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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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여자다. 한 여자는 기쁨, 정열, 삶이 그녀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모험들을 맛보길 갈망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부한 일상, 가족적인 삶, 계획하고 완수할 수 있는 자잘한 행위들의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한 몸 속에 살면서 서로 싸우는 주부이자 창녀다.(198쪽)

모험은 항상 위험하다. 새롭되 위험하지 않다면 모험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위험은 정열이라는 파도를 만나 좌초당한다. 정열은 모험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라는 순풍을 제공한다. 그래서 도달하는 곳은 신세계다. 자신이 항상 꿈꾸어 오던 신세계. 비록 그곳이 생각만큼 안온하지 않더라도, 욕망을 좇아 끝내 도달한 곳이기에 아름답다. 

주인공 마리아는 브라질의 시골서 휴양지로 잠깐의 모험을 떠난다. 혼자이기에 두렵지만 이내 발걸음을 내디딘다.

원죄는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느낀 마음의 동요를 아담과 나누어 가지고 싶어한 데에 있다.(271쪽)

끝내 외로운 존재가 사람이다. 결국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혼자다. 가정과 사회라는 안락한 품은 평온함과 안락함을 주지만 노예의 삶이기도 하다.(그러나 또한 얼마나 달콤한가?) 마리아는 자신에게 닥쳐온 유혹의 끈을 잡는다. 나이트클럽 댄서로 스위스로 날아가는 그녀. 그녀는 제네바에서 창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분명 선택이다. 어찌할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다. 그 생활 속에서 마리아는 사랑과 삶에 대해 하나둘 배워나간다. 남자들 또는 여자들의 하루라는 것이 단지 성생활에 소비되는 11분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 속에서 세상을 깨우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중요한 모든것에 대한 포기라는 사실만 알아둬요. (262쪽)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화가 랄프의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책을 읽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누군가 때문에 또는 무엇 ‹š문에 라는 이유를 달고서 포기하는 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현재요, 사람들의 현재가 아닐까?

욕망은,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예요.(209쪽)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상상한다는 것을. 상상마저 허락하지 않는 삶을 누가 강요했는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상상은 몽상이다. 상상은 실현되어질 수 있는 욕구의 극한점을 보여준다. 욕구에 충실한 삶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 욕구들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주부로서의 삶을 택한다. 창녀는 손가락질 받는다. 손가락질 받는다는 것은 혼자 동떨어져 있음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선다. 당당한 창녀 선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뭐, 그렇다고 문제될게 있겠는가마는..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엔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그러나 간혹 욕구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상상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상상의 나래는 꺽이지 않을 것임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는가! 때론 슬픈 주부가 아니라 아름다운 창녀이고 싶은게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자, 슬슬 모험을 떠나보자. 이 커다란 세상에 오직 나 하나와 마주쳐보자. 나의 상상을 향해서 길을 그려보자. 그 길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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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4-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삶을 주부와 창녀로 이분한 사람은 또한 남자가 아닐까요? 저도 이 책을 읽어봤지만 남자들의 삶은 그런 식의 이분법을 쓰지 않거든요. 그냥 남자일 뿐.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분화가 되지 못했는지만 느껴집니다. 현재의 이와 같은 이분법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성 스스로 이와 같은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살이 2005-04-2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는 성적인 개념에서 이 문장을 바라보진 않았는데, 그렇게도 보여지겠군요. 이분법은 그 경계의 명확한 구분을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만 여겨집니다. 꼭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세상에 어디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사고의 편의성을 위해 그런 과감한 간략화의 잘못을 저지르곤 하죠. 주부와 창녀는 그냥 안주와 모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걸 남자로 비유하자면 회사인과 백수, 아, 이건 어딘가 조금 모자란듯 하고, 글쎄 뭐가 좋을까요? 왕과 기사. 으~ 이것도 지금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보이고. 그러고 보니 남자라는 것이 여자를 모두 포함하는 그 무엇으로 지금껏 정의되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구, 쩝. 암튼 지안님의 속내를 잘 알아듣겠습니다.

클레어 2005-04-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시비를 거는 글은 아니었습니다만 혹시나 언짢으셨으면 지안이 삐딱한 탓이라 여겨주십시오..(흐흐~ 어물쩡 넘어가기..^^;;) 요즘 아이들 책(동화도 그렇고 만화도 그렇고..)을 많이 읽고 있는데, 소년만화 속에 보이는 '성장'이라는 화두를 살펴보자면 세상과의 투쟁, 관계 맺기가 남자주인공을 주체로 세우면서 이루어지는데 비해, 여자아이들의 만화의 경우에는 남자친구에게 여성으로 어필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더군요. 그 속내를 좀 더 짚어보자면 여성은 남성을 이용해서 세상을 돌파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난 남성들에게 어필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여자 아이들의 세상관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체득한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을 통해 얻게 되는 식으로 되더군요. 하루살이님께서 지적하신 주부와 창녀에 대한 개념은 그런면에서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주부'와 '창녀'...안주와 모험... 여성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그만큼 협소하다보니 '창녀'처럼 많은 남성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일수록 남성들로 많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얻게 되고 그와 같은 모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고 할 수 있겠고, '주부'의 경우는 한 남성에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다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한정되는데 비해 세상으로부터의 비난 등으로 부터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안전한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이 더 분화가 되고 남성들을 통해 뭔가를 얻는 대리만족 지향의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과 직접 소통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성장과정을 거친다면, '창녀'라는 이미지가 세상을 알아가기 위한 모험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주부'가 '편안한 안주'라는 이미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구요. 왜 하루살이님 서재에서 제가 이렇게나 긴 글을 쓰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루살이님이 좋아서 일겁니다. (또 놀러올께요..흐흐)

하루살이 2005-04-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짢기는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아아~ 언어라는 것의 한계성을 절감합니다. 흑흑. 주부와 창녀라기 보다는 가족과 일탈 이렇게 정의할게요. 그리고 님의 말씀에 백번 동감합니다. 아마도 만화가나 동화작가의 대부분이 남성인 탓도 있을 겁니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회의 밑거름은 어렸을적 교육부터 주어진다고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대우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여지네요. 장애우들이 일반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니... 성역할이나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포용력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습니다. 조기유학에 눈이 먼 현실이 안타까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