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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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학교를 운영하고 책임져야 할 교장, 교감 선생님이나 행정가들이 보면 참 싫어라할 책이다. 실제로 조한혜정 교수는 책의 후반부 즈음에 교장, 교감들과 토론회(?) 비스므리하게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학교 현장에 와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느냐, 현직 교사도 아니지 않느냐 는 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싫은 소리는 이런 식으로 적절한 발언을 할 적임자가 아니라는 핑계를 삼아 잘못되었다, 고 인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전에 강준만이 문학권력을 비판했을 때 누군가가 강준만을 향해 문학인도 아니면서 어쩌구 했던 발언이 생각난다.

  조한혜정은 교장, 교감, 행정가들이 싫어할 만큼 '親 학생'적인 입장을 취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조한혜정이 학교는 전반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보다는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자신만의 꿈을 일찌감치 찾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매년 기술,가정 교과, 도덕 교과 등을 통해 진로선택과 자아찾기에 몰두하도록 가르치면서, 정작 자아를 일찌감치 찾은 아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자기를 찾아가는 길을 막는건 모순이다. 

  아마도 그 분이 그 분이 맞는거 같은데, 최근 시사IN에 칼럼을 쓰는, 이쁘장한 젊은, 하지만 표정은 시니컬하면서 생뚱맞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김현진씨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분과 조한혜정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글까지 고스란히 책 안에 실려있다. 김현진씨는 자퇴 전 시절 학교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교장샘의 양해를 받아 몇분 가량의 영상을 담아내려 했던거 같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제제를 당했고, 이후 사상이 의심되는 학생이니 가까이 하지 말 것, 불순분자 등의 빨간딱지를 얻어맞은 듯 하다. 결국 그는 자퇴했고, 센터에서 자신의 꿈을 키웠으며, 한국종합예술대학 영상원을 통해 재능을 살리고 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내세우는 학교의 이념이나 교훈, 교육 목표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어느 학교고 창의성을 강조하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정작 교육 현실을 보고 있자면 '창의성'은 어느별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혹시 작년엔가 열 두 행성에서 제외하기로 했다던 그것 대신에 새로 집어넣은 또다른 행성? 창의성은 '생각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맨날 창의성 강조하면서 영재교육 시키고 경시대회 문제 같은거 주고 풀라고 해봐야 창의성에 전혀 도움 안 된다. 생각하는 개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개 학교는 생각하는 개인과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자 하는 개인을 '허가'하지 않고 있으니 교육 목표와 현실이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다.

  김현진씨는 결국 그리하여 학교를 나와 자신의 생각과 재능과 창의성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영화는 어찌되었는지 아직 알 수 없다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토대로 책도 냈고, 가장 많이 팔린다는 시사주간지에도 이름과 얼굴을 내밀고 글을 내보내고 있다. 그를 특별하게 보고 싶진 않다. 그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그가 자퇴한 시절부터 진절머리나게 받아봤을 것이고, 단지 자퇴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중조명을 받는건 그저 스포츠 신문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그런 화려한 관심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조한혜정 교수의 글이지만 마치 나는 조한혜정의 글을 통해 김현진씨를 만난 느낌이다. 아마도 그건 조한혜정 교수가 드는 예의 상당 부분이 김현진씨의 것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중간에 들어있는 꽤나 긴 편지글이 내 머리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곳곳에는 김현진씨의 사례 말고도 그 시절에 방황한 나의 경험들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단지 결단력이 약했고, 용기가 없었으며, 스스로에 대해 확신에 차지도 못했기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 3년을 버텨 냈던 것이다. 나는 언제고 하나의 개인으로 봐주길 원했다.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그랬다. 한 학교의 학생이 아니라, 어른 이전 단계의 청소년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이고 싶었다. 자유를 갈구하고, 내 생각을 펼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고픈 그런 한 명의 개인이고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년은 내게 그걸 허락치 않았고 고민했으며 떠돌았다.

  아버지는 없는 돈에 학원을 보내주셨고, 과외도 시켜줬으며, 책이 필요하다면 언제고 넉넉히 책값을 건네주셨다. 어머니는 몸에 좋다는 각종 과일을 깎아 내 책상에 대령해주셨고, 아침에는 쥬스까지 손수 만들어 속을 든든히 채워주셨다. 그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걸 두 분은 모르셨다. 두 분의 고마운 행동은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다, 는데 촛점이 맞추어졌을 뿐 나란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맞춰져있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적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는 주위에서 온갖 관심을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들 사이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관심과 배려는 언제나 성적에 비례했다. 그걸 몸으로 확실히 느꼈다.

  "경제주의 사회에서 부모 자식 관계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 왔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돈을 버느라 바빴던 부모들은 부모 노릇을 자녀의 학비를 대고 피아노를 사주고 생일 파티를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능력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게 자금을 대는 능력에 비례하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계속 부모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한다. 충분히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과 충분히 돈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존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한다. 자녀들은 지금까지 "공부만 잘해 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부모를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지금 그 공부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속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마음 깊이 원망과 적개심을 품고 있다."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그것들을 지금의 청소년들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다수는 경험하면서도 모르고 있다. 먼 훗날 그들은 지금을 기억하며 부모님을 원망할지도, 선생님을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갈수도 있다. "공부만 잘해 달라"는 암묵적인 요구는 자신을 잊게 만든다. 그들이 원하는건 '공부 잘하는 누구'이지 그냥 '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나는 무척이나 괴로웠다. 하지만 당시의 내 나이 또래의 지금의 아이들 역시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을 잊게 만들고 있다. 분명 교과서는 자신을 찾으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언제나 바른 말만 하므로.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우리는 인류대 합격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절대 정숙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모의 수능 점수 향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학습의 지표로 삼는다. 적당한 학습지와 믿을 만한 과외로 사탐과 과탐을 외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어문계열 지망의 꿈을 계발하고 우리의 방학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밤샘의 힘과 침묵의 정신을 기른다. 자기 반의 이익을 앞세우며 위선과 이유 없는 반항을 묵인하고 불신과 비난이 어색하지 않는 사제 관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감대 없고 타성에 젖은 수업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내신과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학교가 발전하며 학교의 융성이 곧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육성회비와 등록금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학교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배후로서의 학부모 정신을 드높인다. '반A고'(경쟁하는 학교 이름) 정신에 투철한 '愛석차 愛통계'가 우리의 삶의 길이며 대명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배에 물려줄 영광된 고합격률 대명의 앞날을 내다보며, 이기심과 욕심을 지닌 근면한 학생으로서, 전교생의 '죽어지낸 3년을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합격률을 창조하자."

(3학년 7반 허은영이 1996년 국민교육헌장을 풍자해 쓴 글)

  1996년에 이런게 있었는줄도 몰랐다. 그런데 찬찬히 읽다보면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2016년에는 뭔가 좀 달라져있길 바란다면 그건 공상(空想)에 불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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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가 바뀌는게 먼저일까요? 사회가 바뀌는게 먼저일까요? 때로는 이런 논의들이 갑갑합니다. 사회는 점점 천민자본주의의 강도가 심해지고 학벌간 격차가 점점 커지는데 교육만 보고 변해라 변해라 합니다. 한쪽에서는 좀 더 경쟁을 심화시키라 하고 한쪽에서는 경쟁이 아닌 공생의 교육을 하라 합니다. 여기서 어느쪽이 옳으냐는 분명하겠지요. 하지만 사회는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서 학교는 왼쪽으로 가야한다는 당위성. - 여기서 수많은 현실적인 갈등들이 나오잖아요.

마늘빵 2008-01-14 21:43   좋아요 0 | URL
그쵸. 사회는 '경쟁'할 것을 종용하고 있고, 학교에서는 공생의 교육을 해야한다고 하고. 학교에 '경쟁'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시작하면,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라고 불러야할 것 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현실은 거기까지 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