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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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학교를 운영하고 책임져야 할 교장, 교감 선생님이나 행정가들이 보면 참 싫어라할 책이다. 실제로 조한혜정 교수는 책의 후반부 즈음에 교장, 교감들과 토론회(?) 비스므리하게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학교 현장에 와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느냐, 현직 교사도 아니지 않느냐 는 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싫은 소리는 이런 식으로 적절한 발언을 할 적임자가 아니라는 핑계를 삼아 잘못되었다, 고 인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전에 강준만이 문학권력을 비판했을 때 누군가가 강준만을 향해 문학인도 아니면서 어쩌구 했던 발언이 생각난다.

  조한혜정은 교장, 교감, 행정가들이 싫어할 만큼 '親 학생'적인 입장을 취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조한혜정이 학교는 전반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보다는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자신만의 꿈을 일찌감치 찾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매년 기술,가정 교과, 도덕 교과 등을 통해 진로선택과 자아찾기에 몰두하도록 가르치면서, 정작 자아를 일찌감치 찾은 아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자기를 찾아가는 길을 막는건 모순이다. 

  아마도 그 분이 그 분이 맞는거 같은데, 최근 시사IN에 칼럼을 쓰는, 이쁘장한 젊은, 하지만 표정은 시니컬하면서 생뚱맞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김현진씨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분과 조한혜정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글까지 고스란히 책 안에 실려있다. 김현진씨는 자퇴 전 시절 학교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교장샘의 양해를 받아 몇분 가량의 영상을 담아내려 했던거 같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제제를 당했고, 이후 사상이 의심되는 학생이니 가까이 하지 말 것, 불순분자 등의 빨간딱지를 얻어맞은 듯 하다. 결국 그는 자퇴했고, 센터에서 자신의 꿈을 키웠으며, 한국종합예술대학 영상원을 통해 재능을 살리고 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내세우는 학교의 이념이나 교훈, 교육 목표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어느 학교고 창의성을 강조하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정작 교육 현실을 보고 있자면 '창의성'은 어느별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혹시 작년엔가 열 두 행성에서 제외하기로 했다던 그것 대신에 새로 집어넣은 또다른 행성? 창의성은 '생각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맨날 창의성 강조하면서 영재교육 시키고 경시대회 문제 같은거 주고 풀라고 해봐야 창의성에 전혀 도움 안 된다. 생각하는 개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개 학교는 생각하는 개인과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자 하는 개인을 '허가'하지 않고 있으니 교육 목표와 현실이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다.

  김현진씨는 결국 그리하여 학교를 나와 자신의 생각과 재능과 창의성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영화는 어찌되었는지 아직 알 수 없다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토대로 책도 냈고, 가장 많이 팔린다는 시사주간지에도 이름과 얼굴을 내밀고 글을 내보내고 있다. 그를 특별하게 보고 싶진 않다. 그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그가 자퇴한 시절부터 진절머리나게 받아봤을 것이고, 단지 자퇴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중조명을 받는건 그저 스포츠 신문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그런 화려한 관심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조한혜정 교수의 글이지만 마치 나는 조한혜정의 글을 통해 김현진씨를 만난 느낌이다. 아마도 그건 조한혜정 교수가 드는 예의 상당 부분이 김현진씨의 것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중간에 들어있는 꽤나 긴 편지글이 내 머리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곳곳에는 김현진씨의 사례 말고도 그 시절에 방황한 나의 경험들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단지 결단력이 약했고, 용기가 없었으며, 스스로에 대해 확신에 차지도 못했기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 3년을 버텨 냈던 것이다. 나는 언제고 하나의 개인으로 봐주길 원했다.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그랬다. 한 학교의 학생이 아니라, 어른 이전 단계의 청소년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이고 싶었다. 자유를 갈구하고, 내 생각을 펼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고픈 그런 한 명의 개인이고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년은 내게 그걸 허락치 않았고 고민했으며 떠돌았다.

  아버지는 없는 돈에 학원을 보내주셨고, 과외도 시켜줬으며, 책이 필요하다면 언제고 넉넉히 책값을 건네주셨다. 어머니는 몸에 좋다는 각종 과일을 깎아 내 책상에 대령해주셨고, 아침에는 쥬스까지 손수 만들어 속을 든든히 채워주셨다. 그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걸 두 분은 모르셨다. 두 분의 고마운 행동은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다, 는데 촛점이 맞추어졌을 뿐 나란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맞춰져있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적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는 주위에서 온갖 관심을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들 사이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관심과 배려는 언제나 성적에 비례했다. 그걸 몸으로 확실히 느꼈다.

  "경제주의 사회에서 부모 자식 관계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 왔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돈을 버느라 바빴던 부모들은 부모 노릇을 자녀의 학비를 대고 피아노를 사주고 생일 파티를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능력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게 자금을 대는 능력에 비례하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계속 부모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한다. 충분히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과 충분히 돈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존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한다. 자녀들은 지금까지 "공부만 잘해 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부모를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지금 그 공부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속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마음 깊이 원망과 적개심을 품고 있다."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그것들을 지금의 청소년들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다수는 경험하면서도 모르고 있다. 먼 훗날 그들은 지금을 기억하며 부모님을 원망할지도, 선생님을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갈수도 있다. "공부만 잘해 달라"는 암묵적인 요구는 자신을 잊게 만든다. 그들이 원하는건 '공부 잘하는 누구'이지 그냥 '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나는 무척이나 괴로웠다. 하지만 당시의 내 나이 또래의 지금의 아이들 역시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을 잊게 만들고 있다. 분명 교과서는 자신을 찾으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언제나 바른 말만 하므로.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우리는 인류대 합격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절대 정숙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모의 수능 점수 향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학습의 지표로 삼는다. 적당한 학습지와 믿을 만한 과외로 사탐과 과탐을 외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어문계열 지망의 꿈을 계발하고 우리의 방학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밤샘의 힘과 침묵의 정신을 기른다. 자기 반의 이익을 앞세우며 위선과 이유 없는 반항을 묵인하고 불신과 비난이 어색하지 않는 사제 관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감대 없고 타성에 젖은 수업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내신과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학교가 발전하며 학교의 융성이 곧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육성회비와 등록금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학교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배후로서의 학부모 정신을 드높인다. '반A고'(경쟁하는 학교 이름) 정신에 투철한 '愛석차 愛통계'가 우리의 삶의 길이며 대명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배에 물려줄 영광된 고합격률 대명의 앞날을 내다보며, 이기심과 욕심을 지닌 근면한 학생으로서, 전교생의 '죽어지낸 3년을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합격률을 창조하자."

(3학년 7반 허은영이 1996년 국민교육헌장을 풍자해 쓴 글)

  1996년에 이런게 있었는줄도 몰랐다. 그런데 찬찬히 읽다보면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2016년에는 뭔가 좀 달라져있길 바란다면 그건 공상(空想)에 불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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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가 바뀌는게 먼저일까요? 사회가 바뀌는게 먼저일까요? 때로는 이런 논의들이 갑갑합니다. 사회는 점점 천민자본주의의 강도가 심해지고 학벌간 격차가 점점 커지는데 교육만 보고 변해라 변해라 합니다. 한쪽에서는 좀 더 경쟁을 심화시키라 하고 한쪽에서는 경쟁이 아닌 공생의 교육을 하라 합니다. 여기서 어느쪽이 옳으냐는 분명하겠지요. 하지만 사회는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서 학교는 왼쪽으로 가야한다는 당위성. - 여기서 수많은 현실적인 갈등들이 나오잖아요.

마늘빵 2008-01-14 21:43   좋아요 0 | URL
그쵸. 사회는 '경쟁'할 것을 종용하고 있고, 학교에서는 공생의 교육을 해야한다고 하고. 학교에 '경쟁'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시작하면,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라고 불러야할 것 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현실은 거기까지 와 있죠.
 
위기의 학교 -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닉 데이비스 지음, 이병곤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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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영국인이었다면, 혹은 영국 언저리에 위치한 비슷한 교육 체제를 가진 또다른 국가의 국민이었다면, 이 책은 더욱 절실하게 피부에 와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국적과 내가 살고 있는 위치는,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기에 극찬을 받은 닉 데이비스의 '가디언'지 연재 기사는 기대한만큼 깊숙히 들어서진 않는다. 흔히 실패한 교육의 예를 찾을 때 영국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대신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학교>는 닉 데이비스가 영국의 가디언지에 18개월 동안 연재했던 학교 현장 보고서를 묶어 낸 결과물이다. 그는 기사로 인해 2000년에 '올해의 기자상'을 수상했고, 탐사보도 언론인을 위해 제정된 '마사 겔혼 상'의 첫번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 현장 보고서'라는 이름답게 각각의 연재 기사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석적이다. 영국 정부의 전반적인 교육 정책과 교육부 장관의 정치성이 현장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적나라하게 까발겨주었다.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부제는, 영국의 교육이 '이미 실패했음'을 전제하고 있고, 이 책은 전제를 뒷받침해주는 온갖 근거들로 가득차 있다. 특정 지역, 특정 인종, 특정 학교에 예산을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특정 지역과 특정 인종과 특정 학교는 뛰어난 교육적 효과와 높은 통계 수치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와 비교되는 다른 특정 지역과 특정 인종과 특정 학교에서는 '교육'을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에게 학교는 단지 또래 아이들이 머물다 가는 청소년 집단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 책에 묘사된 상황을 상상해보면 영국 교육 현장의 모습은 한국의 현실보다 훨씬 심각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과 더불어 한국의 현실 또한 이대로 간다면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책에 묘사된 그 상황 그대로 눈 앞에서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현실과 지금 한국의 현실은 단지 '강도의 차이'일 뿐으로 보여진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사건들은 매우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현장에 1년 동안 머문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눈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다. 뉴스화될 만큼 큰 사건들은 어쩌다 가끔 일어나지만, 10년 전이라면 기사화될 만한 사건들도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져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 일들이 허다하다. 문제의 원인을 특정한 누군가에게 돌리기는 어렵다. 하나의 사건엔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삐삐선생을 바쁘게 만드는 사건들이나 우리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가정에서의 부모의 교육과, 자질이 의심되는 교사와, 나날이 과격해지는 아이들과, 정부의 교육 정책, 입시 정책들이 모두 한데 엮여 있다. 마땅히 누군가의 책임으로만 돌려버리기에도, 그렇다고 사건 당사자에게 죄가 없다고 보기도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닉 데이비스는 교육의 위기를 그중에서 정부의 정책에 촛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정부의 정책은 대개 돈 문제이고, 예산이 어떻게 책정되고 분배됐느냐에 따라서 학교 현장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현실과 곧바로 대응하여 살펴볼 수는 없지만 영국의 실패한 교육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는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닉 데이비스는 연재 기사의 후반부에 영국의 교육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네덜란드의 사례를 통해 슬며시 제시해주었다. 수입이 적은 가정에 교육 예산을 더 분배하고, 국외이민자 가정과 부랑자, 소수 인종에 특별한 배려를 하는 그들의 교육 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언급한다.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보다는 직업 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세 배 이상의 예산이 책정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동시에 네덜란드 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동시에 한국에서 실업계 학교, 실업계 학생들이 받는 시선과 대우는 어떠한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우파들은 필요에 따른 재정 지원 방식을 혐오한다. 그런 정책은 한 개인의 학업 실패를 공적 자금으로 보상하는 것이며, 나아가 공부를 잘하는 중산층 아이들에게 쏟아 부어야 할 돈을 가난한 아이들에게 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협상을 통해 그런 정치적인 격랑을 헤쳐 왔고, 이제 교육 소외가 세대를 거듭하며 세습되는 현상을 극복했다는 실질적인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네덜란드 교육부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부모의 교육 수준이 낮아 기본 단위의 1.25배의 재정을 지원받은 수혜 대상자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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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8-01-29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전 요즘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큰아이 대학입시가 어떻게 바뀔지 걱정이 앞섭니다.

마늘빵 2008-01-29 15: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새 리뷰 별로 쓴 것도 없는데 요렇게 또 뽑아주시니. 대학입시는 정말 종 잡을수가 없습니다. 논술이 막 중요해지다가 하루만에 폭삭 내려앉기도 하고. -_-

네꼬 2008-01-29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췟 아프님은 툭하면 당선이야. (투덜투덜)

^^

축하해요. 맥주를 쏘시오. (응? 무슨 결론?)

마늘빵 2008-01-29 15:40   좋아요 0 | URL
저기 그게... 나보다는 멜기세덱님이 더 자주 된다는. <프레임 전쟁> 이후로 처음인거 같은데. 얼마전엔 리뷰대회 1등을 ( '') 근데 전제로부터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으므로 무효.

멜기세덱 2008-01-30 01:58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전 피해자에요. 그것때문에 덜 뽑히는게 아닐런지...ㅋㅋㅋㅋㅋ

근데, 네꼬님은 아프님한테만 쏘라고 하시넹....흠칫 편애!!!

마늘빵 2008-01-30 10:01   좋아요 0 | URL
멜기세덱님 좋아요 그럼 쏘세요. ^^ (아싸)

이매지 2008-01-2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는데
요새는 무슨 백년은 커녕 일 년 앞도 내다보기 힘든 -_-
아프님~ 함께 마이리뷰 나눠먹어서 더 기뻐요 ㅎㅎ

해적오리 2008-01-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사고용량 2메가 짜리 대통령(이거 인신공격인가???) 땜에 요즘 하루에 한번씩 발끈한다죠...

순오기 2008-01-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우리 나라도 5년 후엔 많은 차이가 생겨나겠죠? ㅠㅠ

마노아 2008-01-30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당선된 것을 아까 몰랐어요. 알았다면 축하 멘트를 날렸을 텐데 말이죠.
오랜만에 또 보아서 반가웠어요. 근데 얘기는 생각보다 많이 못했네요. 다음엔 좀 일찍 보자구용^^;;; 리뷰 당선 축하해요~

마늘빵 2008-01-3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 그러게요. 우리나라는 맘대로 고쳐먹는데요 머. 고생은 애들이 다 하고. 매지님 축하해요. 올해 들어 처음 당선. :)

해적없다님 / 감사합니다. 저도 발끈발끈합니다. -_- 어휴 어쩜 그렇게 발끈할 꺼리를 많이도 내놓는지. 일일히 챙겨서 확인하기도 힘들 지경.

순오기님 / 감사합니다. 더 나빠지겠죠? -_- 벌써 싹이 보이는데

마노아님 / 그러게요 마노아님 일찍 가시는 바람에... 저도 새벽에 택시타고 왔어요 졸면서. 아니 자면서. -_-a 김상봉 샘, 서경식 샘 너무 좋아요.

구름의무게 2008-01-31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축하드려요! ^^

마늘빵 2008-01-3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의 무게님, 정아무개님 /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아무개님은 지금 미쿡인가요? 얼마전에 그렇게 본거 같은데.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그 내용이 일단 심각하고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며, 내용을 감싸고 있는 외형 또한 투박하고 딱딱하다. 그래서 친숙하지 않고 낱말과 문장은 마음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 전형적인 학문을 하는 철학자의 글쓰기이고, 대중을 고려하지 않는 학자적 글쓰기의 표본이다. 일반적인 '철학과현실사'의 책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고 보면 되겠다. '관용'을 알기 위해서 참고할 만한 책은 국내에 몇 권 있다. 일단 이 책 <관용과 열린 사회>가 있고, 하승우씨가 쓴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 반 룬의 <관용>,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대략 참고하면 되겠다. 이 책들 중 특히나 이 책은 더욱 투박하다. 쉽게 읽히는 책을 원한다면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하승우씨의 책을 권한다. 물론 내용은 모두 각기 다르다.

  김용환은 머릿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불관용의 만연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동일하게 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김용환은 우리 사회는 아직 불관용이 만연하고 있고, 이러한 불관용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분명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머리로 구분할 줄 안다.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불관용을 해소하고 관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해주고, 머리로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언제나 머리보다는 가슴이 뒤늦다. 앎은 이해로 이뤄지지만, 실천은 '감''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인가보다. 

  <관용과 열린 사회>는 불관용의 사회를 살고 있는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관용적으로 탄생하기 위한,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책이다. 두껍지는 않지만 범위는 방대하고, 깊이는 깊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를 통해서 관용의 개념과 의미를 명확히 하고, 왜 관용이 문제가 되는가,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탐구한다. 3장에서는 관용이 처음 제기되던 중세유럽으로 넘어가 '종교적 관용'을 살펴보고, 당시 관용을 외쳤던 홉스나, 로크, 흄 등을 통해서 관용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알아본다. 이후 4장에서는 '다원주의 사회와 관용'을 연결지으며, 결국 우리가 다른 삶,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나머지 5,6,7장은 한국 사회에서의 관용이 요청되는 영역과 관용적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 에 대해 '교육'을 통해서 해결방안을 내놓는다.

  우리는 보통 '관용'이라는 우리말 뒤에 '베풀다'라는 동사를 붙여, "관용을 베푼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관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관용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베푼다'라는 말은, "소수의 지배 집단 또는 권력의 소유자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관용을 이해하는 데 있다." 주인이 종에 대해, 높으신 '분'이 낮은 '것'에 대해, 던져주는 아량으로 해석하는데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오히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관용하는 사람과 관용되는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관용은 자유를 확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자유없이는 또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어떤 혜택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향해서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에 가깝다.

  관용을 영어로 표기하면 톨러레이션(Toleration) 또는 톨러런스(Tolerance)로 표현할 수 있는데, 관용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이 둘을 굳이 구분하지는 않지만 - 유네스코에서는 톨러런스로 통일해 사용한다 -, 프레스톤 킹은 이 둘을 나눠서 설명한다. 그는 톨러레이션을 톨러런스보다 넓은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전자를 힘에 의한 묵인과 인내로, 후자를 자신과 상충되는 입장을 거부할 능력이 있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힘으로 관철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대상에 대한 반대를 거부의 행위로 표출하지 않고 수용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프레스톤 킹에 있어 '톨러런스'는 힘 있는 강자가 힘 없는 약자에 대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반대의사를 행사하지 않고 상대를 수용함을 의미한다. 프레스톤 킹의 이러한 정의방식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둘 모두 같게 보아도 상관이 없다.

  김용환은 관용을 정의함에 있어 상대방의 견해를 '용납'함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를 프레스톤 킹이 말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일반화해서 넓은 의미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김용환은 이렇게 명확히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은 '용납'이라는 개념이, '복종'이나 '강제적 시인', '묵인'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관용의 유사한 개념으로부터 관용을 구별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용납한다는 말 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그 반대표현을 중지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조건은 내가 상대를 반대한다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그 반대표현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용은 '반대'와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

  김용환은 이 책 전체에 걸쳐 관용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개인적 차원이거나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관용의 정신이 확대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며 관용이 의사 결정의 한 기준이 되고 또 사회 정책의 한 태도가 되기 위해서는 비판과 논증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고 합리적인 논증이 자신의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용이 크고 작은 일상과 사회 전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갈등을 해소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여러가지 수반 조건들이 있을테지만 나는 그 중 관용을 제일로 생각한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서로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이미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다른 것을 다르게 바라보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 관용이고, 관용은 곧 합리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된다. 오로지 "합리적인 논증이 자신의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공중 앞에서 표현하기 위해선느 자신의 견해가 합리적인가를 먼저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발견했다. 롤즈가 말하는 '중첩적 합의'와 '공적 이성'이 바로 '개인적인 견해'를 '합리적 논증'으로 바꿔주고 검증해줄 수 있는 장치라고 본다.

   우리가 관용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 한계가 무엇인가,이다. 김용환은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관용의 역설이라는 논리적 한계요, 또 하나는 자기부정의 어려움인 실천적 한계이다. 우리는 분명 머리로는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이런 경우 머리와 마음이 서로 따로 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관용의 역설'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생기는 의문점 하나. 나는 관용적이지 못해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관용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용적이지 못해서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그런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까지 관용을 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는 관용적 자세를 스스로 저버렸으므로 타인을 관용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까지 관용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한계는 앞서 언급한 '자기 부정의 어려움'인데, 이는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행위자의 선택과 결정에 달린 문제이지 원칙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결국 관용을 행하는 것은 행위하는 주체에 달려있고, 그의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실천적 한계'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관용을 행함에 있어 실천한 한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이익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이익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불관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때 '이익'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처해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이익'안에 고려해 넣어야 할 것이다.

  일단 관용을 행사하려면, 관용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칼 포퍼는 '오류가능성 논변'을 통해서 자기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절대 무오류성'을 깨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관용을 통해서 어떤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포퍼가 말하는 진리 또한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게다. 포퍼는 제 1원칙 "내가 틀릴 수 있고 니가 옳을 수 있다." 제 2원칙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 제 3원칙 "만약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는 진리에 도달하는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한 관용에 도달하기 위한 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그럼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김용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부정을 불가능한 요구라고 믿으면 관용의 범위는 점점 좁아질 뿐만 아니라 불관용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다시 말해 이기적인 인간에게 자기 부정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라고 보는 것은 결국 관용을 공리적이거나 실용적인 가치로 정당화하는 정도에 그치도록 만들며, 이런 경우 관용의 한계는 지극히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 관용의 한계는 처음부터 이미 그 개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한계이며, 문제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야 비로소 그 한계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관용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그것이 갈등을 해소하는 사회의 기본적 자세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알고 정확히 인식하는데서 비로소 민주시민의 기본적 자세로 자리매김한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용은 필수적이며, 그것은 사회가 지향해야할 가치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전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관용은 자기부정을 전제로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개인이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져야만 비로소 그 사회는 관용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 관용은 구성원들 개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 합리적인 의견이 자유롭게 교환되는 사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절실하다.

p.s.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서로의 모든 의견을 '다름'안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광장에 나와있는 많은 견해들엔 '다른 것' 뿐 아니라 '틀린 것'도 속해있다. 우리는 그것들 중 틀린 것을 골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해서 다르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틀린 것을 솎아내는 방법은 그것이 과연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를 스스로 생각해봄으로써 걸러내고, 이후에 그것이 과연 나의 이익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견해가 아니라 모두에게 수용가능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나아가 합당한 견해인가를 검증해야 할 것이다.

p.s. 2.

관용에 대한 더 깊이있는 논의를 원한다면 김용환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는 관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미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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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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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라는 선동적인 메세지는 이 책의 내용과 저자의 메세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인생의 초반부터 삶을 포기한 듯한 무기력한 20대들에게 힘을 준다. 자발적으로 연대해 문제제기하지 못하는 20대들을, 행동하지 못하는 20대들을, 뒤에서 퍽퍽 밀어붙여 올라가게 도와준다. 절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그마한 희망을 안겨줬지만, 그나마 남은 조그만 희망을 키우는건 그들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매달 88만원보단 많이 벌었지만, 아마 일년동안 번 돈을 평균내면 88만원을 약간 초과할 것이다. 동시에 나는 20대이고, 비정규직이었다. 지금은 백수다. 고학력 백수. '그 누구보다'라고 말할 만큼은 아니지만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었고,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뻑뻑한 일상인지를 알고 있다. 내가 경험한 비정규직은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다른 비정규직 20대들의 일상은 나보다 심하면 심했지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려 책을 읽지 않은 이들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한번쯤 접해봤을 즈음, 주변에 있는 공업고졸, 전문대졸 학력의 두 살 어린 직장인에게 '88만원 세대'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아이 曰 "에이 그건, 다 20대가 게을러서 그렇지, 예전에는 막노동도 뛰고 이 일 저 일 닥치는대로 다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20대들은 그렇게 안하잖아. 다 찾으면 일은 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받는 금액이 딱 88만원 맞긴 한데, 이건 너무 오버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지금의 20대들은 예전보다 눈이 높아졌고, 막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돈과 시간을 좀 더 쏟아서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직장에 안착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주변에 보여지는 작은 모습들을 묘사한 것이고,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봤을 때 '괜찮은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건 확실하다.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고를 떠나서 모든 일반 기업체와 대형 마트들, 그리고 심지어는 대학과 중고등학교에까지 비정규직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현격히 늘어나고 있고, 이 시스템은 '당분간'이 아닌 '지속적'으로 저렴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 싸게 부려먹는 셈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피 터지게 싸우는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프랜차이즈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얼마전 대학로를 갔다왔는데 딱 하나 있던 그 영화관이 - 비싸서 잘 안가긴 했지만 - 씨지비로 바뀌어있더라.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관이고 슈퍼마켓이고 커피전문점이고 모든 것이 싹 다 거대자본에 의해 싹쓸이 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타벅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스타벅스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20대들은 취업을 할래도 해봐야 비정규직이고, 취업 말고 장사를 하려고 해도 망할게 뻔히 보이니 갈 곳이 없다. 20대에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무리가 있지만, 20대가 돈을 모아 장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자본의 침투를 저지해야 한다.

  내가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건 내 문제는 아닌데 뭐, 하는 식의 사고방식, 그래도 스타벅스가 맛있는걸 어떡해, 라며 '88만원 세대 이론'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스타벅스와 커피빈 등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그 영향이 나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인데, 당장은 내게 피해가 없을지 몰라도 결국 나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어있다. 우석훈 씨는 이 책에서 20대의 일부분 약 5% 정도는, 소위 말하는 학벌을 갖추고 좋은 직장에 안정적으로 취업하여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딴세상 이야기로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지금의 386세대들은 당시 민주화 투쟁에 열을 올리며 오늘날의 그나마 민주적인 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했지만, 없는 학벌에 낮은 학점이어도 취업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직장을 골라 잡아 갈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그들은 대접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의 20대들이 자신들이 완성한 민주화의 틀을 깨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따라서 20대들에게 호의적이지 못하다. 4,50대들은 어떤가 하면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쉽게 취업했고, 지금은 각 기업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양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의 20대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윗 세대들의 배려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래서 우석훈씨는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고 일어나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 비정규직을 갖게 될, 혹은 비정규직에 있는, 혹은 그나마도 못한 젊은 실업자들은, 연대해야 한다. 적어도 같은 처지에 있는 20대가 20대를 배반하는 상황을 연출해선 안 된다. 지금 우리는 비정규직이고 실업자일지 모르지만 함께 뭉치면 살 수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있는 5%의 다른 20대들을 제외한 나머지 95%의 20대들이 그나마 남은 괜찮은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발버둥치는건 깊은 구덩이 속에서 서로 나오겠다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과 같다.

  연대, 연대 외치지만 사실상 연대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다. 기껏해야 거대자본에 저항하면서 소극적인 실천을 할 수 밖에 없다. 거대 자본에 그게 먹히느냐 하면 모든 20대들이 연대해 거부한다면 몰라도, 소수만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20대의 주머니를 털기 위한 어떤 기업의 상품을 이들이 연대해서 사주지 않으면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닌 소수라면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우석훈씨는 강연회에서 자신이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일부러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그런 상황에 처한 20대들이 연대해서 머리싸매고 해결해야 할 숙제이지 누군가가 어떻게 하라고 지시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했다. 

  중요한건 연대다. 같은 처지에 있는 20대들이 뭉쳐서 -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라도 -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해야 한다. 거대 자본에, 또 앞선 세대들에 대해서 자신의 몫을 찾아와야한다. 매우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20대의 모습이지만 깨고 나가야 한다. 더불어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양심있는 윗 세대들이 그들이 가진 자본과 권력을 (내놓으면 더 좋겠지만) 가지고 최소한 20대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

 
p.s.

  지금까지 홍세화를 비롯하여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20대들이 책도 안 읽고 생각 없이 산다고 비판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결과적으론 그들의 말이 맞다. 책도 안 읽고 오로지 생각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에서 비롯된 재테크, 혹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토플 토익 공부, 자격득 취득에만 몰입해있다. 돈 좀 있는 집 아이들은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 공부에만 올인한다. 돈 없는 집 아이는 그나마 매달려봐서 안 되면 일찌감치 때려쳐야한다. 시기를 놓쳐 백수가 되지 않도록.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이제 절반만 맞다. 이들은 이들이 처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들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 아씨 상황이 그런걸 어떡해. 너 같으면 먹고 살 길 막막한데 고상하게 헤겔의 <정신현상학> 들고 앉아있겠냐 머리아프게. 대선을 앞둔 시점에 수능점수 상위권 학교 몇몇을 설문조사한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이 제일 높다고 한다. '이해'는 된다. 경제와 효율을 앞세우는 이명박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머물 자리 하나라도 더 나오길 기대하는 듯 하다. 다 말아먹은 이명박이 정말 경제 대통령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과 지적을 토대로 그들이 스스로를 무조건 감싸고 돌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는 의식보다는 현실이 이러니 뚫고 나가자, 는 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과 지적을 핑계로 그들이 재테크와 토익책에 더 몰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너희들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함께' 살아나갈 길을 제시해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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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20대 취업 난의 책임은 지난 10년간 국정을 펼쳤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있습니다.


마늘빵 2007-12-1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어느 특정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는건 '정치적'인 견해일 뿐이라 봅니다.

살청님 / 현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눈을 뜨면 현실인걸요. -_-

미즈행복 2007-12-1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하기 전부터 연대에 대한 희망이 없는것 같아요. 연대해서 이겨본 경험이 없고, 그런걸 본 적도 없으니까요. 연대하다가 망하느니 차라리 혼자 앞가림하자는 것 같아 보이는데...
모두가 너무 경제적인 것에 올인하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경제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지만, 예전보다 더욱 경제적인 것에만 다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돈 이외에도 많은데 그건 보지 않고 돈만 보고 있는것 같아요. 전에 누군가와 얘기하다가 '안빈낙도' 를 얘기했더니 제 3자가 옆에 있다가 코웃음을 치더라고요. 돈이 좀 없어도,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아도, 집이 좀 좁아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게 더욱 문제가 아닐까요? 피천득씨 수필에도 보면 그런 얘기가 있어요. 집이 좁아서 팔고 옮기려고 했더니 가진 돈과 맞지 않아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괜히 이런 일 벌였다고 후회하는 얘기요. 자유를 팔아버렸다고요. -결국 집값의 반은 오랜기간에 걸쳐 상환하는 조건으로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고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늘빵 2007-12-11 10:12   좋아요 0 | URL
그쵸. 경험이 없다는게 가장 큰 장벽이에요. 그러니까 다들 꺼려하는 것이고, 해봐야 뭐 되겠어, 라고 생각하는거겠죠. 지금 시대에 안빈낙도는 정말 속세에 미련이 없는 혹은 도통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안빈낙도도 돈 많은 사람들의 특권이 되어버린거 같은...
 
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
이철호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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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서검색창에서  '메이데이'라고 쓰고 클릭하면 대략 출판사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책 뿐 아니라 읽은 책 중에서도 메이데이 에서 나온 책은 이 책이 유일한 것 같은데, 이렇게 출판사명을 가지고 궁시렁 거리고 있는 건 별다른 딴지를 걸려는게 아니고, 책장을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는 말을 하고파서다. 대략 교육 문제에 관한 여러 주제들에 관해 평소 관심을 갖고 신문이나 뉴스를 꼼꼼히 챙기신 분들에겐 이 책이 필요없다. 진보성향의 단체 소속의 개인에 의해 한 꼭지씩 쓰여져 엮인 대한민국 교육 비판서이기 때문에 여기 담겨있는 주의주장들은 평소 언론에서 대립구조를 이루는 한쪽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가지 걸고 넘어지면 나는 전교조에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평소 사회에 관한 내 생각들을 따라가면 전교조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전교조와 또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교총이 맘에 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교총은 전교조보다 조금 더 싫다. 전교조는 단지 그보다 아주 조금 덜 싫을 뿐. 아무래도 하나의 '단체' 안에 여러 다양한 의견을 가진 분들이 모이다보니 내부에 진통이 지속되기도 하는데, 그리하여 나오는 주의주장이나 결론은 그다지 동의해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교육 현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비정규직 교원에 대한 태도나 학생을 대하는 태도도 전교조에 소속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전교조는 이래야 한다, 라고 감당 못할 기대감을 떠안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한국 교육이 제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학교 교육이 평등하고 중립적이다, 라는 세간의 시선은 왜곡된 것이라고 시작하며,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이 번성하는 것인가, 대학입시제도를 고치면 교육문제가 해결되는가, 교원을 평가하면 교육의 질이 높아지는가, 간판이 품질을 보장하는가, 등등의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각각의 글은 여러 사람들이 하나씩 도맡아 작성했다. 필자에 이름 올린 이들은 홍세화씨를 비롯 참교육연구소 소장 이철호, 민노당 정책연구원 송경원, 대안교육연대 사무국장 이치열, 진보교육연구소 사무차장 박유리 등 단체의 이름을 걸고 나온 이들과 교육 현장에 있는 중고등학교 교사들이다.

  머릿글에서 이철호 저자 대표는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학생들이 현 교육제도 아래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은 영어와 컴퓨터에 능숙한 젊은이들을 많이 육성해낼 수 있을지 모르나, 창조적 지식, 높은 수준의 과학적 지식, 문화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을 양성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 의식에 동의한다.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는 평준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이다. 사회에서, 기업에서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국가의 공교육에 떠맡기고, '大學'의 이름을 먹칠하면서 학원화시키고 있다.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은 용납되고, 마치 '경쟁'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양 부추기고 있는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빈부격차 벌어지듯 학력까지 벌어지고 있다. 잘하는 놈은 잘하는 놈들끼리 묶고, 못하는 놈은 못하는 놈들끼리 묶어서, 잘하는 놈들은 더 잘하게 만들고, 못하는 놈들은 더 못하게 만든다. 여기에 개입하는 게 '자본'이다. 건너들은 어떤 분의 말씀따라 강남에선 초등학생들이 카프카며 니체며 읽고 있고, 강북이나 지방에선 산수와 한글을 배우고 있다. 태어나면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에 따라 맞춤형 교육이 시작되고, 친구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타자가 되어간다.

  한국 교육은 결코 평등하지 못하다. 과거에 교육에 있어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했지만 이제 더 이상 기회의 평등은 껍데기만 남았다. 애초 시작이 다른 학생들을 놓고 기회의 평등을 논하고, 경쟁에서 진 아이에게 기회를 똑같이 줬는데 네가 졌으니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건 폭력이다. 이제 기회의 평등은 그 의미가 정정되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논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차별'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받으며 자란 아이의 문을 더 좁게 만듦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논해야 한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며 누린 혜택부터가 이미 역차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또다른 역차별을 막기 위해선 사사로이 가진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차이를 충분히 인위적으로 메꿔줘야 할 것이다.   

  한달 평균 50만원의 비용이 사교육에 지출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왜 사교육을 멈출 수 없을까. 안보내면 그만인데, 안보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왜? 학급의 친구들이, 같은 동네 영희, 쳘수도 다 그만큼의 사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불안해서 불안해서 안보낼 수가 없다. 내 아이만 뒤쳐질까봐. 똑같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만의 비용을 매달 지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그들 모두가 함께 멈추면 된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영희가 학원 가면 철수도 학원 가고 철수가 학원 가면 순이, 갑수, 말자 다 따라 간다. 그래야 보통이라도 유지를 하니까. 사실 시작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우수해지기 위해서, 더 앞서나가기 위해서였는데, 종국엔 모두가 평균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 다니고 있다. 비극이다.

  사교육 번성의 원인은 결코 공교육 부실에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생겨난다. 근데 모두가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하다보니 종국엔 사교육이 공교육보다 우선시 된다. 학교에서 우수해지기 위해서, 그래서 점수를 잘받고 내신을 다지고,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에 잘 가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면 결국은 대학이다. 그런데 그냥 대학이 아니라, 일류대학이다. 이미 고등학교 정원보다 대학 정원 수가 더 많고, 지방의 몇몇 대학들은 망할 위기에 처해있는 판에, 대학에 가려고 그 고생을 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하늘대학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늘대학 나와서 대접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공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어서.

  민노당 송경원 정책위원장은 이 책에서 이 짓을 멈추기 위해서 첫째, 일류대 거품을 빼자. 둘째, 60만 명의 희망자에 맞게 일류대 문을 더 열자. 더불어 국공립대통합네트워크를 만들자. 나라에 속한 국공립대만이라도 먼저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뽑고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학 이상은 평생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고3 마치고 들어가는 코스가 아니라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나 기업이 노동자의 평생교육을 위해 학습휴가제나 학습비 지원 등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멈추기 위해서는 공교육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저들이 경쟁을 멈출리는 없으므로 경쟁을 멈출 수 있게끔 문을 활짝 열어버리고 같이 뽑고 같이 교육시키는 마인드를 가진다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는 것이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하겠다는 합의만 있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왜 부모는 자식을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만들고 싶어할까.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럼 잘 사는게 뭔데? 특목고와 일류대학과 대기업이 잘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자. 돈 많이 벌고 풍족하게 살면 그걸로 충분할까. 왜 스스로의 몸만 살찌우려 하고 영혼을 돌보지 않는가. 결국 부모가 꿈꾸고, 아이들이 꿈꾸는 것은, '행복'이라 할 수 있을텐데, 정말 그것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걸까. 부모가 자식이고 교사고 기타 등등 동일한 공동체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미친 짓을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들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은 또 무엇이고, 또 무엇이고, 또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의 욕심에 의해서, 혹은 부모가 주입한, 사회가 주입한 대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건 아닐까, 를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공교육과 사교육의 문제, 평준화의 문제 뿐 아니라 교원평가, 학벌사회, 대학선발, 대안교육, 조기영어교육, 자립형사립고, 로스쿨, 구조조정 등에 대해서도 다룬다. 우리가 각각의 커다란 주제들을 살펴보며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복잡한 제도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하지만 이 책엔 그런 근본적 물음은 들어있지 않다. 그보다는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맥락에 대해, 또 그들이 가진 정치적 교리에 따라 각 주제를 살펴보고 있다. 틀렸다고 말하고픈 것이 아니다. 나는 대략 여기 쓰여져있는 주장에 대해 90%는 동의한다. 10%를 뺀 것은 근본적으로 더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미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탕에 두고서 작성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정치적 맥락을 치고서 시작했다면 더 좋은 생각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p.s. 진보교육연구소, 범국민교육연대, 참교육연구소 등이 전교조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모른다. 앞에서 전교조를 이야기한 것은, 느끼기에 전교조의 주의주장과 여기 거론된 단체들의 대표로 나온 이들의 주의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서이다. 사실상 관련 없는 단체들을 임의로 엮어 개인적 견해를 드러낸데서 오해가 빚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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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12-07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총은 전교조보다 조금 더 싫다. 전교조는 단지 그보다 아주 조금 더 싫을 뿐."
어느 쪽이 더 싫다는 겁니까 -_-;

마늘빵 2007-12-07 09:10   좋아요 0 | URL
-_- 흐음. 이래서 쓰고나면 한번은 읽어봐야해. 수정하겠습니다. 리을 하나의 차이가 크군요.

미즈행복 2007-12-0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기 전교조와 지금의 전교조는 차이가 많지요. 초기에는 정말 열혈분자(?)들의 집합이었으나 이제는 특별한 생각없이 가입해요. 세 늘리기죠. 전교조 사람들도 '교총보다는 낫지 않냐, 그냥 한달에 만원 회비 내는거 아깝지 않으면 좀 들어달라'고 말하면서 회원을 모집하니까요.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지면 순수한 열정은 희석되기 마련일테니까요.

마늘빵 2007-12-09 00:40   좋아요 0 | URL
큰 조직이다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죠. 그 안에서도 각기 다른 생각으로 갈등이 있을테고. 교총도 마찬가지겠죠. 조직이 커지면 어쩔 수 없나봐요. 그 안에서 자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