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그냥 할일없이(하릴없이?) 드러누워 TV 리모콘을 눌러댑니다. 어디에다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화면은 제 마음마냥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손을 놓은 것이 프라이드라는 격투기장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격투기는 보지않고 그냥 돌려버렸는데 오늘은 왠지 그냥 놓아두고 봅니다. 몸 속에 잠자고 있던 피가 들끓었던 탓이었을까요? 피가 터지는 그 장면들이 너무 재미있더군요. 시간 가는줄 모르고 계속 봅니다. 미들급의 최강자, 더 이상 같은 체급에서 상대가 없는 절대 강자가 헤비급과 맞붙습니다. 헤비급의 펀치는 그야말로 스쳐도 다운이더군요. 누워 있는 상대를 향해 발길질을 할 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맙니다. 다행히도 쓰러져있던 미들급 선수는 잽싸게 피했습니다. 만약에 그 발길질이 제대로 들어갔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격투기의 매력은 아무래도 한 순간의 장면 때문입니다. 아무리 핀치에 몰리더라도 딱 한방의 필살기가 적중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뒤바뀌어버립니다. 마치 야구의 9회 역전 만루포처럼 말이죠. 럭키펀치 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것은 정말 땀이 가져다 준 실력입니다. 상대방을 넉다운 시키는 펀치는 그야말로 찰나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찰나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만들어줍니다. 찰나를 위해 그 찰나를 연습합니다. 반복되는 찰나는 영원같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영원을 집어삼켜서야 찰나는 빛을 발합니다. 주먹이든 발이든 칼이든, 무예의 절정은 바로 그 찰나를 위해서입니다. (올림픽 때 문대성의 발차기도 바로 그 찰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찰나에 온 마음을 뺏긴다는 것입니다. 찰나가 발하는 빛에 눈이 멀것 같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말을 잃습니다. 이런 찰나는 무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테지요. 악기의 소리가, 물감의 색감이, 빛의 아름다움 등등이 모두 자신만의 어떤 찰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찰나를 위한 영원같은 반복. 사람들은 그 지겨움에 치를 떱니다. 치를 떠는 순간 찰나는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찰나를 잡는 것은 오직 시간뿐입니다. 저도 찰나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랄 그 찰나를 위해서, 영원을 가두어두렵니다. 치를 떠는 고통을 감내하고, 기필코 찰나를 얻고자 합니다. 부디 찬란히 빛날 찰나를...
사족 : 우리네 삶도 오직 한 찰나를 위해서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찰나란 죽음 직전에 맞는 그 순간일까요? 빛나는 찰나를 위해 우리는 죽음의 연습을 영겁의 시간동안 해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어떤 찰나가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