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요, 찬드라 - 불법 대한민국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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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원한 <여섯개의 시선>의 마지막 작품,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봤다. 이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나중에 보았다. 책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결과는 놀랍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일터에서 다른 이주노동자와 싸우다 거리로 나왔다. 배가 고파 밥을 먹었다. 돈을 잃어버렸다. 말이 안통했던 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찬드라를 데려갔다. 말이 안통하고 행색이 초라해 행려병자로 알고 정신병원에 넣었다. 역시 정신박약, 정신분열에 우울증으로 분류되었다. 

  6년 4개월. 네팔에서 온 이주 노동자 찬드라가 정신병원에서 머문 기간이다. 어떻게 나왔을까. 그나마 개념있는 의사와 간호사를 만나, 아무래도 정말 네팔인 같다고 한국말도 가르치고, 네팔인을 데려와 대화를 시도한 끝에 결국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없이 일하는 경찰과 생각없이 일하는 정신병원 의사와 간호사, 그들만 있으면 누구나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장장 6년 4개월.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나날을 뒤로 하고 찬드라는 결국 네팔로 갔고, 박찬욱 감독은 그곳에 가 영화를 찍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할 줄 아는 한국어는 딱 하나. "유년사개워"

  1993년부터 6년 4개월간 찬드라의 이름은 '선미아'였다. 제 이름과 제 말을 잃어버리고 지낸 악몽 같은 시간들. 감금 당하고 묶이고 하루 세 번씩 스무 개도 넘는 약을 먹어야 했다. 네팔인이라고 말했다. 네팔 사람이라고. Nepal. 어렵지 않다. 그냥 들리는대로 들으면 된다. 그러나 누구도 네팔 사람인지 확인해보려는 시도조차 안했다. 마지막 병원의 의사 말고는. 그녀의 어머니는 네팔에서 실종 소식을 듣고 쓰러져 돌아가셨고, 그녀는 네팔에 돌아간 뒤에도 어머니를 죽인 불효자식이라며 동네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야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네팔 공동체가 네팔인 176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가져왔고, 2001년 재판부는 '국가배상법'상 네팔과 한국이 상호 보증이 있는 경우에만 국가가 배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이 네팔에서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을 경우 배상을 받을 수 있어야 네팔인도 한국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었을 때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참을 기다려 네팔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나, 재판부는 6년 4개월 체류 기간 동안의 수익을 한국 기준이 아닌 네팔 도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계산하라고 요구했다. 찬드라가 네팔에서 일했니? 모두가 분노했다. 그러나 그나마라도 받으려면 재판부가 요구한 자료를 제출해야만 했다. 그거라도 받으려면. 대한민국은 찬드라를 두 번 죽였다.
 
  이 책엔 찬드라 말고도 이와 비슷한 더러운 경험을 한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가득히 실려있다. 그들은 왜 한국에 왔을까. 한국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이주 노동자들 중 과연 몇이나 한국에 대해 좋은 경험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갈까. 손 잘리고, 팔 잘리고, 다리 절고, 때로는 정신병원에 가둬지고, 또 죽고. 대한민국 경제를 밑바닥에서 살리는 이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장님에게 맞아가며, 욕 처먹어가며, 경찰에게 쫓기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신문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라 하여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일부 신문이 약자의 이야기를 싣는다 하지만, 그 약자는 대한민국 국민에 한정된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약자라 부르는 이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코리안 드림을 이루겠다고 희망을 갖고 한국에 들어온 그들은, '불법체류자'의 이름으로 매일을 고달프게 버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일부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고 한다. 아름답고 이쁜 것만 보려고 한다. 그게 몇명이나 되겠어, 그런 일 당하기 싫으면 안오면 되지, 억울하면 선진국 국민으로 태어나라 그래. 이게 이주노동자들을 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이 아닐까. 사람들의 무관심도 슬프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는 더 슬프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진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만 인식했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는지는,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는 관심 없었다. 알지만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보이지 않으니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잘못된 법은 고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들과 같은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모습이 다르고,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다르진 않다. 미국인에 벌벌 기면서 네팔,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사람은 내치는 정부와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옳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지에서 덩치큰 외국인 노동자를 봤다. 시설을 설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덩치가 작은 한국 아저씨들은 그를 발로 차고 욕을 퍼부었다. 빨리빨리 일하라고. 러시아인 같았다. 러시아가 아니라면 러시아 인근의 분리된 나라 사람이 틀림 없었다. 그때 아저씨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무서웠고,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무리 속에 있었다. 캠프파이어를 하기 전이었던 거 같다. 장기자랑 무대를 만드는 것 같았다. 우리가 웃고 즐길 그 무대를 만들기 위해 욕먹고 맞아야 했다. 미안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했고, 나는 무대에 동화되어 곧 축제를 즐겼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었다. 이제 한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저씨, 그도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제 2의 찬드라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그거면 된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것,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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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번째 서평이벤트 우수 서평 수상!
    from 진보생활문예 『삶이 보이는 창』 2008-09-20 17:06 
    '불온서적을 읽자!' 첫번째 서평이벤트에 응모했던 다섯분의 서평을 모두 검토했습니다. 사실 서평은 벌써 읽었는데, 그동안 짬이 안나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만 검토를 할 게 아니라 편집부의 다른분들의 의견도 모두 취합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자, 그럼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두두두두!! 기대하시고!! 결과는 다섯 분 전원에게 상을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따로 순위를 매기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어느정도..
 
 
 
예술이 뭐예요? 철학하는 어린이 (상수리 What 시리즈) 4
오스카 브르니피에 지음, 이효숙 옮김, 레미 쿠르종 그림 / 상수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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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상수리 출판사의 '철학하는 어린이' 시리즈 <함께 사는 게 뭐예요?>를 극찬하는 리뷰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출판사에서 나온 나머지 다른 책들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 봤던 <함께 사는 게 뭐예요?>에 이어 두번째로 접한 책인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검색해보면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두 권이 더 있는데 이것도 마저 읽고 싶다. 지금까지 나온 시리즈 네 권의 글쓴이는 모두 철학 박사이자 교육자라고 소개되어 있는 오스카 브르니피에 라는 사람이고, 그린이만 다르다. 지난 책의 그림과 다른 이번 캐릭터도 귀엽다.

  이 책을 가볍게 음미하며 읽는다해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한 쪽만 가지고 하루를 읽을 수도 있다. 왜냐면 이 책의 텍스트는 철학적 질문으로 가득하니까. 그 질문 하나에 멈춰서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답을 내놓으려 하면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다. 먼저, 나는 다른 단행본 책을 읽듯이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지난 번 책으로 인해) 어떤 방식으로 텍스트가 채워져있을 거란 걸 알기에 이번엔 그 내용을 미리 머리 속으로 떠올려보며 읽었다.

  '예술이 뭐예요?' 라는 커다란 질문 아래 목차는 어떤 물음으로 구성되어 있을까를 생각해보았고, 또 목차를 눈으로 확인한 뒤엔 각각의 제목 아래 어떤 물음들로 채워져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예술이 뭐예요?' 라고 물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해볼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절대적일까 상대적일까, 우리는 무엇을 두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할까, 예술은 아름다움과 어떻게 다를까, 예술은 왜 하는 것일까, 예술은 행위하는 것일까 감상하는 것일까, 등의 생각이 떠올랐고, 그것을 각 목차에 끼워보았다.

  분명 이 책은 집필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읽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지만, 각각의 물음으로부터 다른 물음으로 이어지는 맥락과 줄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열되어 있는 각각의 물음은 모두 바칼로레아 논술 감이다. 하나씩 질문을 던져주고 하루 종일 생각하고 서술할 시간을 주어도 될만큼 일상적이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아무 곳이나 펼쳐놓고 물음 하나를 골라보자. "만약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점을 발견하면 그를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할 건가요?" 당장 할 수 있는 내 대답이다. "......" 

  어른들에겐 '애들 그림책'으로 보일 것이고, 애들에겐 글이 별로 없고 귀여운 그림이 많은 '그냥 그림책'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내겐 대답은 해주지 않지만 고민을 끊임없이 떠안겨주는 재밌는 철학책으로 보인다. 첫 물음으로 시작된 고민은 책장을 넘기며 이어지는 물음을 접할수록 실마리를 찾아간다. 물음과 물음과 물음과 물음과 또 계속되는 물음으로 구성된 텍스트는 대답을 주지 않고 계속되지만, 각각의 물음을 이해하면서 넘어간다면 스스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훗날(?) 애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교육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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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08-1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아프님은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현명한 부모가 되겠죠.
그런 어른들이 만드는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마늘빵 2008-08-16 00:01   좋아요 0 | URL
글쎄 그게... 부모가 될런지도 미지수고,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현명할거 같지는 않다는. 큭큭. -_- 애새끼 혼자 놀게 놔둘지도 몰라요. 울어라 울어!

L.SHIN 2008-08-16 01:19   좋아요 0 | URL
흐하하핫, 무슨 그런 섭한 소릴~
아프님이 설마 아기가 울게 내버려둘까.
그런데 '애새끼'면. 애가 아기를 낳은건가요? +_+

마늘빵 2008-08-16 09:45   좋아요 0 | URL
음... -_-a 제가 애니까 제 애기는 '애새끼'가 될지도... ㅋㅋㅋ

L.SHIN 2008-08-16 15:4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인생고수 - 삶의 열병을 앓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카운슬링
안광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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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 수업과 박사 학위 공부, 글쓰기, 책 집필, 교사 모임 등 참 정신 없는 삶을 살았을 것만 같다. 이 책 앞뒤 어딘가에 안광복 님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하루 일과를 근처에서 목격한 적도 없고,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밖으로 보이는 부분만 놓고 보더라도 엄청 바쁜 삶을 살아왔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손대고 있는 것 중 어느 하나만 꾸준히 하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대단하다.

  <인생고수>는 그가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과 부딪치면서 겪어왔던 바를 바탕으로 하여 그들 개개인에게 해주었던 말을, 혹은 해주고 싶은 말을 한 꼭지 한 꼭지 글로 엮어 내보인 책이다. 학교 현장에서 보는 아이들은 수많은 고민을 갖고 매일을 살아간다. 어떤 아이는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어떤 아이는 성적 때문에, 어떤 아이는 부모님과의 갈등 때문에, 어떤 아이는 여자친구와의 문제 때문에, 어떤 아이는 감옥 같은 학교에 갇혀있는 답답함 때문에 고민을 한다. 항상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지만, 딱히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학교가 싫다고 당장 벗어나자니 학교를 나간 이후가 막막하고, 부모님과 따로 살고 싶지만 가진 것 한 푼 없는 내가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고.

  이 책의 1부는 고단한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2부는 원하는 것 하며 살아가기, 3부는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개의 큰 제목 아래 있는 작은 꼭지들은 10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들의 모든 고민을 포괄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한번씩 고민해보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 널리 적용될 수 있다. 각각의 고민거리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철학자를 끌어들이며 그들이 했던 말을 빌어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고민을 기본 토대로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단순히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을 자기계발서식으로 제목을 만들어 간단하게 살펴보는 별 거 아닌 책이기도 하다. 저자가 선생이 아니고, 책의 컨셉이 학생들의 고민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면. 그런 면에서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단지 안광복 님이기에, 웅진지식하우스이기에 이만큼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책이란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안광복 님이 관심 갖고 있는 '철학상담'에 대한 첫번째 결과물로, 이후에도 그는 철학상담에 관한 책을 내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삶의 열병을 앓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피상담자의 고민을 파고 들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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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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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 <88만원 세대>로 시작된 우석훈의 한국경제 대안시리즈가 막바지 작업을 향하고 있다. 집필은 끝난 듯 하고 출판사에서 마지막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단다.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은 세번째 대안 시리즈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전쟁 없는 평화의 경제학을 이야기한다. 우석훈에 의하면 지금의 불안한 한중일 체제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30년 이내에 평화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극단적으로는 전쟁까지 생각해둬야 한다.

  중국 베이징에서 세계 각국의 선수들과 응원단, 관객들이 모여 축제를 즐기는 동안,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폭격했다. 벌써 2,000명이 사망했고, 수만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루지야 대통령은 군대를 철수하고 휴전을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실세 푸틴 총리는 이명박의 부채질을 받으며 시원하게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의 원인은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인종(민족) 문제, 하나는 석유 자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 석유를 둘러싼 전쟁이 지금보다 더 노골적으로 더 자주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원인은 이 같은 핵심 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인데, 이미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서도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일본은 보통국가라는 가면을 쓰고 세계 곳곳에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는데, 최근 한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영토 분쟁이 그 예다. 한국은 멀쩡한 우리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빼앗길 위험에 처해있고, 중국도 등신 외교를 하는 한국을 얕잡아 보고 이어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있다. 동북공정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등신 소리들어가며 왕따 당한 한국은 결국 빌붙을 곳이 미국 밖에 없는데, 미국 마저도 이런 등신 한국의 상황을 눈치채고서 어떻게 하면 더 빼먹고 버릴까를 고민하고 있는 형국이다.

  결국 중국 옆에 붙어 여기저기서 등신 취급받는 한국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짓은 미국에 들러붙어 떡고물이라도 떼어먹는 방법 밖에는 못찾았는지, 받은 것도 없으면서 미국에서 미친 쇠고기 수입하고, 지도에서 독도를 원상태로 돌려놓는 대신 아프가니스탄 파병 약속을 하고 있다. 이미 이전에 이라크에도 파병시켜 미국의 우방 역할을 톡톡히 하며 욕은 욕대로 다 처먹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군사력이 막강해 미국처럼 석유 자원 있는 곳에 가서 폭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식민지에 해당하는 다른 나라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우석훈은 노무현이 한미FTA 카드를 만지작 거린 것은 이 같은 상황을 벗어날 카드가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제영토의 확장. 그것이 "식민지 경영의 경험도 없고 식민지를 만들어낼 능력도 없으면서, 식민지가 요구되는 제국주의화에서 생존의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한국이 찾은 유일한 소 제국주의를 건설할 선택이었던 것이다. 우석훈은 이것을 '촌놈들의 제국주의'라 명명한다. 제 능력도 안되면서 경제적 제국주의를 건설하고자 하며, 국제 깡패 미국에 들러붙었지만 깡패는 아닌 척 평화를 내세우는 한국이 바로 '촌놈'이다. FTA는 과연 세계적인 흐름이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마지막 선택지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밝은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할 것은, 小美化가 아닌 한중일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잘하는 폭력적인 해외 선교 방식을 국제 관계에 적용했다간 병신되기 십상이다. 한류 열풍도 해외에서 돈 끌어모은다고 좋게만 볼 게 아니다. 일본이고, 중국이고, 베트남이고, 필리핀이고 가서 한국의 가수와 배우들이 돈을 쓸어담으면 '빠'가 된 일부 팬층을 제외한 대다수는 결국 제국주의적인 한국에 反韓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 돈을 쓸어담는다고 그게 언제까지 계속 갈 것도 아니고, 그 시기를 조금 늦춘다고 해서 한류가 제국주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해외로의 경제영토 확장 방식은 한국을 국제 사회에서 왕따로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장기적인 평화를 위한 기반 활동을 구축하는 것이다.

  전쟁은 침체된 국가 경제를 살려주는 좋은(?) 계기가 된다. 미국의 군수산업체는 그동안 만들어둔 무기를 썩히게 되자 꼬투리를 삼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일방적 침공했고, 그간 쌓아두었던 무기를 소모하고 신속하게 만들며 24시간 공장에 불을 켰다. 침체된 미국 경제가 되살아났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뻔한 사실.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국가이고, 해외에 무조건 뭐든 많이 팔아 이윤을 남겨야 성장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니 좁은 땅 덩어리에서 벗어나 해외로 뻗어나가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이 한국땅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경제는 활성화 될 것이다. 과거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한국 전쟁에서 일본이 그 덕을 많이 봤음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나, 전쟁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사회는 매우 슬프다. 경제살리기를 위해 도덕과 윤리를 땅에 파묻은 것도 모자라 경제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사회는, 돈이라면 전쟁에도 참가하겠다는 사람들의 인식은 너무 슬프다. 이미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국민 과반수의 지지로 참전을 결정한 바 있다. 우리에게 뭔가 떡고물이 떨어질 거란 기대하에, 먼 나라에서의 전쟁으로 돈을 만져보고자. 그래서 우석훈은 평화를 위해선 첫째, 전쟁으로 덕을 보게 될 사람들이 직업군의 50%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둘째, 전쟁이 벌어지면 "쫄딱 망한다"라고 할 사람들이 50%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를 기본으로 사회 전반에 평화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평화 산업 없이는 만들어내기 어렵다 한다.

  30년을 잡는다. 우석훈이 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이 30년이요, 경제학에서의 장기가 세 번 반복될 수 있는 기간이 30년이요, 한 시민의 경제활동 기간이 통상적으로 30년이라 한다. 앞으로 30년간 우리는 전쟁보다 평화로 운용될 수 있는 평화 산업을 구축하고, 평화에 대한 사회 전체적인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 단순히 전쟁이냐 평화냐 물었을 때 사람들은 평화를 선택하지만, 그것이 우리땅이 아닌 남의 땅에서의 전쟁이라면, 그 전쟁으로 막대한 이윤을 취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래도 평화를 선택할까 생각해보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단순히 평화냐 전쟁이냐의 물음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우리는 막대한 돈을 버리고서라도 평화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내 피가 아닌 타인의 피라하여 손쉽게 그 길을 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중일과 주변국가의 평화 시스템 구축을 위해 우석훈은,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한 예로 들고 있다.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몇몇 인근 국가에 머물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를 통해 타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문화 습득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 국가만의 공공성이 아닌 전체 시스템에 얽혀있는 다수 국가의 공공성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공공재는 곧 평화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이 실질적으로 '불안한 30년' 이내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 같은 시스템 구축이며, 이를 통해 경제협력과 평화라는 공공재를 동시에 얻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석훈은 자신의 경제 대안 시리즈가 "우리 모두 불행해진다"는 상황인식 위에 서 있다고 말하지만,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88만원 세대>만큼 암울하지 않다. 그건 어쩌면 그가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암울하게 읽기 시작한 이 책을 덮으며 약간의 희망이나마 갖게 된 것은, 정부가, 시민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실현 불가능한 대안이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88만원 세대>에서 결국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구덩이에 빠진 세대의 연대였지만,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는 그보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보여줬다. 이명박식 불도저 정책으로는 국내에서도, 국제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소통하지 않는 불도저식 제국주의는 결국 주변국가와의 불화와 전쟁을 더 빨리 불러올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전쟁이 시작됐는지도. '이명박과 아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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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2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매지 2008-08-2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ㅎㅎ

이명박과 아이들은 책 같은 거 보기는 할까요? -_-;
요새는 정말 하는 짓이 등신같아서 꼴도 보기 싫어요.

마늘빵 2008-08-22 20:30   좋아요 0 | URL
오 요런! 요새 밑줄만 그어대고 리뷰를 안쓰고 있는데 - 아니 쓸 시간이 별루 없다요. 지쳐서 - 몇 개 쓰지도 않은 리뷰 중에 뽑아줬네요. 좋은 리뷰 꽤 있던데. 이명박과 아이들은 아마도 뉴라이트 교과서 열심히 보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대량 구매해서 정부 기관에 막 뿌려댈지도. -_-

건조기후 2008-08-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리뷰당선 축하해요^^

이 책 얼마 전에 TV 책을 말하다에서 다뤘는데 패널로 진중권 변희재가 나왔더군요. 참여정부 시민사회수석이었다던 박주현인가 하는 분이랑. 책이 책인지라 다분히 정치적인 구도가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토론이 진행될수록 패널 선정이 참 아쉽고 짜증이었지요-_- 에효.

마늘빵 2008-08-23 10:15   좋아요 0 | URL
으흐흣. ^^ 네 저도 그 프로그램 봤어요. 오랫만에. 예전에 탁석산 진행 때 가끔 본 이후 처음이었다요. 너무 짧아요. 좀 더 길게하지. 변희재는 왜 불렀나몰라요. 얘는 진중권이 A라고 말하면 무조건 -A라고 말하는 앤데. 진중권이 없으면 정체성이 무너지는 애죠. 한번 까인거 가지고 삐져서 이후로 그게 마치 자기 정체성인양 뒤집어쓰고서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에요. 안티조선하다가 조선일보에 고정칼럼을 쓰다니. 흐흐흐.

건조기후 2008-08-24 01:31   좋아요 0 | URL
그래서 변희재를 살리에르라고들 했었죠.ㅋ 그러고보니 진행자가 탁석산일 때도 있었네요. 장정일과 김미화가 했던 적도 있고 더 이전엔 박명진도 했었고.. 이 때 박명진은 철학이 조금 빈약해보이긴 했지만 나름 위트도 있고 좋았는데 방통심의위원장이 그 사람인 거 보고 좀 충격 먹었다는.. 알고보니 노무현 탄핵 사건 때도 유명했었나 보더라고요. 쥐구멍이 점점 커져서 집이 곧 무너져버릴 것 같이 위태위태한 기분이네요 요즘엔.

마노아 2008-08-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엄훠! 아프님 올해만 세번째인가요? 리뷰 당선 축하해요! 당선금으로 바로 음반 사는 것 아녜요? ^^

마늘빵 2008-08-23 15:19   좋아요 0 | URL
흐음 올해 세번이라구요? 두번 아닌가... -_-a 기억이... 당선금으로 음반 살 예정이긴 한데 아직 당선금이 안왔어요. 큭큭큭.

픽팍 2008-08-2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한 번 읽어 봐야 겠네염; 지금 88만원 세대를 보고 있는데 거의 다 읽은 지금의소감을 역시 암울하다는 거? ㅋ사회가 어려워도 정신만은 바짝 차려야 되겠다는 것을 실감케 한 책이었어요.
이 책도 한 번 읽어 봐야 겠네염 ㅋ

마늘빵 2008-08-23 16:15   좋아요 0 | URL
네 88만원 세대는 아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려버립니다. -_- 암울하죠. 이것도 그닥 희망적이진 않지만, 그보다는 조금 덜 암울합니다. 아무래도 나름 대책이란 걸 보여주고 있어요. 만병통치약은 아니어도 그래도 길은 있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

네꼬 2008-08-2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늦었어요. 축하해요, 아프님. 너무 자주 당선되는 거 아냐? ^^

마늘빵 2008-08-26 15:50   좋아요 0 | URL
^^ 일년에 한번꼴로 생각했는데, 두번인가요? 이번에가.

순오기 2008-08-2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 당선을 이제서야 봤어요~ 축하합니다!!
아프님의 리뷰만 봐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군요~ 마지막, '이명박과 아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니~~~ 추천입니다!ㅎㅎㅎ

마늘빵 2008-08-26 15:51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그냥 차분히 정리한 리뷰에 불과한데...

감은빛 2008-08-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 당선 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저도 이 책 찜해놓고 아직 못 읽었는데,
읽어야 할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어서어서 정리하고
새로 쌓을 산더미에는 이 책을 꼭 포함 시켜야겠어요!

마늘빵 2008-08-29 09:06   좋아요 0 | URL
^^ 산더미 제일 위에 얹으셔도 됩니다.
 
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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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어느 책에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영화와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식의 책은 그 소재 자체가 식상해져버렸다. 그러나 참 꾸준히도 비슷한 컨셉을 가진 책들이 나오는데 새 책이 담아내는 내용에 따라서 어떤 책은 기존에 나온 수많은 비슷한 책들을 놔두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조용히 나왔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았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단지 이 책이 기존에 나온 '영화와 무엇의 이종교배'식의 다른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배한 씨가 '지리'라는 것이다.

  영화와 물리학, 영화와 과학, 영화와 사회, 영화와 철학 등은 이미 써먹을대로 써먹어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영화와 지리가 만난 책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 조금 색다르긴 했다. 물론 물리학이나 철학 대신 같은 자리에 지리가 들어갔을뿐이라는 점에서는 식상하지만. 지리를 공부하고 지리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 대학교 교수 세 사람이 대학원 시절부터 만나 박사학위를 받는 시점까지 함께 공부하고 답사를 다니면서 유익하고 재밌는 지리책을 하나 써보자 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을 쓰게 되기까지 근 5년간 그들은 영화를 오로지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봤다고 한다. 이거 무지 고통스럽다. 사실 영화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또다른 문화적 재미를 찾기 위해 보기 마련인데, 5년 간 모든 영화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각 영화들에서 지리학적 요소를 끄집어내고자 했다면, 이건 저자들에겐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을 것이다. 자발적인 작업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에겐 '즐거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얹어놓으며 평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간접적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리라. 같은 영화라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의 경우 군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란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어버려 미친 여자의 입장이 되어 감상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과 같이 영화 내용은 잠시 접어둔 채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갯벌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단지 지리학적 지식을 안내하기 위해서 영화를 재료로만 삼은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지역이 물론 저자들이 가장 먼저 관심갖는 부분이긴 하겠지만,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왜 감독이 그 지역을 배경으로 했을까, 를 생각해보면서, 감독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찍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영화 감독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세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왜 여기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추측해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메세지와 닿아있다. 지리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만나는 지점이다.

  가령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카르스트 지형인 것은 주인공들의 "비극적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불규칙적으로 갈라진 깊은 틈과 울퉁불퉁한 표면의 회색빛 돌무더기 위로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황야.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장소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운명을 예언한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지만 지금은 가물가물한 여러 지형의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기본 지식에 대한 간단하고 친절한 해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내 상식이 부족하려니 하고 책보다는 나를 탓해본다. 이 책에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 대표가 미안했던지 머리말에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에 삽입된 영화 사진들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선명하지도 못할 뿐더러 잘 포착한 장면도 아니고, 게다가 사진 테두리의 검은 띠는 어설픈 사진마저 더 어설퍼보이게 만든다. 완성한 글에 어떻게든 시각적 요소를 집어넣고자 툭툭 던져놓은 듯 했다. 이 책의 기본 컨셉이 '영화와 지리'인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에서 에러가 났다.

   대체로 내가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지역이나 지형에 관심가질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봤던 영화를 - 이 책의 재료가 된 영화 중 내가 본 영화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 다시 한번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해줬다는데에서 독서의 의미를 찾는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풀어놨는데, 나아가 이 책으로부터 얻은 영화 속 지리 지식을 토대로 실제 그 지역을 찾아가 본다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그땐 이 책이 여행의 재료가 되겠지. 책은 영화를 재료로 삼고, 여행은 책을 재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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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7-17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이었군요. 얼마 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 볼까말까 하고 있었거든요. 친절한 리뷰에 감사 드려요~~
다시 보니 저자 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이네요. ^^

마늘빵 2008-07-17 08:59   좋아요 0 | URL
엇 저자를 안다구요? 전공영역이 비슷하신가봅니다. 아니면 동종업계? ^^ 별로 기대 안하고 보면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