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흔히 어디어디가 결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절대 이런 말이 없다. 즉 몸에서 느끼는 통증이라는 것도 그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면 그 지각또한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그 결린다는 것을 말할 상대가 없다면 그 언어라는 것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가 결린다는 말을 들어주고 그 말에 대해 어떤 행동(가령 침을 놓는다거나)을 취해 주었을 때만이 결린다는 말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소설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소설 <포세시옹-소유라는 악마>는 언뜻 보기엔 추리소설로 보이지만 단순히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언어와 지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범죄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며, 개인적 심리상태와 행동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앞에서 말한 언어가 지각을 유도하고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경청하는 사람의 자세에는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몇 대목을 살펴보자.

언어를 자극하는 것은 지각이 아닙니다. 그 반대예요. 언어가 지각을 유도하는 것이지요.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육체에 앞선다는 것을 인정할 용의는 있었다.
말이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말은 경청하는 사람의 사랑에서 생성된다.

이런 소설의 메시지는 이야기의 전체 구도속에서도 드러난다. 목을 잘린 시체가 발견되고 사건은 미궁에 빠져있다. 화자인 기자이자 사립탐정은 점차 범인의 폭을 좁혀 나가고 결국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범죄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게된다. 이 범인은 바로 죽은 여자의 아이를 자신의 사랑으로 키우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가정교사였다. 언어능력을 갖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를 어머니는 애정을 갖지 못하고 더군다나 아이를 미워하는 새로운 남자에게만 정신을 쏟고 있자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어렸을 적 사랑하던 동생을 잃고나서 말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 그녀는 그 아이를 통해 동생을 찾게되고 그녀의 이런 사랑은 아이에게 말(언어)을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도 많은 소설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속의 사랑은 대부분 개인적 감정 상태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도 장밋빛이거나 그 장미속의 가시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반면 포세시옹은 사랑이라는 소유욕이 가지고 있는 악마적 성격과 함께 그것이 가져다 주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관계속에서만(이것은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관계로 보아도 된다.) 이루어진다는 것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사랑이야기를 선사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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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bee 2006-09-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인밝히기는 스포일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