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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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에서 하승우씨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 물리적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힘의 논리가 만연해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똘레랑스를 제안하고, 차이와 다양성에 관용적이지 못한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강조하고 나선다. 얇은 책세상 문고판 책이지만 하승우 씨는 이 안에 똘레랑스의 등장배경부터 미국의 털러런스와 프랑스의 똘레랑스의 차이를 설명하고, 인권, 양심, 토론, 설득, 다양성의 존중 등에 걸쳐 적용한다. 또한 똘레랑스의 한계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똘레랑스'는 '참다', '견디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tolerare 에서 나왔다. "서구 사회에서 인종, 문화, 종교의 차이는 격렬한 갈등의 씨앗을 뿌렸고, 결국 많은 피로 그것을 수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똘레랑스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572년 기독교 구교과 신교 사이의 갈등으로 빚어진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이란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 3천을 비롯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2만여명이 죽었는데,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에 반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종교전쟁으로 번졌다. 

  유럽의 중세 13세기부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들이 '종교재판'이라는 합법적 제도를 통해 이단과 이교도에 대한 처형과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세우고, 비진리를 제거했는데, 15세기 종교 개혁 이후로 지난한 전쟁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서 '종교적 관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피에르 베일이며 홉스며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관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승우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와 짝을 이"룬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즉 똘레랑스는 그 자체에 이미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똘레랑스의 원리로 몇 가지를 들자면, 첫째,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을 들 수 있는데,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의 저자 필리프 사시에에 따르면 "자기 중심주의의 포기"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자기 중심주의를 버릴 때 타인의 목소리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롤즈와 비교해보면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합리적인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같은 자발적인 포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롤즈는 원초적 상황에서 무지의 베일이란 장치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하승우의 논의와 별개로 칼 포퍼는 <관용과 지적 책임>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제 1원칙,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제 2원칙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 제 3원칙 "만약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하승우가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를 언급한 것은, 이와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극단을 거부하고 서로 토론을 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은 셋째 원리인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 넷째 원리인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은 모두 첫째, 둘째 원리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토론과 설득은 분명 이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싫고 좋음의 마음의 문제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또한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것도 다양한 여러 의견들이 광장에 나와 논의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승우는 이후 홍세화와 그람시, 마르쿠제, 루쉰 등을 끌어들이며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논의를 전개한다.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가 절실히 필요함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똘레랑스'이라는 개념이 자비나 베풂과 동일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똘레랑스는 '관용'으로 표기할 수 있는데, 똘레랑스, 라고 지칭했을 때와 관용, 이라고 지칭했을 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편의상 그것을 '관용'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지만 전적으로 우리말에서의 관용이 똘레랑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용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한남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그의 책 <관용과 열린 사회>를 통해서 우리말 관용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우리말 '관용'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 내지는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의 본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해선 곤란하다. 우리말 '관용'은 그 뒤에 '베풀다'라는 동사가 붙는 반면, '똘레랑스' 뒤에는 '하다'라는 동사가 붙는다. 즉 우리말 관용은 상대에 대한 나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고, 똘레랑스는 대등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p.s.  

  프랑스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홍세화씨가 한국에 돌아와 똘레랑스를 외친지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었다. 그는 책에서나  강연회서나 똘레랑스를 외쳤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똘레랑스를 전파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한번쯤을 다 들어봤을만한 용어가 됐다. 그런데 똘레랑스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연구서나 학술서가 많지 않고, 해외에 이미 나와있는 유명 철학자의 책조차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으로는 프레스톤 킹의 <관용론>, 로크의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 포퍼의 <관용과 지적책임>을 들 수 있다. 로크의 <통치론>이나 <시민정부론>은 번역되었지만,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는 번역되지 않았고, 포퍼의 수많은 저서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1987년에 쓴 <관용과 지적책임>이라는 책은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되어 나와도 그다지 팔릴 것 같지 않은 책들이지만, 의식있는 출판사에서 이 책들의 번역을 추진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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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는 우리가 '똘레랑스'해야 할 때
    from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007-12-11 01:13 
    '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는가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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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평생 정의만을 연구했던 한 철학자가 타계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온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을 내놓아 세상을 놀래켰고, 철학 분야에 있어 죽어버린 정의의 영역을 부활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1957년에 발표한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이 논문을 보완하는데 또 한 세월을 쏟아 필생의 역작 <정의론>을 1971년에 펴냈다. 그는 바로 다음해 하버드 대학을 빛낸 교수로 뽑혔고, 이후의 모든 정의론은 그를 가운데 두고 퍼져나갈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죽기 10년 전 <정의론>에 이어지는 후속 연구 결과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이 이론의 적용 영역을 세계로 넓힌 <만민법>이 출간되었다. 

  김영사에서 나온 스물 세번째 지식인 마을 시리즈 <롤스&매킨타이어>는 이런 롤즈의 이론과 그의 동료인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담아낸 책이다. 제목은 두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했지만 무게는 확실히 롤즈에 쏠릴 수 밖에 없다. 매킨타이어만을 다루는 책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롤즈를 다룬다면, 자연스레 무게는 롤즈에 실리게 된다. 롤즈는 그의 역작 <정의론>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롤즈의 비판자'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본래는 주목받지 못하던 철학자들도 롤즈의 비판자가 됨으로써 롤즈와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롤즈의 비판자로는 대표적으로 샌들, 테일러, 왈쩌, 그리고 이 책에 다루는 매킨타이어가 있다. 롤즈의 이론과 그에 대한 이 네 사람의 비판은 스티븐 뮬홀(표기는 스테판 뮬홀로 되어있으나 스티븐 뮬홀로 부르는게 옳다)과 애덤 스위프트가 지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아카데미)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그외에도 로티, 드워킨, 래즈, 노직 등도 롤즈와 관련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이다. 앞의 네 명은 공동체주의자로, 뒤의 네 명은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롤즈가 이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그의 이론이 바라보기에 따라서 어느 진영으로부터도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롤즈의 이론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양 진영 사이 어디엔가 위치해 있다.

  이 책에서 롤즈와 함께 다뤄지는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다. 고로 이 책에서 롤즈가 비판을 받는 점 또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에서도 해당 철학자마다 롤즈를 비판하는 부분이 다 다르다. 매킨타이어의 경우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에 주목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토대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때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은 '합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말은, 남의 것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공동체주의들은 롤즈의 이론에서 제일 첫번째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이후의 논의를 무너뜨린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너무나 이상적인 존재이고, 현실적으로 상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매킨타이어는 따라서 그들이 도덕적이라고 간주할 근거가 없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도덕적 덕성을 기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개인을 굳건히 지켜주는건 오랜 시간 다듬고 가꿔온 길러진 덕성이라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자 중에서도 테일러와 함께 가장 바깥에 서있는 자이다.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매킨타이어와 테일러, 다음이 샌들과 왈쩌가 될 것이고, 롤즈가 다음에 서게 될 것이다.  먼저 언급한 인물이 공동체주의적 경향이 더 강하단 말이다. 고로 저들 중엔 롤즈가 가장 덜 공동체주의적이다.

  롤즈의 이론이 다소 이상적이라는 점은 그의 <정의론>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롤즈는 자신의 이론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건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당사자들의 조건 때문인데,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은 아니어도 충분히 현실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머리 속에서 사고 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느껴 볼 수 있을테지만 매킨타이어의 비판은 롤즈와 대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롤즈가 바라보지 못하는 구멍을 메꾸기 위한 비판이라고 봐야한다. 롤즈의 이론을 무너뜨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롤즈가 충분히 기존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리주의를 뒤엎는 성과를 냈고, 그것을 인정한 채로 더 완벽한 이론으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롤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극대화는 사회 성원의 희생을 볼모로 잡은 채 전개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롤즈는 칸트에 자신의 이론적 기초를 의지하고 있는데, 칸트의 관점에서 보아 공리주의는 수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기에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롤즈는 공리주의가 버린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정의론>을 통해 실현시킨 것이다. 롤즈의 정의 원칙 중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만으로 롤즈의 이론과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저 대략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 그리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 접근은 하지 않지만, 대략 어떤 관점에서 두 사람이 사회를 바라보고 정의를 논하는지를 파악하는 정도로 책을 활용하면 되겠다. 롤즈와 매킨타이어로 들어가는 입문서 격으로 보면 영양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자고 마찬가지이지만 롤즈는 워낙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새로운 용어과 개념을 등장시키기 때문에 용어에 대해 개념을 잡고 내용접근을 할 필요가 있는데, 입문서격인 책으로는 그것을 수용하기 힘들어보인다. 저자는 맨 뒤에 대표적인 용어들을 간단하게 서술했는데 서비스 차원으로 봐야지, 이 정도 해설로 용어를 파악했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롤즈는 <정의론>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을 통해서 그 사이에 있었던 여러 철학자들의 비판점을 수용하고 이론을 좀 더 현실적이고 완벽하게 만든다. 가장 흔한 비판인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주장을 의식한듯이 이후 '중첩적 합의', '공적 이성', '정치적 구성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새롭게 선보이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 책에선 <정치적 자유주의>의 논의는 다루지 않는다. 롤즈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정의론>에 머물러있고, 그에 가해지는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니 <정치적 자유주의>의 출간 이전의 논의라고 보면 되겠다.

  참으로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논의를 전개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롤즈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또 롤즈를 둘러싼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입문서는 중요하다. 한 눈에 그 모든 것이 쉽게 들어오지 않고, 바로 일차서적을 읽는 건 너무 막연한 접근이라 어렵다. 롤즈와 비판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려면 이 책 이후에 영역을 조금 더 넓히고, 깊이는 몇 배 더하여,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읽는다면 한 눈에 모든 것이 파악될 것이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롤즈의 일차서적을 읽기 전에 롤즈 이론을 개념잡길 원한다면 염수균씨가 정리한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를 권한다. 이것도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 말고는 일차서적 읽기 전에 마땅히 접근할 만한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정의론> 1장부터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p.s.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책 18쪽에선 이렇게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자세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권창은 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과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김주일 저, 프로네시스, 2006)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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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11-2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롤스의 이론이 잠깐 언급된 부분을 읽었는데, 세 문장인가, 그쯤 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낑낑댔던 기억이 나요. 번역의 잘못일까,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걸까, 하면서요. (내용은 까먹었는데 분배의 정의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음.) 이런 걸 술술 읽고 술술 써내는 아프님도 얼핏 보면 난해한 분일 것 같지만, 여러분, 그건 오해예요. 저 마지막 부분을 좀 보세요.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맨땅에 헤딩.." 음음음 난 이래서 아프님이 좋다니까!

마늘빵 2007-11-28 09: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입문서격이고 구체적인 이론적 내용은 많이 나오지 않아서 읽기 한결 수월해요. 롤즈 책을 직접 읽으면 머리 아프죠. -_- 제가 롤즈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관심이 많고. 사실상 공리주의 이후에 롤즈의 이론이 사회 전반적인 부문들에 적용이 되고 있어요. '정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역시 현실에서의 문제에 정의론을 적용해서 책의 뒷 부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수행평가의 공정성, 비정규직 문제를 살펴보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7-11-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람이 공정하게 행동해야 하는가?
왜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에 관해서는 맥킨타이어의 '길러진 덕성'이 유의미할 것입니다.
제가 공자의 문도인 이유이기도 하지요. 하하


마늘빵 2007-11-28 09:59   좋아요 0 | URL
아직 매킨타이어의 저서를 직접 살펴보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매킨타이어의 입장만을 접한지라 명확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롤즈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해나갈 것인가, 에 있다고 한다면, 매킨타이어의 그것은 롤즈가 살짝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보완해줌으로써 롤즈의 이론이 좀 더 완전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킨타이어는 롤즈만큼이나 체계적으로 사회 제도의 문제를 다루지는 못하고, 롤즈 이론의 빈구석을 메꿔주는 정도로 보입니다. 매킨타이어와 공자의 - 두 사람의 이론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 개인의 덕성을 꾸준히 기르는 것 또한 공정한 사회, 도덕적인 사회를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죠.

yoonta 2007-11-3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즈..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한번 봐야지하고 아직도 못펼쳐들고 있는 사람인데..아프락사스님의 깔끔한 리뷰 잘봤습니다. 서점가서 한권 집어와야겠네요. ^^

마늘빵 2007-11-30 21:45   좋아요 0 | URL
아핫, 윤타님께서 제 서재까지 오시고. :) 요 책을 통해서 뭔가를 많이 기대하시진 않는게 좋겠습니다. 대중적인 입문서격이고, 롤즈의 원초적 입장과 그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에 주로 할애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학교에서 평등을 말하다 SERI 연구에세이 51
곽해룡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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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 윤리 교사로 재직중인 저자는 그동안 그가 보고 느꼈던 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평등'이라는 기준으로 학교 교육 현장 곳곳을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교장과 평교사 간의 관계,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학생과 학생 간의 관계, 교사와 교사 간의 관계 등 교육 현장의 구성원들 각각의 관계로부터 시작해 평등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를 구체적으로 예로 들면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대부분이겠지만 '어떤 경험'을 '모든 경험'으로, 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경우'로 다소 보편화시켜 이야기해도 무방할 정도로 교육 현장에서 많이 목격되는 장면들이다. 

  신입 교사의 경우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에 관한 노하우가 없어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인데, 선배 교사가 마치 뭐 대단한거 감싸쥐고 있는양 공유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나, 교장에게 잘 보이려고 수업에는 소홀하면서 아부하는 교사들, 또 수업은 뒷전이고 부수입 얻으려고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교사들, 나이가 많다고 혹은 직급이 높다고 혹은 경험이 많다고 으시대며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는 경우 등 교사와 교사의 관계에 있어서만도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온다.
 
  주로 저자의 시선은 교사와 교사의 관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사례와 같은 '학교를 망치는 유형'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교무실에서의 교사들의 왕따를 비롯 공동체의 분열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불합리한 연공서열, 오랜 인습으로 굳어진 연고주의 (학연, 지연, 혈연), 파벌주의, 집단공방체제(공동방어전선 혹은 연합공격전선), 친소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비합리적 온정주의, 배타적 개인주의나 패권주의, 유아독존의 중립주의 등이 모두 불평등의 배경이다."  (P43)

  그 어느 곳에도 줄을 서지 않고 독립적으로 서 있는 사람은 결국 왕따 당할 수 밖에 없다. 줄을 서고 아부하고 세력을 형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교무실 안도 사회와 다르지 않다. 다만 국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에서 특히나 이런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자격을 획득하고 국가에 고용된 국공립 교원과 이사장이나 교장에 의해 고용된 사립교원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렇게나 자를 수는 없겠지만 수업량을 줄이거나 승진을 위해서, 혹은 고3 업무를 맡기 위해서는 이 같은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이사장과 교장이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한 예로 저자는 이런 경우를 들고 있다. 서울 D고에서는 교사들이 출신대학별 모임을 자발적으로 해산했다고. 출신대학에 따라서 세력이 형성되고, 왕따 당하는 교사들이 있다보니 그들 스스로가 자정노력을 한 것이다. 다른 예로 교장이 동문 회동을 주선하고 동문을 요직에 배정한 경우와는 대비된다. 학교도 일반 기업체 못지 않게 하늘대학 출신들을 선호하고 출신대학에 따라 능력을 평가한다. 어느 재단은 서울대를 10점 만점으로 시작해 수능점수에 따라 서울 중위권이 다음, 지방 국립대학과 서울 중하위권 대학이 다음, 그리고 지방 사립대학 순으로 점수를 매긴다. 최초 지원서류를 내면서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저자는 교사와 교사 간에도, 교사와 학생 간에도 '수평적 인간 관계'가 이루어져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매너와 태도를 가질 때 '수평적 인간 관계'는 성립한다. 그러나 관계맺음에 있어 단 한 명이라도 시소게임을 하고자 한다면 수평적 인간 관계는 바로 깨지고 만다. 뉴스를 보면 교사가 학생을 개패듯 팼다는 기사가 나오고, 거꾸로 학부모나 학생이 교사를 패서 입원했다는 기사도 종종 나온다. 뉴스로 전해지지 않고 학교 안에서 조용히 묻혀지는 사례들까지 친다면 영국이나 미국 못지 않을 것이다. 수평적 인간 관계는 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 깨지기 쉽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도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사가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건 당연시 여기면서, 학생이 교사에 대해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지켜야할 것들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풍토는 분명 잘못 되었다. 한편 교사는 또한 그들이 스스로 인간으로뿐만 아니라 교사로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학부모가 건네주는 돈 십만원에 무너지지 말고, 어떻게 하면 보충수업교재를 채택하면서 부수입을 챙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보잘 것 없는 경제적 수익을 얻고자 교사라는 직함을 팔아넘긴다면 학부모로부터도, 학생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그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다니던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촌지를 주곤 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고 싫었지만 하지말라고 해도 너를 위한 것이라며 멈추지 않으셨다.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다. 5만원-10만원 가량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금액이 문제가 아니다. 촌지를 드리는 엄마도 싫었지만, 촌지를 받는 선생님도 싫었다. 촌지를 드리고 촌지를 받음으로써 나에겐 좋은 선생님 한 분이 사라진 격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절대로 받지 않을 거 같던 분이라, 미리 어머니에게 그 선생님에게 드리지 말라고 말했으나, 결국 그 선생님은 받으셨다. 그리고 올곧고 대쪽같으실 것 같은 그 분은 나에겐 믿고 따를 만한 존경스러운 분이셨지만, 받음으로써 더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만약 받지 않으셨다면 나는 그 분을 전적으로 믿고 따랐을 것이고 의지했을 것이다.

  사실 촌지는 지금과 달리 일종의 관행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리와 부패로부터 벗어나있어야 할 교사들의 촌지관행을 근절시키기 위해 정부와 교육부가 나섰다는건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의 자정적인 노력으로서 자신을 단속해야 할 분들이 강제적인 제제와 처벌이 두려워 행위를 그만두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일부 촌지교사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단 말인가. 교사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한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한번은 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새로 오셨다가 같은 재단 상업고등학교의 여자 선생님과 결혼 후 다른 학교로 가신 분이 계셨는데 이 젊은 선생님 또한 나를 실망시켰다. 젊은 국어교사였던 그 분은 매일같이 실용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전형적인 대학 운동권의 모습과 생각을 가진 분이었는데, 나의 과외 선생님(나는 당시 그분과 결혼한 여자 영어 선생님 - 이 분은 학교를 그만두셨다 - 한테 과외를 잠깐 받았다)을 통해 국어 과외를 받을 생각이 없는가를 건너 물어오셨다. 그런 분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실망스러웠다. 

  이야기가 샜는데 이 책은 곳곳에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관계에 있어서의 평등을 말한다. 저자 개인의 개인적 경험과 울분으로 쓰여진 인상이지만 비단 그만 경험했을 문제들은 아니고,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자꾸만 나의 개인적 경험이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고, 교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올곧은 길을 선택한 교사라는 생각이다. 교사지망생으로 그의 열정과 올곧음을 배운다. 같은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그의 열정과 올곧음에 희망을 가져본다.


p.s. 이런 열정과 올곧음이 '삼성경제연구소'라는 껍데기로 싸여져있다는게 아이러니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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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7-11-27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든 평등 중에서도 학생과 교사의 평등! 을 바래요. 물론 교사간의 평등, 교장과 교사의 평등이 되어야 교사도 기분좋게 학생과 평등을 실현할 기분이 더 들겠지만, 기분따위는 젖혀두고! 그건 필수니까요. 아직도 학생의 가정형편에 따른 차별, 성적에 따른 차별이 횡행하지요. 학생은 나와 동급인 인격을 가진 타자가 아니라 내가 가르치고 명령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문제겠죠. 아, 그러고보니 이건 가정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로군요. 저부터 반성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위해 노력해야겠네요. 애들은 내가 시키는대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마늘빵 2007-11-27 08:49   좋아요 0 | URL
네. 교사가 학생을 대할 때도, 학생이 교사를 대할 때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만 지켜지면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함에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는가를 꾸준히 생각해야돼요.
 
한국 교육 거듭나기 SERI 연구에세이 61
박정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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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자리가 들어와도 덥썩 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자리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건 교육부 장관 자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대개는 교육부 장관 개인의 비리나 결점이 드러나 그만두기보다는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던거 같다. 그만큼 한국땅에서 교육은 매우 민감한 영역이다. 무슨 정책을 내놓아도 어디로부터든 욕을 먹는게 '교육' 분야이고, 뭘해도 잘했다 소리 못듣는게 '교육'이다. 지속적으로 안정되게 유지되어야 할 교육 정책이 일 년을 못가서 쉽게 바뀌어버리고 바로 몇 달 뒤 대학입시를 앞 둔 수험생들은 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박정수씨는 <한국 교육 거듭나기>에서 한국 교육에 보이는 모든 문제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고교평준화, 교육자치, 학생평가, 교원임용 및 평가, 학제 개편, 사교육과 공교육, 대학입시, 대학교육의 질적 수준, 지방대학 살리기, 학벌사회 등을 다루는데, 너무 많은 주제를 140쪽 가량 분량에 담다보니 각각의 주제를 그렇게 깊이있게 살펴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저자의 오랜 고심의 흔적은 엿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행정학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정책상의 문제점들, 행정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픈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율화'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커리큘럼이나 학생의 선택에 있어서, 입시에 있어서, 좀 더 자율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율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흑백논리적 시각이다. 매일 뉴스며 신분이며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화 하면, 3불제를 놓고 된다 안된다 치열하게(?) 싸우던 국회의원들이 생각나는데,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저자의 입장은 중간이다. 자율화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협소한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전반적인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자율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세계화, 고령화 시대에 평준화 정책은 경쟁력이 없다며 비판하고 나선다. 대학이 대중화되어 대학원이 대학 수준으로 전락해버렸고 그 비용은 학생들이 다 감당해야 하는게 오늘이고, 사회의 수요에 걸맞는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대학 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지 않을 사람을 위해서는 실용적인 직업학교를 만들고 그들이 적성을 살려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평준화만 붙잡고 늘어지는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나도 대략 동의한다. 평준화를 붙잡을 것이 아니라 학력에 따른 서열화를 벗어난 다양한 학교들이 생기고 점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흥미와 적성에 의해서 진학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게 안되니 평준화를 붙잡고 있는 것인데, 방향이 옳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일단 과감하게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 또한 특성화 시켜서 서울대가 모든 학과를 독점하는 현실을 깨야한다. 어느 대학은 의학, 어느 대학은 철학, 어느 대학은 경영학이 커리큘럼도 좋고 교수진도 빵빵하다더라,라는 식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자연스레 그렇게 형성된다면 더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바랄 수 없는 부분이니 인위적으로라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저자 또한 이 책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대학별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 투자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주의할 것은, 각 대학들이 서로 돈되는 학과를 집중양성하려고 할테니, 소외되고 결국 없어지는 학과가 없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령 문사철 이라고 불리우는, 국문과, 사학과, 철학과 같은 학과들은 국가차원에서 보호해줘야한다. 이미 내가 대학생이었던 수년전 전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철학과가 사라졌다. 아예 없애버린 경우도 있고, 문화콘텐츠학과, 교양학부 등으로 이름을 변경해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상 '보존'이 아니라 '소멸'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전에 진중권이 칼럼을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되고 우리 애니메이션은 안되는 이유를 아는가, 라면서 그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내용물에 있다고 했다. 어떤 문화산업이고, 드라마고, 영화고, 애니메이션이고 간에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내용이 좋아야 하는데, 이걸 등한시 한 채 최신 기술만 적용시키려고 하니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문사철이 사라지거나 소외되고 시대의 부름이라며 업종변경시키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화콘텐츠가 생겨나고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의 충실함은 기본 학문과 기본 바탕에서 찾아야지, 변형된 수박껍데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고등학교 역시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분야의 학교들을 만들어서 선택의 폭을 넓혀주자고 한다. 특목고의 경우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함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더 열어주자 한다. 저자는 결국 이는 실업학교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말한다. 현재 실업고 졸업생의 많은 수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모순된 현실에서 본래의 취지에 맞게 직업교육과 기능인력 양성의 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실업계 학교는 중학교 때 성적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그들의 몸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직업학교이지만 머리는 대학을 향해 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실업계 학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은, 특목고는 특목고의 취지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특목고가 사실상 하늘대학을 바라보는 학부모와 학생이 머무는 곳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본래 취지대로 진학치 않고 업종변경(?)해 진학하는 이대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진학했으나 중간에 업종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도해야지, 모른 척하고 그곳에 머물며 다른 곳을 바라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애환은 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다른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애초 진학할 때부터 꿈꾸던 업종은 해당 특목고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눈감고 머무는 경우가 태반일 것. 그래서 좀 더 다양한 학교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적에 따라 줄지어진 학교 등급 시스템이 아니라 취향과 흥미에 따라 구분된 시스템으로. 너무 이상적인 바람일까.

  이 얇은 책에서 저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어 일일히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자율화에 닿아있고, 그가 주장하는 바에는 대략 큰 틀에서 동의하지만, 자율화의 난점을 너무 언급하지 않는 경향도 보인다. 자율화를 우려하는 건 경쟁 체제를 부추기고 서열화를 더더욱 굳건히 할까봐서다. 본래의 의미대로 자율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자유주의 체제로 둔갑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다. 그래서 자율화를 말하려거든 예상되는 난점을 모두 언급해야 하고, 온전히 자율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구비해야 한다.

  교육이 현재 엉망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이고, 정책 하나가 누군가의 미래를 쉽게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여기에 나온 문제는 그 중 굵직굵직한 몇 가지일 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끝도 없이 나올 것이다. 안 된다고만 고집하지 말고, 잇속 챙길 목적으로 개방하자 하지말고, 우선 터놓고 바람직한 방향 설정에 대한 대화가 오가야 할 것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당사자들간의 최초의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현 상황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뻔하고 이상적인 말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상을 꿈꾸는데서부터, 이상에 대한 합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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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아이들 세 명을 특목고(한 명은 과학고, 두 명은 외고)에 보냈었습니다.
특목고 선생님들은 참 훌륭하셨지요.
선생님으로서의 자부심과 걸맞는 실력을 갖추고 계시더군요.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역시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학습열의가 충만함을 감지할 수 있었답니다.
실력있는 선생님과 역시 뛰어난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서 아이들의 실력이 죽죽 신장하더군요.
문제를 놓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질문과 토론을 통해 해결하곤 했지요.
참 좋은 교육체제였답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비교적 이상적인 학교들이었답니다.
그런 좋은 학교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옥죄는 한국의 현실이 서글픕니다.
네째 아이는 특목고에 가해지는, 갈수록 심해지는 핸디캡이 마음에 걸려 일반고등학교를 보냈답니다.

결과적으로 네째 아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이 아이가 자질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지요..)
특목고에 다녔던 아이들보다 객관적인 실력면에서 처집니다.
현행의 한국 대입평가제도에 맞추느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참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국가차원에서 핸디캡을 주는 나라는
아마도 세계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하

특목고에서는 선생님들의 밸류에 대한 평가가 자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특목고를 지원하는 선생님들을 교육청에서 평가합니다.
그렇게 선정된 선생님들이 특목고에 가게 되면 두번째 평가가 기다립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실력을 평가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능력이 부족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평가를 견디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는 선생님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 선생님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실력있는 선생님들은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더 무섭고 가혹하지요.
그렇게 특목고의 선생님들의 수준이 유지됩니다.


마늘빵 2007-11-27 11:10   좋아요 0 | URL
특목고가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된다면 괜찮겠지만, 오늘날 현실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인지라 핸디캡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기회가 주어졌고, 누구는 공부를 잘해서 특목고에 가고, 누구는 공부를 못해서 일반고등학교에 간다고 해서, 공정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목고가 일반고보다 상대적으로 모든 여건이 나은 상황에서, 학생들은 3년간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다른 아이들은 비록 그들이 공부를 더 못해서 일반고를 가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3년을 지내고 대학입시에 응하는 두 학생이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 입니다. 그래서 특목고에 핸디캡이 주어지는게 아닐까요.

본래 취지대로 과고는 과고의 목적대로, 외고는 외고의 목적대로 운영되고, 학생들이 본래 취지에 맞게 진학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해서 핸디캡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대로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원했을 뿐인데 본래 취지대로 진학치 않는다고해서 핸디캡을 주는건 너무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목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음'을 이유로 들지만, 그만큼 또 혜택을 받았으니 핸디캡 역시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보다 수혜를 받지 못하는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배려차원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입학하고도 적응하지 못하는 상업고, 공업고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상업고, 공업고는 본래의 취지가 대학입시가 아니라 직업교육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고요. 그러나 일반고등학교의 경우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같은 조건에서 생활한 학생이라면 동일하게 취급받아야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배려가 필요하단 거겠지요.




비로그인 2007-1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의 학교를 정상 학업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퇴행시켜놓은 채,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비정상적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핸디캡을 준다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면에서나 상식적인 면에서 공정한 일일까요?
저는 난센스라고 생각한답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11-27 19:50   좋아요 0 | URL
한사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시는건 어떨까요. 자녀도 없고, 오로지 나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바라봤을 때, 과연 어떤 것을 원할 것인가, 를 생각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롤즈의 <정의론>에 등장하는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로 돌아가보는거에요. 저는 항상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처음으로 돌아가보려고 하는데 롤즈는 그것을 원초적 입장이라고 말하더군요. 나의 이해관계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오로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판단을 하는거죠.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고등학교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여건이라는 것 안에는 아마도 공부를 많이한 능력있는 선생님 말고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 또 학교 환경, 토론과 토의 위주의 수업 등등도 포함되겠죠. 이런건 '정상 이상의 것'이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고등학교에선 바랄 수 없는 것들이고, 채워줄 수 없는 부분들이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일반고등학교를 제로 기준점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고등학교의 교과과정과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는 점은 별개로 논의를 해야할거 같아요.
 
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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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철학자 탁석산의 발언은 거침 없다. 잘은 모르지만 그는 철학 학계에서는 다소 왕따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다. 어디 얽매이지 않은 - 엄밀히 그는 한국외대 무슨 대학원 소속으로 얽매여있긴 하다 - 자유롭고 명쾌한 철학자 탁석산은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내가 대학 학부생이었던 때 대학 강단에 선 그의 모습도 그랬다.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하고픈 말을 다 쏟아내 웃음을 주곤 했다. 그가 쏟아낸 말들 중에는 꽤 깊이 생각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나는 그를 통해 조동일을 접했고, 이키유바라 최를 접했다. 서울대학 학부 신입생 시절 조동일과 잠시 맞짱 토론을 했다던 그는, 자신이 언젠가 낸 책을 통해 조동일을 한번 더 공격했음에도 그가 답하지 않은건 자기와 같은 하찮은 존재와 상대해봐야 아무런 이득 볼 게 없다는 조동일의 계산이 아닐까 라고 혼자 추측하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굳이 또 가르치는 학생을 향해 말로 풀어낸다는 것 자체가 깬다. 학부시절의 잠깐의 토론이 과장됐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건 아니건 나는 이런 털털한 면을 보여주는 솔직한 그가 좋다.

  <철학 읽어주는 남자>는 당연히 철학서다. 하지만 일반적인 철학서에서 볼 수 없는 주제가 함께 버무려있는 해물잡탕과 같은 책이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파트 1은 철학이 무엇이고,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파트 2는 철학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는 다소 실용적인 면을 보여준다. 마지막 파트 3에서는 그의 철학에 대한 고민이 짙게 묻어난다. 파트 3은 논란이 많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땅에서 철학하는 한 명의 철학자로서, 탁석산은 신랄하게 한국 철학계와 대학 풍토를 질타하고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를 강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이 대중에게 선보여진 댓가로 그가 학계에서 더 왕따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철학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철학을 접하고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철학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과, 뒤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진 못하지만 생각을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도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탁석산은 과감히 삶의 지혜로서의 교양주의 시각으로 철학을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교양'이기보다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간 선보인 여러 책들은 철학의 실용성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입장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곳에 철학을 써먹어라.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하라는 의미다. 회사 기획서 작성법이나 보고서 작성법, 토론법에 대해 서술한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시리즈는 이런 맥락에서 바라 볼 수 있다. 교양으로서 철학을 접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로서 써먹으라는 그의 주장은, 파트 3에서 이어진다. 한국 철학계의 학문 풍토와 대학 교수들을 비판하면서 이대로는 철학이 아무런 발전도, 사회적 기여도 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의 비판은 꽤나 날카롭고 직설적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신랄하게 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주장에 담긴 내용이 진부적일지언정 그가 주장을 이끌어내는 사고과정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철학은 번성기를 가져본 적도 없으므로 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발언, 인문학의 위기를 빌미삼아 정부에서 연구비를 타내 대학 교수들끼리 쓸데없는 프로젝트를 하며 꿍짝꿍짝 타먹고 있다는 발언, - 서울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프로젝트 '토픽맵에 기초한, 철학 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은 이런 쓸데없는 곳에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례다. 나는 이걸 왜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했느냐 하는 논쟁 또한 훈고학적인 태도일 뿐, 중요한건 자기철학을 하는 것이다, 라는 발언, 심지어는 한국 철학계에는 합의된 시대정신이니 과제가 없다는 발언 등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나아가 토론에서, 정책 결정에서, 철학자들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불러주지 않는 그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티비 토론 프로그램이나 정부가 진행하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철학자가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주 티비에 비춰주는 진중권씨야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철학자라기보다는 그냥 문화 비평가 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고, 그를 제외하고는 탁석산씨가 몇번,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가 몇번 티비에 얼굴을 비췄을 뿐이다. 티비 토론프로그램에 나오는 횟수를 가지고 논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만큼 소외되고 있다는 걸 말하고자 이런 예를 들었다. 탁석산의  지적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적 내용에만 관심있을 뿐 사회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하지 않는 철학 교수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해 철학을 하는가, 이다. 단순히 밥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학문적 계승자를 위해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분명 지극히 협소한 부분만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좀 더 치열해지고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비판받을까 무서워 몸사리지 말고, 괜히 쓸데없이 더러운 물에 발 담글까 두려워하지 말고, 현실 사회와 부대끼고 싸워야 한다. 옳은 것에는 옳다고, 틀린 것에는 틀리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철학을 즐기기 위한 입문서인지라 가볍게 손에 들 수 있지만, 책을 내려놓을 땐 손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p.s.

  대학교 학부과정에서 철학과를 없애고 교양으로 대치하고, 대학원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반대한다. "전문 기술로서 철학을 활발하고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른 과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 알려진 이들 중에 이정우씨 정도가 해당되고, 철학하는 이진경씨, 고병권씨 정도는 전공을 바꿔 활동하지만 엄밀히 전공은 철학이 아닌 사회학 분과다. - 나이 먹을수록 먹고사는 문제에 눈 뜨기 때문이다. 다소 악랄한 발상이긴 하지만 눈뜨기 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관심있는 이들은 애초에 20살부터 철학에 퐁당 빠뜨려서 공부시켜야 한다. -_- 하다보면 더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공부하는 놈이 나타난다.

  그러나 철학과는 계속 존속시키되 실용적인 교양과목으로서 철학은 변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교양과목이라고 개설된 게 동양철학의 이해, 서양고전연구 이런 식이니 살짝 궁금해서 찾아온 애들도 관심없어 떠날 판이다. 철학과의 수업은 빡세게, 교양으로서의 수업은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들과 강사들이 스스로 변신을 해야한다. 이런 점에서는 탁석산의 지적에 동의한다.

  기업에 의한 철학 연구소의 설립도 말하는데, 기업에 기본 정신이 종속되지 않은 채 사회기여 차원에서 물질적인 지원만을 해준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경제연구소라면 모를까, 철학연구소를 차려줄 기업은 과연 있을까 의문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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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백백 2007-11-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문단에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을 무렵 대학 강단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이란 구절 있잖아요. 탁석산 씨가 학부생이었을 때 벌써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탁석산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네요.

마늘빵 2007-11-13 09:32   좋아요 0 | URL
앗, 그게 아니고, 제가 대학 학부생이었을 때. -_- 문장을 좀 손봐야겠군요.

2007-11-12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탁석산님이 오늘(2008.08.22) ebs에서 '건국 60주년, 역사, 미래를 말하다'의 강사로 강연을 하시더군요. 잘 몰랐던 분인데 흥미로운 발언들을 하시고 명료하고 통쾌한 면도 가지고 계시더군요. 아슬아슬한 재담꾼이기도 하시구요. 해서 알라딘 검색창에서 '탁석산'을 치고 책검색을 하였는데 아프라삭스님의 정성어린 리뷰가 달려있더군요. 독서량이 참 대단하시군요. 즐겨찾는 서재에 처음으로 아프락삭스님을 등록해봤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마늘빵 2008-08-23 10:17   좋아요 0 | URL
헉! 아니 탁석산이 건국 60년 어쩌구 하는 강연을 했다고요? 이거 뉴라이트 계열과 같이 행동하시는건가요? 탁석산을 순수한 우파 정도로 생각했던 제가 착각한건가요. 아니면 건국 60년 주제이지만 뉴라이트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강연인가. 아 궁금하군요. 찾아서 보고 판단해야겠습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20분동안만 강의를 들어 온전히 판단할 순 없지만 '순수한 우파'라는 표현이 (그러고 보니) 어울릴듯 하군요. 인문학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자라고 계속 강조하시던데...참고로 그동안의 이 기획강연에 참석했던 강사님들로는 (제가 본 바로는) 최재천 교수님, 정재승 교수님 등이 있습니다.

마늘빵 2008-08-23 17:06   좋아요 0 | URL
네 꼭 찾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탁석산의 행보는 저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그래도 뉴라이트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우파'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