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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평점 :
텔레비젼 속에 비쳐지는 뼈만 남은 아이들. 상대적으로 커다란 눈동자는 너무 슬퍼보인다. 소말리아, 에티오피아를 비치는 카메라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과 그들을 안고 있는 앙상한 부모들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 화면은 동정과 함께, 도대체 왠 아이를 그렇게 많이 난 것이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또한 가난한 나라에 사는 불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왜 선진국의 원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기근이 들 수밖에 없는 환경탓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하다 문득, 결코 이런 배고픔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중남미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최근 부실 도시락 파동이 일어난것처럼, 우리나라에도 굶는 아이가 아직도 주위에 있고, 경제 대국 미국도 수백만의 아이들이 끼니를 걱정한다. 그러니 국가의 가난과 굶주림은 결코 상관관계가 있다고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책을 읽어가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아이들이 굶어죽는 바로 그 나라들이 식량 수출국이라는 것이다. 이러니 결코 식량이 부족해서 아이들이 굶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구가 포화상태인 것도 아니다. 인구가 최고로 증가하더라도 100억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하에서, 우리가 생산하고 있는 식량은 최대 120억에서 130억명을 먹여살릴수 있다고 하니, 결코 식량 자체만의 부족으로 기아가 생기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녹색혁명을 통해 식량생산을 증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전혀 그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된다. 녹색혁명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카길과 같은 종자회사, 비료공장, 식품가공과 유통을 맡은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한 혁명일 뿐이다. 생태적 농업의 생산량과 별 차이가 없으면서도 지력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망가뜨리며, 소농인들을 적자에 허덕이게 만드는 주범으로 존재할 뿐이다.
원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원조된 식량이 직접 배고픈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하더라도 선진국, 특히 미국의 남는 곡물인 밀과 옥수수가 주된 것이라, 가난한 이들의 자립을 돕기 보다는 입맛의 변화를 통해, 자국의 고유 곡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밀과 옥수수가 대체됨으로써 계속해서 수입을 강요하는 체제로 바뀌게 되버린다. 그리고 그 조작된 종자들을 수입하고 거기에 맞는 농약을 뿌려야하며, 가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도중에 소농인들은 부채만을 지게 된다.
그럼 환경탓으로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물론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곡물 수확량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대 농장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자국내 다양한 곡물들을 생태적 방법으로 키웠을땐 그 피해의 규모를 줄일 수 있으며, 그 생산된 곡물만으로도 전체 국민을 모두 먹여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왜 아이들을 그렇게 많이 낳았냐고 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식들은 생존의 방법이다. 자신들이 생산한 곡물의 반 이상을 소작료로 지불하거나, 땅을 잃고 도시로 쫓겨가야 하는 빈민들 입장에서 아이들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했을 때 그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굶주리는 생활이라면 한 아이라도 더 나아서 희망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키울수밖에 없는 것이 생존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인 것이다.
그럼 굶주림을 끝낼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곡물이 남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흘러가도록 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유 무역을 통해 시장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문도 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무역시장은 결코 소비자 전체의 이익에 맞춰 흘러가지 않는다. 곡물이나 과일 등은 대농장을 통해 수확되지만 이것을 수합, 가공, 판매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의 힘에 달려 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자신들의 회사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농산물의 생산을 조정하게 된다.
그러니 진정한 해결책은 분배의 과정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직까지 시장만큼 분배를 효율적으로 가져온 제도가 없었으니 시장 자체를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시장이 시장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반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통제권의 분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수에게 통제권이 주어지면 필요에 따라 움직여야 할 상품의 흐름이 소수통제권의 이익에 따라 움직여지게 된다. 통제권이 잘게 쪼개져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졌을 때만이 비로소 시장도 그 필요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굶주림의 해결은 식량생산 증대나 자유무역, 무상원조 라는 허깨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통제권의 분산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며, 정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굶주림은 먼 나라이야기고, 자신과는 다른 세상이야기 같지만, 점차 일자리가 줄어들고, 빈부격차가 극심해질 수록 우리의 아이들이 굶주릴 가능성은 보다 더 커질 수 있다. 바로 옆집의 아이가, 또는 우리들의 아이가 굶주림에 울부짖기 전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거짓된 신화에서 벗어나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책은 우리를 둘러싼 12가지 그릇된 신화의 장벽을 깨뜨리고, 세상의 참된 모습을 보도록 만들어주는 투명한 유리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