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내 아이의 전쟁, 알레르기'가 이번주 방송됐다. 아토피에 힘들어하는 아이들과 치료과정 등을 보여주었는데 논란을 불러 일으킬만한 여지가 상당 부분 있다.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아토피의 원인인 가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의학적 방법은 현재로선 없지만, 가려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부염은 스테로이드로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양약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수많은 대체요법이 회자되고, 그 중엔 생명을 앗아갈만큼 위험한 것들도 있다는 점, 아토피를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이 제작진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작진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내어 스테로이드 사용을 제시했다.  

아토피를 어렸을 때부터 앓아왔고, 현재도 완전히 낫지 못하고 몸에 지니고 있는 입장에서 다큐의 주장은 반쪽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큐에서도 보여줬듯 아이의 아토피를 치유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황토집을 짓고 살아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냉온욕, 풍욕을 비롯해 수많은 비법들을 실천해봐도 완전한 치유는 멀기만 하다. 물론 이런 요법들로 아토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비법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람들은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그 방법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방법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반면 이런 대체요법들로 인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 아이들에겐 차라리 스테로이드가 방법일 수 있다.  

제작진은 스테로이드에 대한 공포증을 이야기한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1990년대 10년간 공포증에 휩싸여 대체요법 광풍이 불다 점차 스테로이드 요법으로 돌아섰다는 자료는 일견 동감되는 부분이다. 우리도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대체요법이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잘못된 민간요법으로부턴 멀어져야 한다. 물론 아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에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부작용이 큰 요법을 떨쳐내는 것이 어렵게 된다. 아무튼 제작진은 사용법을 제대로만 익히고 쓴다면 스테로이드는 정말 마법의 특효약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다. 스테로이드는 정말 묘약이다. 피부가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는 곳에도 스테로이드는 그 힘을 발휘한다. 연고를 바르고 2~3일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피부는 깨끗해진다. 하지만 피부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고 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려움은 언젠가 다시 나타나고 염증은 다시 도진다. 그러면 다시 스테로이드를 쓰면 된다. 그렇게 평생을 살면 되는 것이다. 마치 여자들이 화장품을 평생 몸에 바르듯 그렇게 바르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스테로이드를 바르다 보면 여드름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또는 코끼리 피부처럼 두꺼워지기도 한다. 얼굴에 자주 바르다보면 피부가 벌개진다. 또 쉽게 햇빛에 타 검게 그을리기도 한다. 그래도 밤에 잠못 이루고 피가 나도록 긁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테로이드의 약효는 항상 일정하지가 않다. 다행히도 스테로이드를 써서 가려움이 가라앉은 상태로 어느 순간 아토피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천운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토피를 달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1년에 스테로이드를 바를 정도로 심하게 악화되는 경우가 한두번 이던 것이 점차 간격을 좁혀간다. 계절마다 약을 쓰다 월마다 약을 써야 한다. 그리고 매주 약을 써야 하는 경우에 처한다. 이때가 되면 여드름과의 싸움에 지치고 벌개진 얼굴에 대인기피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발라도 발라도 가려움을 가라앉지를 않는다. 스테로이드의 마법이 사라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위기감이 양약을 끊고 식이요법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스테로이드는 그저 대증요법인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는 한계를 드러내는. 아토피의 원인인 가려움을 잡아내는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명상이 될 수 있고, 채식이 될 수도 있으며, 자연적 삶의 양식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아직은 명확한 방법을 찾을 순 없지만 근본 치유를 하지 않고 대증요법만으로 사는 것은 불행을 잠시 유보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다큐프라임은 절반의 설득력만 지니고 있는 것이다. 2차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대체 요법을 찾는 것은 안되지만, 근본 치유를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는 마녀가 쓰는 마법의 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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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까리 2010-07-2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글에 완전 공감합니다. 아토피 환우들이 스테로이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생긴 요인 중 하나인 의사들의 무분별한 스테로이드 처방에 대해서 좀 언급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피부과 의사들은 스테로이드를 좀 강하게 처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무분별한 스테로이드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의료계에 먼저 뿌리내려야 일본과 같은 풍토가 자리잡힐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생물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차이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MBC스페셜 <남자의 말 여자의 말>에선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가지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남자끼리, 또 여자끼리 6명씩 자리를 함께 한 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여자들은 주제를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수다를 떨었고, 남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에 가깝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등등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들도 많다. 이러한 차이는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다. 또 책 <아이의 사생활>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남녀의 차이를 알아본 시험을 통해 언어에선 여성이, 공간감각은 남성이 앞서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 도대체 남녀간의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한 걸까.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들자면 인간이 사냥, 수렵생활을 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육아와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로 말이다. 사냥을 하는 남자는 한가지 사냥 목표만을 향해 몇일이고 말없이 집중해야만 한다. 반면 여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열매나 뿌리 등을 캐기 위해 서로 정보를 나누며 다양한 살림살이를 한다. 이런 행동은 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쳐, 언어를 말할 때 남자는 왼쪽 뇌만 여자는 양쪽 뇌를 모두 사용하도록 진화하게 됐다.  

뇌의 사용부위가 다르다는 것은 여러가지 뜻을 내포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어봤자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TV를 시청하고 빨래를 개는 게 가능한 여자들. 남자들의 대화는 결론을 이끌어내야만 하고, 여자들의 대화는 공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 등등. 그래서 때로는 서로 말을 거는 행위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툼없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기 위해선 이러한 남녀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말 별달라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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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똥은 향긋하다. 구린내가 나지 않는다. 향기의 비밀은 똥을 구성하는 인돌이라는 구성 성분에 있다. 인돌의 성분이 적을 때 자스민과 같은 향을 내뿜는다. 하지만 인돌의 성분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 많아지면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코끼리 똥은 적은 인돌 덕분에 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향은 사자들의 성 호르몬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코끼리 똥을 본 사자들은 몸에 비비기도 하고 심지어 핥기도 한다.  

지난 11일 법정스님이 입적했다. 무소유라는 책을 통해 알려진 법정스님은 가시는 길마저 향기를 뿜는다. 법정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기꺼이 나눠 쓰는 것이 무소유다. 마치 코끼리 똥의 인돌같이 필요한 것만 가질 때는 그 사람에게서 향이 날 것이요,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할 땐 고약한 냄새가 날 터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사용가치와 교환가치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본다)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치러진 비가 오는 일요일. 곰곰히 생각해본다. 향기로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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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럿거스대 엘리자베스 트라이코미 박사팀이 불평등을 못참는 뇌 보상회로의 활동을 기능성자기공명영상촬영장치로 촬영한 논문을 영국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지금까지 심리학 실험으로만 증명돼 왔던 인간 심리의 기제가 뇌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심리학 실험 '최후통첩 게임'은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실제로 행해진 것으로 불평등에 대한 반응이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진짜 화폐로 20만 루피아(약 250만원) 를 실험자 한 명에게 건네고, 이 실험자는 다른 실험자에게 배분을 한다. 만약 다른 실험자가 그 배분을 인정하면 둘은 그 배분대로 돈을 갖게 되고, 인정하지 않으면 둘 다 돈을 못받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두번째 실험자는 어떻게 배분되더라도 공짜로 얻는 돈이기 때문에 승낙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실제론 99대 1이나 98대 2의 불평등한 배분에 대해선 불가를 외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더라도 불평등을 참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실험 과정에서 사람의 뇌가 활발히 작용하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 이번 미국 럿거스대 박사팀의 논문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백만장자들의 수입이라거나 유명 스포츠 스타나 영화배우 들의 년간 수입에 입을 쩍 벌리면서도 한탄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도대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냐고 생각하는 기저엔 차이는 인정하지만 그 정도까지의 차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그것은 불공평하다는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까지의 불공평함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또는 분개하는 것일까. 최후통첩 게임의 경우 몇 대 몇 정도로 나누었을때 최대한 용납 가능한 수준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용납 수준이란 것이 본능적인 것이지, 사회적, 교육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아 변화 가능한 것인지도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살던 사람과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 던 사람의 기준도 똑같은지 실험해 본다면 유익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극하는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불공평을 수긍하는 태도도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도시와 농촌, 세대간의 차이는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다.  

반면 우리는 때론 복불복(1박 2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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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신동이라 불렸던 모짜르트. 그의 생애를 다룬 예술 작품들은 많다.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영화 '아마데우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짜르트라는 이름 이외에도 살리에르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천재를 뛰어넘을 수 없는 2인자의 시기와 설움을 잘 드러낸 이 영화는 천재를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모짜르트의 특이한 웃음으로 표현된 천재성은 기행과 아울러 슬픔까지도 묘하게 스며있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와는 다르다. 뮤지컬은 아마데우스와 그의 아버지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주의 보호 아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아마데우스의 능력을 펼쳐보이도록 해 주고자 했던 아버지와 틀에 갇힌 삶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음악을 펼쳐보고자 했던 아마데우스의 충돌이 뮤지컬을 끌고 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자간의 갈등이 왜 그리도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는지를 충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화려한 가발과 의상, 무대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기쁘게 해준다는 것이 위안이다. 귀에 익숙한 남작부인 신영숙의 '황금별'은 소름을 돋게 만들고, 대주교 역의 민영기가 부른 '모차르트를 찾아라', '어떻게 이런 일이' 등은 가슴을 확 뚫어준다.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어린 모짜르트도 아쉬움이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어린 천재 모짜르트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가 즐거워하거나 반대로 좌절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대비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영화 아마데우스의 강렬한 웃음 소리가 마음 깊숙히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으리라.  

오이디푸스.엘렉트라.카인 콤플렉스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때론 족쇄가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이런 가족간의 상처를 드러내고자 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아 그 상처가 좀처럼 애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재성을 지닌 아이를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아버지와 여리고 여린 아들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끔 짐처럼 느껴졌던 이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상처로 비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하기에 아버지를 잃은 모짜르트의 눈물 또한 모호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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