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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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위험한 일본학'에 무게가 실렸는데, 펼치고보니 그보다는 '기타노 다케시'쪽으로 확 기운다. 기타노 다케시란 인물에 대해선 잘 몰랐고, 지금도 이 책 한 권 읽은 것 외에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저자 소개란에 보면, 기타노 다케시는 47년생으로 페인트공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생운동을 하다 중퇴했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봤으며, '투 비트'로 데뷔해 개그맨으로 유명해졌다.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고, 내친김에 감독까지 했는데 '개그맨'으로보다 '영화 감독'으로, 또 '독설가'로 지금은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듯 하다.  

  불행의 원흉 '20세기의 100인' 세계편과 일본편으로 나누어 냉소와 풍자, 역설 등을 이용하여 독설을 퍼붓고 있는데, 이 사람이 쓴 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굉장히 위험하다. 그가 개그맨이며, 또 독설가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기타노 다케시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보니 나도 읽다가 '응?!' 하고 멈추게 될 때가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북방 영토에는 온천 밖에 없고, "생선도 일본의 어부가 잡는 것보다 러시아 어부가 잡은 걸 사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힐지 모"르니 북방 영토는 필요없다는 주장은, 러시아에선 박수를 받고, 일본 우익들에겐 욕을 바가지로 먹을 발언이다.

  일본 아이돌을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 등지로 수출해서 문화 침략을 하자는 주장(이건 매우 약하다), 제 역할 제대로 못하고 세금만 잔뜩 먹는 대사관도 민영화하자는 주장, 버스납치를 못하게 17세 청소년은 버스에 태우지 말자는 주장, 일본 해산, 오키나와 독립운동, 자식 판매법 등 현실 비판인지 개그인지 헷갈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정쩡한 표정을 짓게 된다. 

 아무래도 '불행의 원흉'에 촛점을 맞춘 탓에 우울하고 슬픈, 때로는 화도 나는 그런 소재들만 다루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기타노 다케시의 풍자와 개그 사이에서 오늘날의 일본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상당수는 십년 전 일본에서 일어났던 것들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한국의 불행한 사건들이 일본을 압도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많이 같고도 다른 일본을 '까는' 영화인 겸 개그맨 겸 독설가의 입을 통해 일본을, 그리고 다시 한국인의 눈으로 이곳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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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킹 베를린 - 천유로 세대의 위험한 선택
소니아 로시 지음, 황현숙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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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다면, 유럽엔 '천 유로 세대'가 있다. 천 유로. 환율 변동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대충 한국 돈으로 100만원 가량이라고 한다. 한국의 물가와 한달 생활비를 유럽에 고스란히 적용할 수는 없고, 유럽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럽이 아니니 동네(?)마다 체감 '천 유로'는 다르겠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젊은 이들의 상당수를 지칭하는 용어임에는 틀림없다. 천 유로 세대의 위험한 선택, 퍼킹 베를린. 대학에 가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온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표지를 넘기고서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이름. 소니아 로시. 설마 본명은 아니겠지? 본명이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먼저 스쳤다. 다행히(?) 본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자 소개를 통해서 그녀의 주변인들은 그녀임을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열아홉 살에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니아는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시간당 임금이 거기서 거기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음란 채팅 알바를 했고, 옷을 벗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 마사지방에 들어갔으며, 또 돈을 더 벌고자 몸을 팔았다.  

  독일에선 성매매가 합법이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을 선택할 수 있었고, 계약 조건에 따라 업소를 옮겨다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마이킹(?)이나 포주의 학대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책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독일에서 섹스를 사고 파는 건 마치 마트에 가서 쥬스를 고르고 돈을 지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매자는 업소에 와서 여자를 고르고, 합당한 값을 치르고 섹스를 한다. 그저 섹스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했다.  

  다시 돌아와서, 소니아는 처음 음란채팅을 하고 옷을 벗을 때까지만 해도 많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 옷도 벗었는데 마사지까지만 하자, 마사지는 하되 섹스는 하지 않겠다, 마사지에 오랄을 했고, 섹스로 넘어갔다. 기왕 섹스할거라면 정식 성매매 업소로 가자, 그리고 결국 성매매 업소에서 일을 하고 나중에는 벌이가 더 나은 업소를 찾아 멀리 떠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는 남자친구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많이 싸우기도 한다.  

  그녀가 꿈꾸는 직장은 성매매 업소가 아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해서 번듯한 직장에 자리를 잡고 싶어했다. 그러나 서빙 알바를 해서는 학비를 충당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 아이까지 낳아버렸다. 딱히 직장이 없는 남자친구는 그녀의 집에 얹혀 살았고,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다른 일을 해서는 도저히 필요한 돈을 벌 수 없었다는 그녀에게 정말 그 길 밖에 없었냐고 묻기는 어렵다. 우리는 소니아를 이해해주는 동시에 다른 '소니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그 전에 또 하나 물어야 할 것은, 이게 과연 문제거리가 되는 일인가, 라는 질문이다. '성노동'의 관점에서는 섹스를 사고 파는 일을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일과 동일하게 본다. 사람이 자신의 손과 발을 이용해 일을 해서 돈을 버나, 동일한 몸의 다른 부위인 성기를 이용해 - 성기뿐 아니라 입 등을 이용한 섹스도 포함해서 - 돈을 버나 어차피 같은 '노동'이라는 시각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니아의 지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읽어나가야 하는데 - 단지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베를린의 높은 학비와 생활비 정도 - 한국의 독자인 나뿐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이건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독일의 슈피겔은 "<퍼킹 베를린>이 출간 직후 단박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한 사실은, 젊고 도전적인 독일의 수많은 여대생들이 이와 같은 위험한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라고 평했다. 분명 자신의 성기를 이용해 섹스 노동을 하는 것과 팔다리를 이용해 노동을 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는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신체에 달려있는 부위라고 해서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며, 별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듯 하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할 것은 자신의 건강한 몸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실험실 생쥐가 되기도 하고, 장기를 팔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실험실 생쥐가 되거나, 장기 매매의 대상이 되거나, 성매매의 대상이 되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는 이유는, 나 역시 성매매는 자신의 팔다리를 이용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켜내야 할 최후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팔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자비한 자본과 권력은 개인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팔 것이 없는 사람들은 제 몸 밖에는 팔 것이 없다. 살긴 살아야겠고, 팔 것은 없다. 이해한다. 그들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자는 말이다. 그러한 선택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우리가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개선시킬 필요도 없다. 내가 가진 지식을 팔거나, 그들이 가진 몸을 팔거나 그건 모두 동일하므로. 하지만, 정말 두 가지가 동일한가, 다시 한번 물어보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우리가 어떤 회사에 취직할까를 고민하는 것과, 그들이 어떤 실험실을 택할까, 어떤 업소를 택할까를 고민하는 것은 분명 차원이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귀면 섹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사귀지 않더라도 눈이 맞고, 마음이 맞으면 섹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에 돈과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매개 없는 자연스러운 섹스'와는 분명 다르고, 돈과 권력의 개입은 우리가 지양해야 할 바이며, 우리의 몸은 지켜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매매에 대한 내 생각이다.  

p.s. 이 책을 읽고서 관점에 따라 높은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부모의 보호 아래 있다가 사회에 갓 나온 젊은이들에 대한 사회 제도적 방안 등을 논할 수도 있다. 언급한 모든 것이 맞물려 있어 함께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나 여러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게 되면 정신 사나울 듯 하여 이 글에선 다른 부분은 가급적 축소하고 성매매에 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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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6-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안녕~
요즘도 바쁘게 지낼 당신, 감기 조심해요.
요즘 감기는 두통이 장난 아닌 듯...-_-

마늘빵 2009-06-01 15:07   좋아요 0 | URL
네. 엘신님 감기 걸리셨구나? 여름 감기 안좋아요. 저는 좀 피곤한거 빼고는 괜찮아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게을러져서... 언능 나아요.

Pisces 2009-06-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에 돈과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매개 없는 자연스러운 섹스'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마늘빵 2009-06-02 22:56   좋아요 0 | URL
첨 뵙습니다. 오히려 진보 쪽에서 우리네 지식이나 팔다리를 이용해서 다 파는데(노동), 성이라고 못 팔거 있냐는 시각을 가진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릴케 현상 2009-06-04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에 보수적인 편인지^^ 깊은 교감을 나누지 않은 사귐 상태에서 섹스하는 것조차도 그닥 긍정하진 않아요. '자유로운 섹스'에 열려 있지 않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없는 자유로운 섹스'라는 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한편으론 아프님 말처럼 예전에 성매매법 얘기로 시끄러울 때 진보쪽 사람들이 자본주의 어쩌구 할 때 좀 난감했었죠.
여하간 머리나쁜 저로선 케 세라...

마늘빵 2009-06-04 11:05   좋아요 0 | URL
저도 물론 교감 없는 섹스는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 사귀지 않는 상태에서도 교감은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전제한거에요. 그런 점에선 저도 많이 자유롭진 않은 듯... '매개'라는 건 결국 돈과 권력인데, 넓게 보면 모든 남녀 관계를 포함한 인간 관계가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이렇게 확장하다보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말처럼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결과를 얻게 되죠.

진보쪽에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성매매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저도 희안합니다. 이건 성매매당에서 이야기해야 할 부분인데.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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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참으로 가혹한 말이다. 철저히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충실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라는 의미다. 굳이 이와 같은 정언 명령 형태로 지침(?)을 내리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충분히 제 이익에 충실하고, 자기 이외에 남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말은,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앞으로 그리해라, 라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정반대의 정언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이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야 할 철학을 제시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기계발, 처세술의 차원에서 제목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 맞다. 이 책은 '이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야 할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다만, 남을 돌보지 않고 제 이익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남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단지 '입으로'가 아닌 '행동으로' 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최근 몇년간 참 많이 들은 용어다. 정확히 뭘 의미하고,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은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며,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삶을 파탄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이 책 곳곳에는 몸으로 체험한 이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여학생들은 제 몸값이 가장 높은 나이에 성매매에 나서며, 일제고사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아이는 모든(?) 서민들의 꿈이자 희망인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이 바뀌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국가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줄 미래의 인적 '자원'이며, 매달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한달살이 하는 직장인들은 단지 회사의 부품일 뿐이다. 부품은 고장나거나 낡으면 버리고 다시 갈면 된다. 직장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하루의 절반 이상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의 부품으로서 존재한다. 그나마라도 이들이 노동자로 인정을 받으면 다행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이들은 노동자인 동시에 자영업자다.  

  "그전까지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그 노동 계약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 집단이 책임지면서 보호해 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이 자영업화하면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질과 성과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지게 된다.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회사는 개인이 내는 성과에 주목하며, 성과를 내지 못한 직원은 쫓겨난다. 개인이 자영업자임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연봉제'이다. 개인은 제 몸을 자원으로 회사와 몸값을 책정하고 계약을 맺는 작은 경영자이며, 이들은 (나이들어서도) 회사와 계약을 맺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 직장에서 하루 절반(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남은 시간엔 영어 공부를 하든, 컴퓨터 자격증을 따든, 뭐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회사는 더이상 이들을 '써주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쓰임을 당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제 몸에 대한 '경영'을 체계적으로 잘 해줘야 한다. 일용직 노동자나 계약직 노동자나 정규직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계약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우리의 자유는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과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한데 비해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널리 보장된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는 '국가'에서 '기업'으로 주인을 바꾸었을 뿐이다. 국가가 우리를 기업에 팔아넘겼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억압과 통제로부터 해방됐지만, 국가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기업을 향한 자발적 노예 상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알아서 각자가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 하지만, 그 책임은 너희들 몫이다. 국가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하나의 선택지를 따르며, 그에 따른 결과를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선택할 자유는 있되, 선택지는 하나인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피해 작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간주된다.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지만, 장기적으로 나 이외의 대다수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암울한 현실을 깨고 나오기 위한 방법은,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연대'와 '투쟁'이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쓰고,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텐데, 그 대답도 '연대'와 '투쟁'이었다.  

  우리의 현실이 앞이 깜깜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겹다 - 언제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원한다. 연대와 투쟁이라니까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건 질문하고 고민하는 자들의 몫이다. 저자는 교육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게 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며,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교육에 동참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정확히 그 반대로만 하면 된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며 방황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삶의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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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엄기호 지음; 낮은산
    from Aromatic, Delicious Scalpel 2009-09-15 22:03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나름 많은 책을 읽고 느끼고 실제하는 현상들을 보아오기에 독후감이라는 제목아래 또다시 이야기하기가 조금 서먹하긴 하다. 자꾸 되풀이되는 듯한 내용에 가만히 앉아 자판만 두드리며...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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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후속작으로 보이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바로 집어든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이 책을 다시 내려놓는 듯 하다. 그건, 사라마구 특유의 쉼표로 이어지는 쉼없는 독특한 문체를 견딜 수 없어서이거나,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을 그려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었다던 지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후자 때문에 책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확실히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고, 장면의 전환도 빠르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전작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 오히려 더 놀랍다.   

  비가 세차게 오는 투표소, 비가 오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투표를 하러오지 않는다. 다른 도시는  상황이 어떤가 해서 조사를 해봤더니, 여기보다는 조금 나은 듯 하다. 아마도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투표율이 매우 저조한 것은. 그러나 절반 이상의 유권자가 백지투표를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백지투표.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 험한 날씨를 뚫고 투표에 참여한 이들이 백지를 냈다는 사실을 믿으란 말인가. 그러나 정말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지 않지만, 인내심을 갖고 소설을 읽어나가면 점점 의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궁금해서라도 책장을 넘긴다.  

  정부는 그들을 버리기로 했다. 백지투표를 한 시민들을. 그래 버렸다. 그 말이 정확하다. 행정부와 사법부, 경찰, 군인 등이 모두 빠져나가고 시민들만 덩그러니 도시에 남았다. 정부는 시민을 버렸다. 그리고, 시민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백지투표를 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왜 했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캐묻는다. 시민들은 그들의 질문에 아무 것도 대답해줄 수 없다. 아는 바가 없으므로. 배후는 없으므로. 지난 촛불 정국 때 이명박 정부는 없는 배후를 자꾸 캐물었다. 이번 용산 참사에서도 또 배후를 묻는다. 배후가 누구냐. 배후는 없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배후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배후는 촛불 공장 사장님이다. 촛불 공장 사장님이 매출을 올려보고자 시민들을 선동했다.  

  급기야 희생량을 찾는다. 처음엔 희생량을 삼을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배후라고 추정했을 뿐이다. 어느날 갑자기 도시를 지배해버린 백색혁명, 그 때 앞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그가 백지투표를 뒤에서 조정했을 것이다. 찾아라. 그리고 심문하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시민들의 백지투표에 당황한 정부가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범인을 찾는 것 뿐이다. 그는 단지 용의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나올 것이 없자 정부는 또다른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를 아예 범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태를 해결하는 매우 간편한 방법이다. 있으면 색출하면 되고, 없으면 만들면 된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 집회를 주도한(?) 단체를 압수수색하고, 그 구성원을 연행했다. 연행하는 경찰이나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면, 그도 잡아갔다. 화나 거리로 나오면 물대포를 쐈고, 곤봉을 휘둘렀다. 물대포에 색소까지 넣어 도망가도 지하철역마다 경찰을 배치해 모두 체포했다. 나는 출근길에 봤다. 시위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하철역에 경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을. 그들은 색소가 묻은 시위자를 찾고 있었다. 용산 참사에서도 그들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거리로 쫓겨나게 생긴,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철거민들을 테러범으로 몰았고, 살아남은 자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희생량으로 삼을 배후를 물색하고 있다.

 사라마구가 한국의 현상황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그려지는 모습들은 너무나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다. 그래서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럼 결론은 어떻게 났을까? 희망적인 것은 우리네 상황과 달리 저들의 무리에 속해 있던 한 사람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고, 절망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되돌릴 순 없었다는 사실이다. 양심적인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비관적인 결말로 끝났다면, 그 양심적인 한 사람조차 없는 우리네 현실은 더더욱 비관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리도 국회, 행정공무원, 경찰, 검찰, 법원, 언론까지 한통속이 되어 잘들 뭉치시는지. 말하고 싶어도 말할 곳이 없는, 없는 자들은 너무나 서글프다.

  양심적인 한 사람이 진실을 알리고자 신문사를 찾았다. 용의자를 범인으로 발표하지 않은 두 신문사 중 한 곳을 찾아, 진실을 보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저들이 범인으로 찍은 이와는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뭘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진실은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음에도 행동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은 모두 회수됐다. 길거리에서 시위에 사용된 방송 장비와 차량을 빌려줬다고 업체 관계자를 잡아가고, 유인물을 찍어내는 단체를 수색하고, 찍어낸 유인물을 압수하는, 심지어 대목만났다고 좋아하며 야밤에 포장마차 운영하던 아줌마, 아저씨까지 조사하는 이 정부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그래도, 작은 희망이나마 있었다. 모두에게 닥친 불행한 사태 속에서도, 상황이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었다. 그러나,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그들이 맞서는 - 아니 맞서지도 못했다 - 정부는 너무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에 저항하기에 그들은 너무나 약했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은 전 작품보다는 후 작품에 더 가깝다. 그래서 더 암울하다. 우리네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지만, 눈 앞에 놓인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보여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선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와도 사람들은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수가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된다. 한번 실수는 5년의 재앙을 부른다. 그 재앙의 현실을 지금 우리는 두 눈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물리적인 폭력이나 연행 등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당하고,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직을 못하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 연봉은 내려가지, 매 끼니마다 밥상에 어떤 음식이 오르는지, 그 음식은 믿고 먹어도 되는지 의심해야 하지,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게 되지, 말해 입만 아프다. 예전에도 없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방법은 하나다. 제정신 못차려서 지금의 화를 불렀다면, 앞으로 남은 4년을 보내고,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힘없는 자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는 유일한 순간이다. 루소가 이런 말을 했다. "국민들은 선거 때에만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는 순간 노예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가 그걸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자유로운 순간, 힘을 가지는 순간, 그 힘을 보여주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너무 멀다. 그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없는 힘을 모아 의사표시를 해줘야 한다. 질질 시간 끌다보면 또 자기들이 지쳐 알아서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우리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넘어지면 끊임없이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아 이놈들 참 끈질기다,하고 생각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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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1-2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건... 자본주의는 끝없는 투쟁으로 살아가는 생명체 같은 건데요...
그 안에... '가진자'들이 똘똘 뭉치기는 아주 쉽지만, 못 가진 자들이 똘똘뭉치는 건, 정말 어렵다는 거죠... 더러운 자본주의...

견찰 놈들이 할 짓이 없어서...
사이버 투표 조작질이나 하고...
이 나라도 막장입니다.

http://blog.daum.net/sequncetodispersion/1288180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equncetodispersion%2F12881800

마늘빵 2009-01-30 00:0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방금 기사 뜬거 봤지만, 진짜 경찰이 아니라 용역이네요. -_- 철거민 내리찍은 애들은 불법용역, 얘네는 합법용역. 안그래도 건조기후님이 100분 토론 사이트에서 투표한다고 올려서 가봤는데, 이상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사실로 드러났군요. 참 쟤네들 할 일 없습니다. 조작이나 하고 있고.

드팀전 2009-01-3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은 눈 뜨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술 한잔 하고 헤롱거리는 제 질문입니다. 햇살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느정도...라는 답변일까요?

마늘빵 2009-01-30 00:05   좋아요 0 | URL
^^ 점수화시키거나 비율로 따진다면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겠지만, 떴냐 감았냐로 나눈다면 떴다고 말할 수는 있을 듯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질문은,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 약자의 아픔을 느끼는가, 부정의에 분노하는가, 등의 질문과도 닿아있는 듯 합니다. 물론 약자가 누구냐, 부정의가 뭐냐, 아픔은 어떻게 느끼냐, 현실이란 뭐냐, 라는 질문을 던지면, 마치 진보냐 보수냐를 나누는 기준만큼이나 모호해지죠. 눈을 더 크게 뜰 수 있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해야겠죠.

드팀전 2009-01-30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눈을 뜬 쪽에 가깝다. 어느 순간 자신이 눈을 뜬 줄 알았더 것조차 눈을 감고 눈을 뜬 것으로 믿었다는 순간이 올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에 대해 믿으십니까? 저는 술 취한 질문이긴 하지만 제 질문의 무게를 생각보다 쉽게 답변하시는게 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끙' 하셨으면 ..좋았으려면만 하는게 제 바람이었지요.

루소의 질문이 선거에 충실하자로 받아들여지십니까? 아니면 선거가 그런 근원적 한계 밖에 못가지 것이니까 그 밖을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늘빵 2009-01-30 00:15   좋아요 0 | URL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그래서 짧고 간단한 질문에 길게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요, 눈을 뜬다는 것에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 듯 합니다. 드팀전님께서 물어오시는 '눈을 뜬다'는 것의 무게가 무거운 만큼 답변하기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한거랍니다. 그 무게에 따라 눈을 감고 있으면서 뜬 걸로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루소의 서술은 단순히 "투표합시다"를 의미하는건 아니죠.

드팀전 2009-01-3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눈을 감았거나 멀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났겠군요.

마늘빵 2009-01-30 00:41   좋아요 0 | URL
간만에 야밤의 댓글을 주고 받습니다. 힘드실 줄 압니다. 어떤 상황인지 안다고는 못하지만, 짐작은 되니까요. 드팀전님이 처하신 현실에서 드팀전님께서 스스로를 감았거나 멀었다고 말씀하시면 그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는, 그보다 더 나은 상황만을 멀리서 보고 있는, 저는 역시 감았거나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위를 좁히지 마시고, 조금 더 열어두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만 먼저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승주나무 2009-01-3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 님의 음주페이퍼, 아니 음주댓글을 보게 되는군요. (요즘 그런 기술도 있군요^^)저도 기냥 들어왔다가 글들을 주섬주섬 보고 있습니다. 마음만큼은 얼근하게 취했구요.
저는 눈과 입의 관계를 보고 있는데, 요즘 눈을 뜨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입은 좀 닫힌 것 같습니다. 쓸 말도 별로 없고 써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는 않습니다. 의무감이 항상 부담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쓰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강해진 것 같습니다. 입이 나의 눈을 표현한다고 할 순 없겠지만 좀 얌전해진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좀 봤다 싶으면 전에 했던 말들이 참 X팔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마늘빵 2009-01-30 00:45   좋아요 0 | URL
승주나무님 오랫만에 뵙네요. 페이퍼 하나 올린건 봤습니다. 요새 몸이 많이 바쁘셔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안으로 밖으로. 요즘 모든 게 위기 상황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언론을 손에 쥐어야 편하니 이쪽으로 힘을 쏟겠지요. 이거 막으시느라 고생하십니다. KBS 기자와 피디들도 제작 거부 운동에 돌입했다죠. 참, 말은 그렇습니다. 예전에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지만, 훗날 보고 있으면 부끄럽죠. 어떻게보면 그건 그때보다 지금 더 나아졌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본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드팀전 2009-01-3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작 거부 자체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일단 노조가 아닌 협회차원에서 제작 거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방송의 힘을 말해줍니다. 제작거부는 곧 철회될 겁니다. 징계 수위를 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파면에서 몇 개월 정직하는 수준으로 말이지요. 회사가 제작 거부라는 액션에 대해 일단 어느 정도 반응을 보였으니 제작거부라는 극단적 수단을 계속 유지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부족함은 있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일입니다.

마늘빵 2009-01-30 09:05   좋아요 0 | URL
날이 밝았네요. 네, 신문 통해서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내용이 실렸더라고요. 징계 수위가 조절됐다고. 언론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하나씩 차례대로 무너지겠죠. 지금까지는 말씀하신대로 잘 막아내고 있는 듯 합니다. 언론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그게 되어야할텐데, 제가 있는 영역에선 거의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아야하는 상황이네요. 그렇게 크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라 대응하기도 쉽지 않고. 또,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일만 하고 있죠. 대화할 소재가 점차 사라지네요. 말해봐야 공감, 동의를 얻지 못하니.

드팀전 2009-01-3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부러운 사람들이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일과 세상을 편안하게 분리시키거나 또는 최소한 그 연결이 없진 않으나 거리가 멀어서 촉수를 곤두세우지 않아도 좋을...또는 먼길을 천천히 준비할 수 있는...

톨스토이가 했던 말 중에 그런게 있답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느니 보단 차라리 아무일도 하지 않는게 낫다.'라구 말이지요.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늘 아침까지 오는군요.

마늘빵 2009-01-30 10:32   좋아요 0 | URL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일만 할 수 있으니 편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거저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일만 할 수가 없죠.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하죠. 다른데 신경쓰이고. 제가 할 수 있는 능력껏 이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막을 수밖에요.

2009-01-30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2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2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방진너 2009-01-3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는 <눈뜬자들의 도시>를 보고 <눈먼자들의 도시>후속작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읽은 사라마구의 문체 때문에 책을 두세장 읽다가 말았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읽으니 다시읽을 용기사 생기네요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9-01-31 22:54   좋아요 0 | URL
첨 뵙습니다. 이어지는 건 맞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4년 이후를 그리고 있어요. 시간상으로. ^^ 근데 내용은 그때 그 상황이 고스란히 이어지지는 않죠. 저는 오늘부터 <동굴> 읽기 시작했습니다. <눈먼>을 읽고 <눈뜬>을 읽으시는 분들 중 상당수가 책을 내려놓는 거 같더라고요. 그 문체를 다시 견딜 수 없고, 이 책은 장면의 전환이 빠르지 않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요. 지금 시국과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영화 비평이 아니다, 담론의 놀이다." 씨네21과의 한 인터뷰에서 진중권이 김혜리 기자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별 생각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씨네21의 연재칼럼이 되었고, 그것이 묶여 책으로 나왔다. 진중권의 말처럼 이 책은 "그림의 밖에 있으면서 그림의 안에 영향을 끼치는 액자처럼, 영화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안쪽으로 간섭을 하는 파레르곤 같은 글쓰기"를 지향한다. 칼럼식으로 쓰여졌던 원고라 각각의 글이 하나의 완결성은 가지지만, 글과 글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래서 글과 글을 모아 목차를 짜면서 '주제'에 따라 인위를 부여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화 비평과는 다르다. 영화의 내용과 주제 중심의 비평이 아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영화 제작에 도입된 기술과 기법들이 영화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구체적으로는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켰는가에 촛점이 맞춰진다.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 내러티브의 구성, 다루어지는 제재와 소재가 달라지고, 제작의 방식과 수용의 모델이 달라지고, 나아가 해석과 비평의 준거까지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소재로 쓰인 영화들이 아니다. 이 영화 목록은 이 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진중권이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을 좀더 수월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재료에 불과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당 영화가 아니라, 해당 영화에 들어있는 디지털 기법과 장치, 그리고 이로부터 인문학적 메세지나 상상력을 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자체의 무게감이나 완성도 등을 떠나 <다이하드 4.0>, <슈렉>,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와 같은 오락 영화들부터 <필로우북>, <시계태엽 오렌지>, <라쇼몽>, <베를린 천사의 시>등의 덜 대중적인 영화들까지 가리지 않고 소재로 삼는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발터 벤야민을 자주 언급한다. "예술에서 혁신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기술에서 나온다." 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진중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중권은 발터 벤야민이 이미 말한 바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몇몇 영화를 대상으로 재해석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벤야민을 접하지 않아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디지털 기법과 기술에 관한 알 수 없는 생소한 용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해서 빠르게 읽히진 않는다. 이 부분이 씨네21에 연재할 때 독자들이 이건 영화 비평도 아닌데다 또 왜 이렇게 어려운게냐, 라는 투덜거림으로 나타난 것 같다.

  영화 <300>에 관한 글을 읽는 동안엔 지난 디워 논쟁이 떠올랐다. 진중권이 <디워>를 까던 때, 네티즌들은 그럼 영화 같지도 않은 <300>은 왜 까지 않느냐고 힐난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중권이 <디워>를 까기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매우 지루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여고생 시집가기>를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중간중간 건너뛰는 듯한 느낌은 '스토리의 부재' 때문이었다. 왜 진중권이 토론에서 언급해 국민 상식이 되어버린 용어가 있지 않은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300>이 가진 '서사의 빈곤'은 어쩌면 비난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어차피 시각적 측면과 서사적 측면은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고, "문학성과 조형성을 어설프게 배합려다가는 자칫 둘 다 산만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300>이 서사의 복잡성을 포기하고 시각적 과잉으로 대신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원작이 본래 만화이니 소설과 달리 플롯의 전개가 단순할 수밖에 없고, 소설의 서사를 만화로 재현하기는 힘들다는 말도 덧붙인다. 대사가 많으면 서사가 복잡해고 치밀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만화를 볼 때 대사가 많으면 짜증을 내고 지루하는 것과 같달까. "이미지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읽기 편한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드러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웃고 즐겼던 <슈렉>에서는 하이퍼리얼 효과를, 머리 아프게 봤던 <나비효과>와 <메멘토>를 통해서는 공간적으로 평행한 여섯 개의 가능태들과 기억의 조작과 사건의 연속성에 관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서는 영화의 촉각성을, <다이하드 4.0>을 통해서는 '보기'와 '보여짐'의 권력관계를 읽는다.

  여기 언급된 영화들을 다 봤다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는 영화를 말할 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는 챙겨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보기'하면서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되겠다. 이 글은 진중권 개인이 자신이 가진 지식과 식견으로 영화와 기술과 인문학을 버무린 결과물이고, 각각의 개개인은 또 제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으로 다른 '버무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객에 따라 참 다양하고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다른 문화 매체에 비해 훨씬 열려있는 텍스트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도 없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이 책은 진중권의 담론 놀이의 결과물이고, 나머지는 독자, 아니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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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1-2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보다가 필받아서 여기 나온 영화들 다시 봤지 뭐예요 ㅋㅋ

마늘빵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어헛, 어떤걸 봤길래? ^^ 꼭지별로 읽고서 영화 하나씩 찾아 봐도 좋을듯.

프레이야 2009-01-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마늘빵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