수 없는 두꺼운 벽인지를 실감케 한다. 아무튼 세계를 배경으로 호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이 추리물은 미국적 색채를 조금 벗겨내고 읽는다면 흠뻑 빠질만한 재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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