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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소설을 읽은지 열흘도 넘은 것 같다. 줄거리조차도 가물가물하다. 그럼에도 리뷰를 쓰겠다고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건 왠지 어떻게 해서든 책을 읽었던 당시의 기분을 다시 기억하고픈 욕망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욕망이 부질없음을 나는 잘 안다. 떠오르려 떠오르려 해도 끝내 떠오르지 않을 단상들.
소설을 쓴 지은이가 나와 동년배이다보니 아무래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여성이라 심리묘사에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성적 차이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는가보다. 남녀를 따지지 않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쉽게 동화가 된다.
최근 한겨례21이라는 주간지에서 <서른 다섯, 물음표 위에 서다>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와 맥락이 같다고 보여진다. 결혼을 해야 할 것인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 일을 추진할 것인지, 노후는 어떻게 될 것인지, 돈을 번다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사이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심하게 갈팡질팡 하는 세대. 물론 20대 중후반을 포함해 40대 들도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겠지만, 어쨌든 동년배의 작가가 기술하는 인물들은 내 주위에서 누군가를 하나 데려다놓고 글로 묘사해놓으면 얼추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가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청춘(?)들의 삶을 투명하게 내비치고 있다. 기억나지 않는 소설을 떠오르려 애쓰기 보단 밑줄 그은 부분을 되돌아보며 소설을 반추해보기로 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13쪽)
문자메시지는 참 고마운 도구다. 전화 통화의 어색한 침묵과 말줄임표의 곤혹을 감당하기 싫을때 더없이 유용하다.(21쪽)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106쪽)
인생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관계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사랑에 몸을 던지나 보다. 순간의 충만함. 꽉 찬 것 같은 시간을 위하여.(140쪽)
혓바닥을 놀려 진심의 조각을 입 밖으로 밀어내는 순간. 진심은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다만 의외의 곳에서 그 책임 없는 말들의 유령과 조우했을 때 받게 되는 고약한 느낌에 대하여 더듬더듬 기억할 수 있을 따름이다. (204쪽)
어떤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섭도록 이기적일뿐더러 자기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215쪽)
뭘 하더라도 상처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겠니?(286쪽)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확고부동한 線이라는 것이 있다. 선을 밟는 행위는 반칙이다. 선을 밟거나 선을 넘다가 걸리면 찍 소리도 못하고 금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야 한다. 그런데 때론 정말 궁금하다. 그것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404쪽)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사는 것은, 오로지 나뿐인가.
길들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441쪽)
음 밑줄 그은 것들을 죽 연결하다보니 책의 내용이 얼핏 생각난다. 인생을 소모하는 듯한 느낌. 부유하는 듯한 삶. 닻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 생각하는 순간 이건 거짓이라는 생각. 아무튼 분명 나도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타지 않도록 졸지 말아야 하겠다. 내 삶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내가 올라탄 버스가 그 목적지로 가는지도 알 수 없겠지만, 무턱대고는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