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오늘 오후 삼성특검 발표가 났다. 결과야 신문, 티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대로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사제단을 비롯한 이 책에 등장하는 김상조, 노회찬,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은 모두 그간 뻘짓하느라 고생했다. 어떡하냐, 그렇게 뻘짓했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고. 삼성은 굳이 애써 돈 들여가며 변호사를 고용할 필요도 없이 정부가 국선 변호사를 고용해 열심히 해준 결과를 얻어냈고, 뭐 이건희 회장와 사모님, 아들내미가 티비에 얼굴 좀 비춰주고, 검찰청에 왔다갔다 발품 좀 팔긴 했지만, 택시비도 안드니깐 뭐 손해볼거야 없지. 누구는 티비에 얼굴 한 번 내보이고자 몸도 파는 세상인데, 공짜로 얼굴 보여주고 얼마나 좋냐 그래. 

  손문상 화백이 이건희와 이재용 캐리커쳐를 왕관까지 씌워줘가며 참 멋지게 그려줬는데, 손문상 화백이 왕관을 씌워줘서 결과가 이렇게 나온게 아닐까. 정말 그런건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보다 더 센 권력이 딱 두 개 있다. 삼성과 김앤장이다. 나란히 두 권력에 대한 비판서가 출간 되었건만, 그저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거나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가보다. "삼성이란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운 사람들 이야기"라는 카피는, '진실'이다. 삼성은 절대 권력이 맞고, 절대 권력이 맞기 때문에 아무리 증거나 나오고, 잘못한 이들이 자백을 하고 해도 쓰러질 수 없는거다. 왜냐면 절대 권력이니까.

  김용철 변호사 이전에 노회찬과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이 오래전부터 참 열심히 싸워줬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언론에는 비춰지지도 않고 서운하게시리. 잠잠하다 싶었는데 삼성의 절대 권력을 나눠먹던 김용철 변호사가 어느날 갑자기 뻥하고 터뜨려 세상의 모든 카메라를 받더니 카메라만 받고 끝났다. 이제부터 김용철 변호사는 조직의 배신자요, 돈 되니까 들어갔다 열심히 돈 받아먹다 돈 안주니까 여지껏 돈 준 회사 해코지한 나쁜 놈이요, 세상의 모든 카메라를 독차지했으니 이기주의자요, 가족보다, 회사보다, 지인보다, 정의를 사랑했으니 가정파괴범이요, 세상에 가족도 친구도 없는 놈이다.

  삼성특검 발표가 나자 어떤 이는 벌써 예언을 하기도 하더라. "속보입니다. 이건희 회장 건강상 이유로 형집행정지" 몇날몇시에 나올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보게 될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휠체어 타고 나와서 건강상의 이유로 형집행이 정지되었다는 기사를, 그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모습을. 그렇게 또 한바탕 시끄러운 사건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갈 것이다. 그리고 삼성은 다시 또 열심히 국가를 지배할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검찰과 국세청과 기타 권력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가 가진 재산을 조금씩 나눠주며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자. 그 옛날 단군왕검의 홍익인간 정신처럼, 세상을 붉고 이롭게, 아니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서.

  짜고치는 고스톱 흥미진진하게 잘 봤다. 프레시안북과 프레시안 기자들,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준 이 책 표지에 이름찍힌 김용철, 사제단, 심상정, 노회찬, 김상조, 이상호, 김성환 모두 수고했다. 짜고치는 고스톱에 흥미를 더해줘서. 냅다 그냥 짜고 치면 보는 사람은 재미없다. 중간에서 딴지도 걸어주고, 씨발씨발 하면서 화도 내고 해야, 아 이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하다, 이런 마음이라도 가져보지. 노회찬, 심상정 두 사람은 그래도 나름 권력을 가졌던(?) 국회의원으로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을텐데, 이제 국회의원 뺏지도 반납하게 됐으니 그것두 힘들게 됐고. 에라이. 당신같은 사람들 없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 뭘 보고, 뭘 믿고 살아가냐.

  김용철 변호사, "너무 힘들어 그만하고 싶다"고, 이제는 지쳤다고 했다는데, 그 정도면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근데 하던 건 마저 하고 쉬었으면 합니다. 거 왜 있잖아요. 해외 언론 BBC나 NHK에 공개하겠다던 그 동영상, 그거라도 마저 찍고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나쁘다. 삼성. 이건희. 참 나쁜 기업이다. 참 나쁜 회장이다. 그냥 잘못한거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벌받고 깔끔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 잘못한거 잘못했다 인정하면 모두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텐데 왜 인정을 안하냐. 그리고 니들 특검. 그게 한다고 한거냐. 증거 다 나왔구만 뭘 인정이 안 돼 안 되긴. 왜 이건희가 인정 안하면 증거 불충분인거야? 증거로서 효력이 없는거야? 그런거야? 에이, 참 못됐다. 어쩜 그래. 돈 없는 내가 그동안 열심히 꼬박꼬박 세금 내줘가면서 조사하라고 응원해줬구만 어떻게 내 돈을 그렇게 써. 얼마 안되는거 기껏해야 니들 밥 값 밖에 안되겠지만. 에이, 그래도 그러는거 아냐.

  애초 터뜨렸던 주요 국가 기관의 수장들에게 들어갔던 뇌물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그러니까 그 뇌물로 국가를 장악하려 했던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이건 뭐 별 것도 아닌 것만 -우리에겐 별 것 맞지만, 삼성에겐 별 것 아닌 - 죄로 인정해서 불구속기소 어쩌고 하는 꼴이라니. 아주 오래전에 지강헌이 했던 그말, 그대로 맞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서, 이제는 말하기조차 민망하고 식상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별 거 있겠어. 돈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인데. 그러니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 청소년의 물질추구욕구지수가 월등히 앞선 1위를 달리지. 맨날 보는게 돈으로 다 해결하는건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얘네들이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도, 돈만 벌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다 얘들을 탓할게 못돼.

  에혀. 그만하자. 리뷰는 잡소리로 대신한다. 절대 권력에 맞서 뻘짓한 이들의 분투기를 꼭 보자. 10년동안 떠들어도 언론에서 안 다뤄주는데 이 책이라도 읽어서 이들의 한 이라도 풀어주자. 책 읽고 이들의 뻘짓에 공감한다면 한두 줄이라도 열심히 뻘짓했다고 써주자. 혹시 블로그 어디에 써놓으면 읽어줄지도 모르니깐. 다음 뻘짓 타자는 누가 될까. 언제까지 다음 타자를 기다려야 할까. 누가 될지 모르지만 김용철, 사제단, 김상조, 노회찬,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보다 더 끈질기고 무식하게 물고 늘어졌으면 한다. 이들보다 더 무대뽀로 들이댈 뻘짓타자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사람들이 한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이들이 대단해보인다.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아서. 나는 절대 권력에 들이대기엔 지은 죄도 많고 해서 언론에서 김용철보다 더 심하게 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섭다.  

 "빨리 양심선언 하라. 그게 살 길이다. 우리가 당신을 죽이자고 이러는건 아니니까. 빨리 양심선언을 해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이정도 되는 재벌이 있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얘기를 할 수 있게 하고, 그걸 토대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자. 노사 갈등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삼성에서는 그 자체가 범죄 수준이다. '페어플레이' 하자는 얘기다. 납치하고, 끌고 가고 하지 말고... 그러면서 건설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이 됐으면 좋겠다." (양심수 김성환)

  바꾸자. 조용히 말하면 안 듣는다. "삼성아, 그러지마라. 형이 비자금 만든다고 패고 국민 우롱한다고 패고. 어떤 이씨 父子는 불법으로 살아가길래 기분나뻐!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놈들이 사열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다." (잉크냄새님)   

p.s. 나는 앙가주망철학네트워크의 토삼성격문 발표 이후로 삼성 불매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불매운동만이 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영상을 제작해 해외 방송사로 내보내겠다는 김용철 변호사와 전 방송국 피디의 작업을 지지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4-1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성건 뭐든 안보고 안 쓰려고 노력합니다. 신문은 3월 1일자로 바꿨고 카드는 진즉에 폐기했고...가전제품도 몽땅 L모 기업이죠.
어제 뉴스보다 요거 나오니까 우리남편 '에잇~C'하면서 채널 확 바꿨는데, 거기서도 나오더라니.ㅠㅠ

마늘빵 2008-04-18 09:32   좋아요 0 | URL
저는 외면하면 더 안 될거 같아서 더 보고 분노하려고 해요. 많이 알고 많이 보고 많이 분노하고 많이 쓰고, 그러면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공감대를 이루어 많은 이들이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삼성카드는 저도 연계된게 하나 있었는데, 알라딘 신한카드였나 뭐였나, 한 번도 쓰지는 않았지만 없애버렸습니다.

마노아 2008-04-1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또 타셔야겠습니다. 같이 버럭버럭! 그래서 저도 애니* 핸드폰 싫어합니다. 죽어라 싸이온..;;;;

마늘빵 2008-04-19 00:05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싸이언으로 바꾸고 문자질 느려졌잖아요. :)
 
디지털 촌수, 변화하는 인간관계 SERI 연구에세이 71
김유정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년이었던가. 처음 피씨통신을 했던게. 컴퓨터를 사니 유니텔 무료이용권을 줬고, 그리하여 달리 가입할 게 없었던 나는 인터넷을 하기 위해 유니텔에 가입했고 오래도록 그곳에서 노닐었다. 대학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록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철학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매일 같이 신기한 세상을 접했다. 그러다가 그 공간에서 떠들던 사람들과도 만나고, 따로 채팅하다가 번개란 것도 해보는 묘한 경험을 많이 했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였던거 같다. 사람을 먼저 만나고 사귀는 것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호하게 된 때가. 글을 보고 만난 사람에게 실망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거 같다. 글은 그 사람을 담아낸다.

  어쨌든, 이렇게 온라인의 인연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글을 통해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그렇게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소개팅이나 미팅보다 - 미팅도 꽤나 했었다 - 글을 통해 만난 인연이 나에겐 훨씬 마음으로 다가왔다. 별 다른 글도 아니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두 남녀가 글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면서, 그 남자 마음엔 그 여자가 어느새 들어앉았다. 비단 그때 뿐만 아니라 이런 경험은 나이를 먹은 이후에 또 있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영화 속에서) 전도연과 한석규가 채팅으로 만나 사랑을 나눈게 99년이었나. 여튼 그런 식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한 둘은 아니었던거 같다.
 
  이 책은, 인터넷 상에서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디지탈 시대의 '관계맺음'에 대해 말한다. 시대의 변화 흐름을 잡아내고, 그 과정에서 인간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리해본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메일과 이동전화의 보편적인 사용, 다시 말하면 디지털 및 모바일에 의존하여 변화하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점차 유비쿼터스 환경으로 전환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또 향후 전개방향을 전망해보려" 한다고.

  저자는 온라인상에서의 소통은 오프라인상에서보다 메세지를 착안하고 구상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반면, 같은 시간대에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이런 의미에서 효율적인 상호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상호 교류를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소통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오프라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지만 말이 오갈 뿐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소통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또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 맺기의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서로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의견 교환이 그만큼 솔직하고, 주고받는 주제나 내용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참여자들은 좀더 자기중심적이 되어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주로 교류를 진행한다. 셋째, 의사 교류를 하는 데 특정 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전개된다. 넷째, 교류 과정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적어서 보다 평등한 참여가 보장된다."
 
  내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 맺음에 있어선, 오프에서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맥이나 학벌, 상대방의 재산 정도, 얼굴이나 몸매의 미추가 거의 완벽하게 배제된다는 장점이 있다. 각자가 사진을 공개하거나 재산이나 학벌 등을 밝히거나 하지 않으면, 각자의 모든 정보는 차단된다. 물론 잡다한 자신의 일상을 떠들다보면 이런저런 정보들이 하나둘씩 노출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위 특징에서 언급하듯 교류과정에서의 독점적 지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오프에서보다 지위나 신분 등으로부터 독립되어 관계맺음에 있어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단점도 있어서, 자기중심의 교류를 하는 경향이 있고, 관계를 심각하게 보지 않은 나머지, 상대를 깊이 배려하지 못하는 면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싫으면 안 보면 그만, 이라는 식의 '관계의 가벼움'이 널리 퍼져있달까. 저자는 인터넷 뿐 아니라 휴대전화까지 다루면서 그와 같은 가벼움을 이야기한다. "이동전화는 사람을 느슨하게 한다. 언제라도 이동전화로 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약속을 정하고 나가지 않으면 상대는 마냥 기다리다 지쳐 잔뜩 화가 난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귀찮으면 핑계를 대고 못간다 통보하면 그만이다. 약속과 관계를 가볍게 여기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관계에 목말라있고 끊임없이 관계를 갈망한다. 동시에 그들은 관계를 가벼이 여긴다. 나 역시 이러한 현대인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관계와 소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소통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은, 따로 떨어져 우주를 부유하는 운석 조각과 같다. 내 의지에 의해서 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내 의지에 의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한 관계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란 인간은 내가 관계맺는 인물들에 의해 규정지어진다. 

  디지털 기기는 관계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시켰지만, 개인을 더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개인에게 많은 선택지를 주었고, 나의 선택에 따라 나의 존재가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온라인을 통해 인연을 맺었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한때 자주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는 남남이 되어버렸고, 다시 만난다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 같다. 관계는 양자 모두 서로에게 충실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한쪽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혹은 무심해지면서 남남이 된다. 아쉬운 인연도 있다. 더 알고 지내고 싶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잠적으로 인해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 사람을 마냥 탓할 수 없는 건, 디지털의 특징 때문인걸 어쩌랴. 하지만 각 개인의 노력으로 그것을 메울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남아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8-04-1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그 사람을 담아낸다."
그런 거 같아요.. 아프락사스님.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게 단점도 많지만
끈적거리지 않아서 좋은 거 같아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 조절이 가능한 듯합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이런 무서운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을 종로의 대형 서점에서 목격했을 때 분명 중고생들을 향해 시험공부에 몰두하여 '수능점수 높은' 대학에 가라는 주문이나 하겠지,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아니었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대형서점 한복판에 수십권씩 자리를 깔고 탑을 쌓아놨을까, 하는 호기심에 열어봤더니 외국인 스님들의 강연을 글로 옮겨 엮은 것이었다. 내 인생의 힘겨운 시기에 나를 위로해주었던 책 <만행, 하버드에게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을 비롯해 무량, 명행, 무심, 무진, 청고 등 한국의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외국인 스님들과 달라이 라마 등으로부터 계를 받은 외국인 스님들의 강연 내용을 번역해 옮겼다.

  책을 읽기 전에 그렇다면, 책 제목인 '공부하다 죽어라'는 두 가지 의미 중 한 가지일 것이다 라고 가정했는데, 하나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자기계발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공부하지 말라는 반대의 메세지를 품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었고, 또 하나는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공부'가 아닌 '수행'을 뜻할 것이다는 가정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제목의 의미는 후자였음을 알았지만, 전자로 봐도 무방하다. 제목은 극단적이고 무섭기까지 하지만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잘 담아내고 있다.

  2003년 초겨울, 대전의 한 절에서 국내외 외국인 스님들이 모여 영어로 대중 법문을 시작했고, 그 법문은 꼬박 일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것을, 법회를 주관한 청아 스님 그리고 류시화 시인이 말을 글로 옮기고, 영어를 한글로 번역해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은 불교 대중서라고 봐야 할 만큼 불교의 기본 이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스님들보다 외국에서 건너온 스님들의 말씀에서 이론적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마음으로 공감하기에는 거리감이 있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각 스님이나 명행, 무량, 무진 스님들의 말씀은 그보다는 인간의 삶과 연관된 철학적 메세지가 주를 이루어 한결 마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특히나 현각 스님의 법문을 읽으면서 옛날 생각이 다시 났는지 심하게 '마음이 움직이기도'(감동) 했다. 전체적으로 스님들의 메세지는, 현실에서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 돈, 명예, 권력 등으로부터 멀어져 수행을 통해 참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집착이 있고, 결국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고통은 생각에서 나오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지란 다만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실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이 영원하며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을 때, 그것이 무지이며 그래서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데서부터 고통은 시작하지 않나 생각한다. 오로지 나만을 놓고 본다면 그 어떤 것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는데, 나에서 나아가 남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 쟤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고 있지, 쟤가 나보다 나은게 뭔데, 내 친구가 이번에 집을 샀는데 집값이 수천만원 올랐다더라, 구두 신상품 나왔는데 너무 이쁘다 꼭 갖고 싶다, 등등의 생각들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교과적인 말이지만 오랜 옛날보다 지금은 고통을 주는 요소들이 너무나 곳곳에 널려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도심지에서 살아서 그런지, 의무교육을 받은 후에 대학과 대학원에서 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주변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그런지, 내가 내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게 고통을 주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스님들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일까. 스님들은 진정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생각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는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걸까. 스님들은 모두 외국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아니면 그곳에 온 한국의 스님들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정말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를 할수록, 사람들을 더 만날수록, 내가 집착하는 요소가 더 많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차라리 의무교육만을 받고 시골 어디 한적한 마을에 가서 마을 사람들하고나 함께 생활하면서 살아간다면 지금과 같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를 고민하고,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디엔가 매어있고, 내 몸조차 가까운 어디로도 떠날 수 없음을 안다. 감각세계를 멀리하고, 나를 버리고 나를 만난다는 것은 내겐 너무나 힘겹다. 그렇다고 스님들의 말씀이 전혀 의미없는 머나먼 세계의 말이라는, 구름 잡는 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분들의 말씀은 당연하고, 옳아보이지만, 그것에 도달하기까지는 지금의 나로선 너무나 멀리 있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나를 닦으려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다보면 서서히 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테니까.

  불교에 관심이 있으면서 절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불교, 삶의 깨달음을 주는 불교로서의 불교를 접하고 싶다. 현각 스님의 책을 통해 마음이 '동(動)'했을 때, 현각 스님을 만나뵙고 싶기도 했다. 결국 아무데도 못가고 방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64년생인 그가 미국에서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한게 1990년,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풀어 책을 쓴게 1999년이다. 우리 나이로 스물일곱의 나이에 출가를 했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그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고민과 생각을 풀어 썼다. 그로부터 또 9년이 흘렀다. 그의 책을 접한 때가 2000년,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참나를 찾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집착하는 나를 버릴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이 책은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마음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그런 책을 원한다면 절판된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접하기를 바란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스님들의 법문을 현장에서 경험했다면 조금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깊은 마음의 움직임을 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독자에 따라 어떤 글줄을 읽다가 멈춰서서 생각에 잠길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스님들의 법문을 한데 모아 짧게 엮다보니 지면의 한계로 메세지가 깊이 전달되지 않은 까닭도 있을 것이고, (한국에 머무는 외국 스님들이 아닌) 외국에서 온 스님들의 불교 이론에 관한 해설이 오히려 마음보다 머리로 읽도록 했다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책이며, 이 책을 계기로 한글로 출판된 다른 스님들의 책도 읽어 감동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 접하지 못한 무량스님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논쟁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시점이었다. 고종석에 대한 관심은 복거일로 옮겨갔고, 복거일에 대한 관심은 그로부터 시작된 영어공용화론으로 옮겨갔으며, 이 논쟁에 참여한 학자와 지식인들이 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언어'는 내 안에 들어왔다. 영어공용화론에서 이제는 전 세계 언어의 생성과 사멸에 대해 생각한다. 범위는 넓어졌고 관심은 깊어졌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이와 같은 관심에서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예전에 읽었던 <언어의 죽음>이라는 책과 매우 닮아있다. 논지 전개 방식이며 담아내는 내용까지. 

  <언어의 죽음>에서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전 세계의 언어 분포를 보여주면서, 지구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 수와는 별개로, 수많은 부족들이 존재하고, 부족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언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로부터 뻗어나간 호기심은 그렇다면 언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에 맞춰진다. 그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하나는 자연재해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문화흡수현상 때문이라 한다. 태풍이나 지진, 해일에 의해서 언어사용자가 사라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언어 또한 소멸을 맞이하는 것이 첫번째, "한 문화가 좀 더 지배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특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이 새로운 행동 양식과 습속을 받아들이"며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두번째에 해당한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말하는 언어의 소멸과정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이러한 멸종이 대개 인간의 개입과 관계없이 발생했지만 이제는 인간의 개입을 통해, 특히 인간이 환경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유례 없는 규모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p39) 데이비드 크리스털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자연재해에 의한 언어의 소멸보다는 인간의 개입을 통한 환경 변화에 의한 언어 소멸에 주목한다. 자연재해에 의한 언어소멸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후자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백한 '언어 살해'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들은 이러한 언어 살해의 원인을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오독한 것 아니라면, 저자들이 말하는 언어 살해는 분명 후자에 가깝지만, 전자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 재해로 인한 언어 소멸은 환경의 변화가 곧 언어사용자의 감소로, 그것이 또 결국 언어의 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들에 따르면 현재 언어는 환경에 의해, 생태계의 붕괴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언어의 소멸 과정은 문화흡수현상보다는 자연재해에 의한 소멸과정과 닮아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순수하게 자연에 의해서 언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인간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의해 생태계의 붕괴가 일어나고, 생태계의 붕괴는 결국 언어 사용자의 감소와 언어의 소멸로 이어진다.

  "보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소위 생물언어적 다양성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가 있는 것이다."(p39)

  언어는 분명 죽어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민족담화>에 의하면 "전 세계의 90퍼센트가 가장 많이 쓰이는 백 개의 상위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최소한 6천 개 정도의 언어를 세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수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나머지 언어들은 어디로? 결국 시간을 두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고종석씨에 따르면, 언어는 감염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이 신라나 조선시대의 것과는 분명 다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살아돌아온다해도 우리와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말뿐 아니라 글도 안 통한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언어가 자연스럽게 감염되고, 어떤 언어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는 현상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언어의 감염'과 '언어의 (인위적인) 소멸'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분명 감염되는 것이 맞다. 몇 십년전의 한글 맞춤법과 지금의 한글 맞춤법이 같지 않듯이, 지금의 한국어는 계속해서 감염되고 변화하고 몇십년 후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인위적인 감염'(감염은 엄밀히 인위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감염'이라는 말 자체에 자연스러움이 내포되어 있다.)을 자연스러운 감염과 구분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언어가 변화해가고, 사라질 운명이라면, 그것을 막는 것이 도리다.

  분명, 한국어는 세계 10대 언어 중 하나로,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생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언어가 사라질 예정이 아니라고 해서 현재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언어 살해 행위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언어가 사라진다면 수십 년 뒤에는 한국어가 멀쩡히 살아있을지 몰라도, 수백년 뒤에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살아있은 동안에는 적어도 소멸할 일은 없다, 고 말하시는 분께는 더 말 할 가치를 못 느낀다. 라디오 프로그램 중 '전통의 소리(?)'에서는 지금은 들어보기 힘든 옛 가락과 옛 소리를 할 줄 아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녹음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먼 미래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녹음을 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왜 언어를 지켜내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생긴다. 언어가 소멸되면 다른 언어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한국어를 못하면 영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영어가 또 세력을 잃으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런 맥락과 생각 없이 다양성을 위해서 언어 소멸은 안 된다고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 하지만, 언어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생존과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다.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를 떠올려보라. 만국 공통어로 쓰이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 그게 더 살아가는데 낫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 책의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그 이유를 말한다.

  "인간만의 발명품인 언어는,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문화, 기술, 예술, 음악,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한 것이 언어였다. 모든 인간들이 축적해 놓은 풍요로운 지혜의 원천이 바로 언어이다. 기술은 다른 기술로 대체될 수 있지만,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다양성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다양성의 일부라도 잃게 된다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질 권리, 그 언어를 문화자원으로 보존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다."(p34-35)

  사람은 물론 말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고, 필요하다면 다른 언어를 배워 다른 언어 공동체 내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살아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글이 없어졌을 때, 그것은 비단 언어와 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향유하고 있는 온갖 문화들, 예술, 책, 음악, 시 등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까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아 힘들겠다, 는 생각이 들면,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지켜내면 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먼 미래에 당신이 처할 그 위기를 지금 겪고 있는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면 된다. 그것이 당신이 '살아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논술에 딴지걸다
문우일 지음, 한국논술평가원 감수 / 명진출판사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대학에서 철학과 윤리교육을 전공한 현직 교사가 쓴 논술서다. 보기에 따라서 달리보여 평가를 내리기 애매한 책인데, 나름 철학을 쉽게 풀어 써가며 현실의 문제와 연결시키려 한 흔적이 보이고, 예화를 많이 들어가며 설명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는 그 노력을 인정해주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고등학교 교과서 <윤리와 사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에서는 내용에 크게 신선하거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봐야겠다.

  아무래도 현직 교사인 저자가 수업 시간에 활용했던 예화들을 통해서 <윤리와 사상> 교과서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쓰려 한 것 같은데, 이 책의 내용은 '<윤리와 사상> 더하기 약간의 논리학 이론'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고등학생 입장에서는 대학 논술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를 대략 다시 한번 정리해볼 목적으로 이 책을 빠르게 일독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어느 정도 흐름을 타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으나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예시는 볼만하고, 각 단원의 뒤에 첨부되어 있는 '철학과 함께 하는 논술'의 문제도 철학적 주제를 현실 사회와 연계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애쓴 흔적이 보인다. 교양서도 학습서도 아닌 그 중간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 중간성격을 함께 지니지만 훌륭한 책도 있을 수 있다 -, 실질적인 논리훈련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오래전 책세상에서 나온 탁석산의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나 박우현의 <논리를 모르면 웃을 수도 없다>를, 철학교양물을 읽고 싶다면 명진출판사에서 나온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