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분의 상영 시간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한 여인의 삶을 거슬러 추적한다는 점에서 씨네큐브에서 현재 상영 중인 다른 영화 <사라의 열쇠>와 구조가 닮았다. 두 영화 모두 인상적이고, 아프다.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보는 내내 제발 실화가 아니길 바랐다. 엔딩 크레딧 올라가고 포털에서 검색해본 결과 다행히 실화는 아닌 듯. 결코 예상할 수 없는 탄탄한 스토리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가슴 먹먹해지고 아프다. 미리 검색하지 말고 그냥 가서 관람하시길.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가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세계 곳곳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을 겪어낸 이들이 많기에 각 개인의 인생에 하나씩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독일과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점이 기존에 나온 영화들과 조금 다르다. <그을린 사랑>과 마찬가지로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사라의 열쇠>는 <그을린 사랑>과 달리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 실화에는 별도의 스토리가 필요치 않다. 탄탄한 스토리는 애써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 데서 나온다.  

  보기 전 누군가 내게 건넨 감상평 때문일까. 이 영화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일단 국내 애니메이션치고 이렇게 흥행가도를 달린 작품은 없었다고 했기에 그만큼 또 기대를 했고-사실 배급사가 상영관을 많이 잡은 것도 원인일 것-,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했다. 물론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 애니에 담긴 어머니의 희생 정신, 아낌 없이 주는 나무 정신은 불편하다. '모성 신화'에 관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로 바라볼 수도.  

 
  <혹성 탈출-진화의 시작>. 오래 전에 나온 혹성 탈출 시리즈보다 시간 순서상 앞선 상황을 그린다. 침팬지가 왜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는 스토리.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 가능한 줄거리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뻔한 스토리지만 영상으로 잘 구성했으며, 침팬지의 탈출 장면과 공격 장면은 다른 할리우드 액션 영화 못지 않다. 동물 실험, 동물 보호 차원에서 볼 수도 있다.  

 
  김하늘의 연기로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 영화.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시각 장애인의 입장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장면들이 괜찮았고, 공감이 잘 되었다. 사고로 꿈을 잃었지만 그 꿈을 다른 방식으로 실현하는 주인공과 그로 인해 일이 틀어져버린 한 남자,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구성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관계 설정이 다소 인위적이지만, 각 인물들의 행동이 전혀 어색하지는 않다.  그런대로 개연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고, 영화의 끝까지 잘 유지했다.  

  이런 액션이 가능하구나 싶은 영화. 역사 속 한 장면을 다룬 국내 영화는 꽤 있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사>.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봐줄만 했고, 배우들이 많이 고생했겠다 싶은 영화다. <무사>의 액션은 긴박감도 웅장함도 별로 안겨주지 못했지만, <최종병기 활>은 '활'을 이용한 저격 액션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카메라의 구도나 지형지물을 이용한 격전 등 모자랄 것 없었다. 지금까지 본 한국 액션 장면 중 가장 신선했고, 완벽했다. 사라진 청나라의 고유 언어를 부활시킨 것도 자료 조사,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부분.

  브라질의 쌈바 리듬과 화려한 색채로 귀와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애니. 앵무새가 주인공이고, 그 앵무새의 순탄치 않은 생을 그렸다. 여느 애니와 마찬가지로 악당이 있고, 삶의 굴곡이 있고, 사랑이 있고, 두 번 이상의 어려움이 있다. 또, 여느 애니와 마찬가지로 해피엔딩은 예견되어 있다. 대개의 애니가 이러한 흐름과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소재로 어떤 스토리를 짜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 등장하는 여러 새나 원숭이 등 남미 동물들을 이용해 역할 분담을 잘 하였고,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이것도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밀렵과 동물 보호를 다루고 있달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만족할 만한 영화. 같은 소재를 활용한 한국 영화가 몇몇 있는데, 그 영화들과 특별히 다를 바는 없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떠오르는 영화다. 전체적인 인물 설정이나 배경, 전투 장면들이 닮았고, 스토리는 그보다 좀 부족하다. 6.25 전쟁에서 치열했던 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잡았다.  

 

  자신이 지난 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한 남자.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주변 인물들과 엮이며 사건이 벌어지고, 진실은 그 어디엔가 있다. 관객은 그 진실을, 이 남자와 함께 추적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심리 스릴러'라고 할 수 있고, 생각보다 재미있다. 상영관은 몇 안 될 것. 
  
  

 폭력과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 아버지와 아들이 처한 각각의 상황에서 그들이 대응하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둘 사이에서 복수와 용서, 분노를 생각한다. 우리가 관용해야 할 대상과 행동은 어디까지이며, 폭력에 대해 비폭력 무저항을 고수하는 것이 옳은지, 약자는 인내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지, 영화는 답을 주지 않지만, 관객은 영화를 재료로 삼아 충분히 느끼고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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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11-08-2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상당히 유사하게 보셨군요.지방이라 다양한 영화를 못본 것이 좀 아쉽습니다만 어쨌든 비슷해요. 혹성탈출은 기대만 못했고(ㅎㅎ 파랑이는 좋아했습니다만) 고지전은 전혀 기대를 안하고 봐서 그런지 괜찮게 봤습니다. 목요일에 4개가 한꺼번에 개봉되는데 2개 끊었습니다. 시간 안배하는 것이 너무 힘드네요. 하필 조조도 못보는 시점인지라..
세얼간이는 생각보다 유쾌했구요. 로맨틱크라운은 딱 그정도. 기회되시면 숨도 한번 보셔요.

마늘빵 2011-08-24 08:53   좋아요 0 | URL
최근 볼만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죠. ^^ 파랑이는 스머프인가요? 이것도 보고 싶은데. 부지런히 찾아봐야겠습니다.

반딧불,, 2011-08-24 09:20   좋아요 0 | URL
하하.파랑이는 제 아이라죠^^(레오레오니의 파랑이와 노랑이에서 땄습니다)
스머프는 지나친 기대는 안하시고 그냥 어릴적 기억을 즐긴다 정도?

다락방 2011-08-2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도 봤구나, 그을린 사랑과 사라의 열쇠를. 이 리스트중에 [인 어 베러 월드]가 없어서 아쉬워요. 아프님이 봐도 좋았을 것 같은데.

마늘빵 2011-08-24 09:25   좋아요 0 | URL
응응, 나 인 어 베러 월드 봤어요. 이걸 내가 빼먹었네. 정리하면서. 이것두 완전 좋아요.

다락방 2011-08-24 11:00   좋아요 0 | URL
'우리가 관용해야 할 대상과 행동은 어디까지이며, 폭력에 대해 비폭력 무저항을 고수하는 것이 옳은지, 약자는 인내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지'


나도요. 나도 이런걸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어요. 아프도 그랬구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혹은 책)를 좋아하는건 참 기분 좋은 일인것 같아요. 히히.
 




 갑자기 예전에 재밌게 봤던 그렘린이 떠올라서 토욜 퇴근 후 집에 와서 1,2편을 연달아 봤는데, 이거 대단한 영화였습니다. 전에 봤을 땐 그냥 아 귀여워 귀여워, 이러면서 봤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이건 굉장한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1984년, 1990년 미국에서 나온 그렘린은 지금의 미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는 듯 했달까요.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모습, 그리고 현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렘린 1,2편에서 제가 본 것들을 나열하자면,

* 스포일러 경고

1. 이명박식 불도저 개발계획
- 2편에서 무슨 거대한 센터를 세운다고 포크레인으로 다 찍어누른다. 놀란 우리의 귀염둥이 기즈모는 쭐래쭐래 겨우 도망나오지만. 그곳에서 살겠다고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할아버지 윙이 병으로 죽자 요때다 하고 바로 삽질. 그래도 명박이보다 양심은 있는 게, 떠나지 않겠다는 할아버지 죽고 난 뒤에 포크레인으로 부숴버린다는 거. 살아있을 때는 돈으로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다. 명박이는? 청계천 공사를 떠올리자.

2. 이명박식 친환경 개발
- 우석훈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랬다. 지금의 청계천은 수도꼭지에서 물틀어 연결해놓고, 진짜 청계천은 그 아래 흐르고 있다고. 우리(?)가 데이트 장소로 종종 활용했던 그 청계천은 청계천이 아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 친환경 친환경 하면서 보기 좋은 공원이나 분수나 이런 것들 세우지만, 그건 친환경이 아니다. 그냥 인공환경이지. 나무 있고, 풀 있고, 물이 흐른다고 다 친환경이 아니란 말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3. 효율과 경쟁 시스템 
- 이명박식, 공정택식 경제 논리. 뭐든지 경쟁시키면 다 되는줄 안다. 경쟁 시켜서 올라갈 놈 올라가고 안되는 놈 떨어지고. 클램프 센터의 7단계 승진 시스템. 주인공 촌놈이 클램프 센터에 취직한 후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뭐든지 효율이 최고고, 경쟁이 최고다는 식의 사고.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그렘린 2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4. 유위(有爲)
-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인위적으로 조치를 취하려 하면 안 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된다. 무위가 최선의 해결책이다. 유위의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5. 바보상자 
- 그렘린을 티비를 좋아한다. 부우우우웅 자동차 경주도 좋아하고, 야한 것도 보고, 폭력적인 영화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는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따라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티비를 못보게 한다. 바보상자라고. 맞다. 티비는 바보상자다. 20년전에도 티비는 바보 상자였고, 지금도 바보 상자다. 티비 볼 시간도 없지만, 시간 돼도 티비는 잘 안 본다. 한번 보고 있으면 계속 보게 되는데 얻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다.

6. 80년대 미국은 그래도 살만했다?
- 오늘날의 미국은 살기 안좋은 국가 중 하나. 부자들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닌 듯 하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영화 속 미국 사회는 지금의 한국을 보는 듯 하다. 점차 각박해져가는,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그렇다.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그때는 아직 과도기였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지.  

7.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샐러리맨의 삶 
-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달이 봉급받는 월급쟁이들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장소를 한국으로, 때를 현대로 옮겨놓으면 가장 극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OECD국가 중 근로시간이 압도적 1위인 국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자고, 주말에는 출근하는 삶은 이땅에선 흔히 볼 수 있다. 

8. 유전자 실험 
-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코 좋아할 게 못된다.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막무가내 유전자 실험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각종 유전액(?)을 먹은 그렘린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변해가는가를 2편에서 목격할 수 있다. 바퀴벌레도 웬만해서는 약 먹고 안 죽는다. 예전에는 바퀴약 설치해놓으면 먹고 나와서 헤롱헤롱 거렸는데 요새 바퀴들은 먹어도 도통 발걸음이 느리지 않다. 쌩쌩하니 잘 달리는데 이젠 더 센 약을 뿌리고 먹여야 한다. 약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퀴도 내성이 강해진다. 거기에 아예 유전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돌연변이가 출연한다면? -_-

9. 쉬운 고용과 쉬운 해고
- 클램프 센터는 엄청나게 크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줄곧 5%안에 들어온 수재들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삼성 같달까. 그런데 회사 안을 잘 들여다보면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공부만 잘해 자기 이익은 잘 챙기는 엘리트 유형과 박봉에 시달리며 온갖 굳은 일은 다 하는 소외된 비정규직 유형을 볼 수 있다. 고용된 배우가 투덜대며 문을 박차고 나오고, 일하는 시간에 몰래 담배를 피던 노동자 한 명이 즉각 해고 당한다. 거대 기업은 필요할 때 쉽게 사람을 채용하고, 쉽게 사람을 버린다.

10. 미국 우파 할아버지 
-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사람인 듯 한데, 러시아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우파 할아버지를 잠깐 볼 수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냉혈한들의 모습이 아닌 다정다감한 인간적인 모습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놀라운 발언을 한다. 마치 대한민국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아버리면 바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러시아인이 그런 대상이 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러시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11. 동거 커플 
- 영화는 1990년의 미국. 지금 보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그래도 얼굴은 잘생기고 이쁜 두 남녀가 동거생활을 한다. 같은 직장에 다니고,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결혼은 아직 아닌 두 사람의 동거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동거는 문란함의 극치이다. 어떻게 동거를 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지, 동거를 하느냐 마느냐가 기준이 되어선 곤란하다.

12. 최신식 건물의 잦은 고장 
- 최신식이라고 좋을 게 하나 없다. 과거에 손으로 하던 걸 지금은 손도 안대고 리모콘 버튼만 눌러 실행시키거나 손가락 까딱도 하지 않고 모든 걸 하려고 하는데 그런 물건일수록 고장이 잦다. 한번 고장나면 고칠 수가 없다. 최신식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발상, 수동보다는 자동,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이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 

13. 약한 학생 무차별 폭행, 왕따, 고문
- 영화에 학생은 안나온다. 그런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즈모로부터 나온 나쁜 그렘린들이 약한 기즈모를 어떻게 괴롭히고 학대하는가를 보면 그게 딱 우리네 교실 안 모습이다. 어제 기사였던가 여고생들이 친구 하나를 변기통에 처박고 물을 먹이고 사진을 찍고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어디 하루 이틀 벌이지는 일이랴만. 이런 게 아직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뉴스란 모름지기 일반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데 이런 건 너무 흔하잖아. 폭행하고 왕따시키고 감금하고 전기고문하고. -_-

14. 어리버리한 경찰
-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언제나 경찰은 사건이 다 해결된 뒤에 나타난다. 아니면 해결되지 않고 해결할 수 없는 시점에 나타나거나. 사건종료되고 나타나 어리버리하게 여기저기 부딪치며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경찰들을 이 영화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도처에서 강간이 벌어지고, 시체가 발견되지만 그곳에 경찰은 없다. 권력에 빌붙고 엄한 사람들 잡아가려고 어떻게 법을 적용할까를 고민하느라구. 촛불집회 현장에서 뻘짓하지말고 돈 빼돌리는 교수들, 국회의원들, 기업인들, 정치인들이나 잡아라.

15. 공동체로의 복귀
- 크게 한 탕 벌어지고나서 다행히도(?) 클램프 사장은 깨달음을 얻고 공동체로 가자고 하는데, 내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은 비현실적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고 수습하다가 사장이 깨달음을 얻어 자연과 공동체로의 복귀를 외치는 경우는 없다. 반성하는 척 잠깐 쇼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데 뭐하러 깨달음을 얻어. 권총들이민 한화그룹 회장이나 국가를 지배하려한 삼성그룹 회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갑자기 정의로워지고 착해지는 경우는 없다. 
 
16. 전지적 작가 시점
- 요건 그냥 보너스인데 중간에 깜짝 놀랐다. 영화 끝난 줄 알고. 감독은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찍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영화에 개입했다. 잠시 등장한 그 사람이 감독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굴을 몰라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던 영화가 갑자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깜짝 전환한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17. 총평
- 온갖 사회적 문제를 곳곳에 맛깔나게 버무려 메세지를 잃지 않은, 재밌고 귀엽고 괴기스러운(?) 완벽한 영화다. 이명박과 똘마니들이 함께 모여 감상해야 할 영화. 청와대에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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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핏 듣기로 유럽 어딘가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는데 한국에서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영화 <테이큰>을 봤다. 아마도 흥행의 원인은 최근 발생한 몇 건의 납치사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용은 전혀 모르고 단순히 '납치사건을 다룬 액션영화' 정도로 알고 봤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면서도,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경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액션물이랄까. 액션물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있는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를 단순 액션 영화로 받아들일 수 없는건, 나의 내면의 분노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하고픈 말은, 쌍욕이었다. 개X러새X 같은. -_- 차마 온전히 단어를 다 옮기지는 못하고. 영화 속 주인공 아저씨는 정말 신기에 가까운 80년대식 완전 무술을 선보이시는데, 내가 <람보>나 <다이하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다이하드>는 그래도 아저씨가 많이 맞고 피흘리고 고생하니깐 완벽한 1인 액션으로 보기는 어렵다.) 요즘은 홀로 펼치는 '주먹구구식 만능 액션'보다는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머리쓰며 지능적으로 복수하고 처벌하는 '복합 지능형 액션'이 먹히는데 - 가령 <본 얼티메이텀>시리즈 같은 - 무대뽀 액션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모을 생각을 했다니.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정말 주먹구구식 액션이긴 했지만,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한 주먹에 아홉명씩 떨어져나가는' 액션보다는 아저씨에게 감정이입되어 그 분노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게 되더라. 이 영화를 보면서 작년에 봤던 <호스텔>이 떠올랐는데, 범죄의 대상을 물색하는 방식이 일치한다. 갓 여행 온 파릇파릇한 이쁘장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절을 미끼삼아 꼬드겨내고 납치를 감행, 마약을 수시로 주사해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창녀로 만들거나, 돈 많은 부자에게 경매를 통해 팔아넘긴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이런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말 충분히,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광범위하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어디 신문에 나오고 티비 뉴스에 나와야만 실제로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소위 말하는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사실만을 현실에서 실제 발생하는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매일 새로운 뉴스거리가 쏟아진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사실. 세상엔 정말 개썅욕을 퍼부어도 부족한 놈년들이 가득하다. 뉴스는 오히려 충분히 드러나고 보여지는 사건만을 다루고 있을 것.

  작년이었던가. 동해바단지 서해바단지 모르겠는데, 젊은 남녀 둘이 배를 타고 어딘가를 들어가는데, 배 주인인 할아버지가 남자는 물에 빠뜨려버리고 여자를 성폭행하고 죽였다는 기사를 본 거 같다. 비단 해외 여행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납치-매춘' 사건이라는 사실. 어떤 개인의 잘못된 성적 욕구나 조직적인 범죄나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한 명이 당하느냐, 백 명이 당하느냐의 차이랄까. 공리주의자 벤담이라면 한 명이 당하는 것과 백 명이 당하는 것을 엄연히 일 대 백으로 나누어 후자를 더 큰 죄악으로 간주하겠지만,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는 자체에 우리는 분노해야 할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제일 먼저 내뱉고 싶은 말은 쌍욕이었고, 동시에 아저씨가 결국 주먹구구식 액션으로 모두를 평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깔끔하지 않은건, 그 아저씨가 구하지 못한 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딸들이 마음에 밟혔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딸만 구한 것도 저 상황에선 대단해보이지만, 그럼 남은 여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맹자라면 우선 다급한 상황에서 내 딸이라도 구해보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묵자라면 남은 이들을 두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 자신이 죽는다해도. 어떻게 보면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겠지만, 남은 이들이 끝내 마음에 밟힌다.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분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분노는 권장하고 지속적으로 키워야 한다. 미친소 수입이나 의료보험 민영화나 대운하 건설 같은, 영화 속 인신매매 같은 이따위 것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키워야 한다. 분노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테이큰>. 꼭 봐야 할 영화다. 보고 부정의한 짓거리에 대한 분노를 키워야 한다. 우리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이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분노를 표출해야 할 사안이 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는 감정적인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야 한다. 분노하고 욕을 퍼부어대고 부정의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p.s. 바람직한 분노를 키울 수 있는 개봉 영화 : <식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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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5-04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노를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마샬아츠"를 열심히 수련해야 겠습니다.

마늘빵 2008-05-04 10:13   좋아요 0 | URL
메피님 그건 머에요? 또 새로운 숙제인거에요? :)

Mephistopheles 2008-05-04 19:43   좋아요 0 | URL
저기 무술의 일종이에요...숙제라고 하기엔 좀 과격하다는...ㅋㅋㅋ

마늘빵 2008-05-04 21:1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마샬아츠란 무술이 있군요. 이름이 멋져보이는데요. 얼마나 세길래. 저는 싸움엔 완전 젬병이라는.

순오기 2008-05-04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가진 부모 마음이 딱 그마음입니다. 시사회때 남편과 같이 보고 주위분들에게 많이 권했어요. 영화 '식코'는 아줌마들 동원해 택시 두대로 달려가 봤고요. 영화를 통해 문제의식을 깨우는 것, 정말 필요해요.
어제 지식e 베스트에서 식코도 편집해서 나오기에, 게임하던 아들녀석도 중지시키고 보게 했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야겠지요.

마늘빵 2008-05-04 10:15   좋아요 0 | URL
분노할 것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분노를 바람직하지 못한양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때나 이성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성은 판단할 때나 쓰는 것이고, 대응할 땐 최대한 감정적이 되어야죠. 그 대상이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대라면 더더욱.

Jade 2008-05-0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촛불문화제 전 집회에서 어떤 아주머니 분이 이런 농담을 하셨어요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 천명을 죽이면 영웅, 다 죽이고 이명박 혼자 살아남으면....?

나는 전설이다!"

뜬금없이 생각나서요 ㅋㅋ


이번에 표출된 건강한 분노를 보며 아직 우리사회가 역동적이라는 희망을 느꼈어요! ㅎㅎ

balmas 2008-05-0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를 권장함, 아주 멋진 표어네요. ^^

마늘빵 2008-05-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 그 분 혼자 영화 찍으려나 봅니다. -_- 그래도 스텝은 확보해야할텐데 ( '')
발마스님 / ^^
 
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2007. 7. 31 예스 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6473&ref=82&m_type=0





* 스포일러 경고

  2년전 대한민국의 여름밤을 서늘하게 만들어준 영화 <셔터>를 기억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봤던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가장 무섭고 소름 끼쳤던, 정말 닭살 돋았던, 최고의 영화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남자주인공이 목 아프다고 하던, 체중계에 몸을 실은 뒤 눈금을 보고 놀라던 간호사의 모습이, 어두컴컴한 밤길 여자친구와 차를 몰며 도로를 질주하던 장면, 모두 생생하다. 차마 <셔터>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어디에서 뭐가 나오고, 어떻게 놀래켰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긴 뭣하다. 잠깐 언급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포일러 경고 감이다.

  2년 전의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반종 피산다나쿤과 팍품 웡품 이라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태국의 두 젊은 감독이 두 번째 합작품을 들고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원래는 <셔터> 성공 이후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작품을 준비하려다가 어찌하여 다시 만나 또 한 번의 공포물을 만들게 되었다는데, 어느 인터뷰에서 보니 실은 공포영화보다는 다큐나 드라마 류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아마도 다음 작품은 공포물을 피하지 않을까 생각.

  <샴>을 이미 극장에서 '체험'한 관객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제대로 만든 공포영화다, 는 입장과 전작을 벗어나지 못했다 혹은 뻔한 결말로 치달았다, 라는 입장. 아직 극장가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몇몇 영화 중 한 편으로,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한번 체험해 봐도 실망하진 않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다.



* 핌과 플로이는 참 사이가 좋은 쌍둥이였다. 이들은 팔, 다리가 모두 보통의 사람처럼 두개씩 달렸고 오로지 몸만 붙어있는 상태로 태어났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분리수술을 원하지 않았고 평생을 함께 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샴쌍둥이. 내가 태어난 후로 현재까지 샴쌍둥이를 주변에서 본 적은 없다. 사실 한국에 샴쌍둥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 두 눈으로 바로 앞에서 보게 된다면 좀 섬뜩할지도 모르겠다. <샴>이라는 샴쌍둥이를 소재로 만든 공포 영화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을 보게 되면, 특히 그 사람의 외형이 우리와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 한 번 더 보게 되고, 눈살 찌푸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머리로 생각하고 명령을 내리지만, 충분히 지금도 우리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외형이 이상한 사람을 보고서 주변을 멀리하게 되는 행동양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성의 목소리와 나의 몸뚱아리는 별개로 작동한다.  

  샴쌍둥이는 불완전한 분할로 수정란이 나뉘어져 신체의 일부가 결합된 상태로 태어난 쌍둥이를 일컫는다. 착상 후 분열되는 과정에서 일란성 쌍둥이의 배아가 완전한 분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수정 2주 만에 분리과정이 중지되면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대로 자라나 그 상태로 태어나게 된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렇게 태어날 확률은 10만에서 20만 분의 1 정도라고 하며, 여아가 75% 정도, 남아가 25% 정도 된다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쌍둥이도 여아이다. 

  샴쌍둥이가 맨 처음 발견된 곳은 태국으로, 창과 엥 형제는 신체 일부가 붙은 채 출생하였고, 의사들에게 몸을 분리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당시 의학 수준으로 너무 위험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결국 붙은 채로 63살까지 살았으니 보통 사람의 평균 수명 만큼 산 셈이다. 이후 태국의 옛 이름 siam 에서 따서 siam 쌍둥이라 이름 붙여졌다. 샴쌍둥이는 여러 형태로 태어난다. 머리만 붙어있는 경우도 있고 - 이란에서는 50여 시간의 수술 끝에 한명이 사망했고 다른 한명은 90분간 생존 후 사망했다고 한다 - 몸만 붙은 경우도 있으며, 너무 달라붙어 머리와 팔과 다리가 각각 하나씩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 붙어나든 붙어있으면 샴쌍둥이라 칭하는 것이다.




* 한명은 죽고 한명은 살았다. "내 몸은 떼어냈지만 절대 너를 떠나지 않아..." 


  샴쌍둥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원해 분리수술이 시행됐을 때 대개는 하나가 죽고 하나는 생존한다. 영화 속 핌과 플로이 또한 그랬다. 한 명은 분리수술을 원했고 결국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았다. 살아남은 핌은 이전에 병원에서 만났던 남학생 위와 함께 사랑을 나눴고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홀로 남은 핌이 마음이 편했을리 없다. 공포 영화인지라 수술 중 죽은 플로이가 귀신 되어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공포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핌은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몸은 분명 연결되어있지만 마음은 둘인 샴쌍둥이는 함께 해왔지만 어느 순간 둘이 되었고, 하나만 살아남았다. 영화는 쌍둥이의 심리적 공포와 두려움으로 카메라를 끌어온다. 분명 붙어있을 때도 마음은 둘이었다. 하지만 수술 후 마음도 몸도 둘이 되었을 때 - 둘 다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 그들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서로를 타자로서 대하는 그들은 서로가 친숙하면서도 낯선 타인이다. 

  분리수술을 원한 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귀찮아한다는 뜻이고, 자기도 보통 사람들처럼 하나의 신체를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개체가 둘이 되길 원하고, 현대 의학에 의해 강제로 성공적으로 분리됐다 하더라도, 둘은 하나이다. 몸이 마음이 따로 라고 하여 서로를 타자대하듯 할 수는 없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면 심한 고통을 느낀다. 하물며 한 몸으로 살아오며 함께 이야기하고 놀던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쌍둥이가 내가 원한 분리수술로 인해 죽었다면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공포는 나를 엄습해온다. 죽은 쌍둥이의 귀신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병 때문이다. 나만 살자고, 사랑하는 남자와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나의 일부를 떼어난, 내 몸에 대한, 나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다.  "내 몸은 떼어냈지만 절대 너를 떠나지 않아..." 그건 죽은 쌍둥이가 살아남은 쌍둥이에게 보다는, 살아남은 쌍둥이가 죽은 쌍둥이에게 해야 할 말이다. 
 
  하나의 온전한 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건 세상 모든 샴쌍둥이의 소망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선 다른 하나의 쌍둥이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나마도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하나의 개체가 되길 원한다면 그 정도의 죄책감과 미안함은 생존의 전제조건이어야 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각기 다른 개체로 태어나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이들처럼 평생 붙어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자주 다툰다. 우리는 독립된 신체를 갖고 있음에 감사하고, 독립된 생각을 갖고 있음에 감사하고, 독립된 마음을 갖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한다. 온전히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마음과 생각은 둘인데 몸이 하나인 샴쌍둥이에겐 그저 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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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3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를 무서워하는건 자기의 무의식안에 약간의 상처가 있어서라던데 ..
저는 암튼 공포물을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여름에는 .. 공포물이 !!
샴이라는 영화가 괜찮나봐요.. 아프님 평을 들으니..
@.@~

마늘빵 2007-07-31 17:10   좋아요 0 | URL
저는 공포 잘 보는데 잘 놀라긴 합니다. -_- 의외로 공포영화를 잘 못보는 분들 많습니다. 애, 어른 할 거 없이. 글쎄 상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저는 몰입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 주인공에. 원인이 참 궁금한데 이에 대해 이야기한 글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2007. 7. 18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6349&ref=77&m_type=1




* 스포일러 경고

   분명 다시 확인해봐도 영화 장르는 애정/멜로/로맨스를 벗어날 수 없는데, 영화를 보면 한 가지 장르를 추가해야 할 듯 하다. 미스테리. 이 영화를 보고서 관객이 충격받지 않도록 하려면 장르 명칭을 제대로 붙여야 한다. 멜로/로맨스로 알고 기대했던 영화를 보고 의외의 충격을 받는 관객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싶다. 미스테리 로맨스.

  영화를 무작정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잘나가는 일본의 미스테리/추리물 작가의 동일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번역된 책에 달려있는 별의 갯수와 평가는 영화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별의 갯수가 중요한건 아니고, 그것이 영화를 평가하는 객관적인 척도도 될 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은, 영화를 본 많은 독자와 관객들의 주관적인 평가가 한데 모인 이 결과물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영화 <변신>은 높아진 관객의 기대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고, 소설의 미스테리/추리도, 영화가 추구하려했던 멜로/로맨스도 모두 잡지 못했다.




  * 나루세 준이치(타마키 히로시). 메구미를 사랑했고, 사랑하지 않는건, 내가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았기 때문인가.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건, 달라진건, 내가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았기 때문인가. 생각을 전환하자. 영화를 달리 보자. 주어진 그대로를 바라보지 말자. 뇌이식은 잊어라.

  "타인의 뇌를 이식한 나는 본래의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영화는 어색한 멜로/로맨스의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면서도 끝까지 이 물음을 놓지 않고 있다. 총에 맞아 뇌의 일부가 다쳤고, 마침 십 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에 나올까 말까한 나의 뇌에 딱 들어맞는 뇌가 있다고 하자. 수술대에 올라간 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딱 들어맞는 뇌의 일부를 이식받았고, 몇날며칠을 잠을 잔 끝에 깨어났다. 뇌를 이식받기 전의 나와 이식받은 이후의 나는 동일인물인가. 의학적으로 일부의 뇌만을 이식하고 그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뇌 기증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의 행동습관을 무의식중에 따라하게 된다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의 진리 관계를 떠나 애초의 물음에서 좀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인식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뇌이식을 받기 이전의 나루세 준이치는 메구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수줍고 착한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뇌이식을 받은 이후의 준이치는 메구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귀찮을 따름이고, 그 누구로부터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심지어 옆방에서 떠드는 소리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식칼을 손에 쥐는 등의 살인충동까지 느낀다. 뇌이식을 전후해서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A의 뇌를 B의 뇌로 바꾼다면 A는 B가 될 수 있단 말일까.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인식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심리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통 속의 뇌'라는 걸 가정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라는 책의 '완전한 은둔자' 부분에도 '통 속의 뇌'를 언급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한 사람의 뇌를 육체에서 분리하여 이 뇌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영양액이 담긴 통 속에 옮겨 담았다. 뇌의 각 신경 조직은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고, 이 컴퓨터는 뇌에 전기적 자극을 주어 우리의 감각 경험과 똑같은 질적 정보를 준다. 그 사람(뇌)의 입장에선 환경, 각종 사물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존재하고 또한 완벽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모든 것은 컴퓨터와 신경 세포 간의 전기적 자극의 결과일 뿐이다."

  통 속에 담긴 뇌가 컴퓨터의 전기적 자극에 의해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면, 누군가가 피자를 먹고 있을 때 피자 맛이 나도록 전기 자극을 주고, 손을 들었다고 착각하도록 전기적 자극을 줄 수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지금 가정하고 의심하고 있는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사람들의 뇌를 떼어내 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할 영양분이 담긴 통 속에 집어넣고 이런저런 조작을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모두의 뇌는 각기 다른 통 속에 들어있고 각각의 뇌는 각각의 전기적 자극을 통해서 대화한다고 느끼고, 숨을 쉰다고 느끼고, 생각을 한다고 느낄 수 있다. 지금 자판을 치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나 또한 통 속의 뇌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 몸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두 팔과 두 다리가 두 눈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심지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 참이라 알고 있는 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가. 힐러리 퍼트넘의 '통 속의 뇌'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결국 '통 속의 뇌' 개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현대적 검증이라 할 수 있다.



* 멜로/로맨스라 해서 눈물 쏙 빼겠다 싶었던 영화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으로 관객을 몰고간다. <변신>은 울고 싶지만 웃긴 영화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 여자, 메구미(아오이 유우). 결국 그녀가 받아들여야할 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다. 준이치의 말과 행동과 마음이 달라졌다고 그녀의 준이치에 대한  사랑이 변하는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준이치를 사랑했다.

  영화를 보면 수술대에서 회복 중이던 준이치가 일어나 병원의 다른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뇌와 기증자의 뇌가 통 속에 담긴 것을 보고 구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잘려진 나의 뇌와 잘려진 기증자의 뇌는 모두 투명한 통 속에 잘 보존되어있었다. 그로부터 지금 나는 내 뇌의 일부와 기증자의 뇌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잘려진 일부의 뇌와 잘려진 일부의 뇌가 내 머리 속에 들어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단지 그렇다고 추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통 속에 담긴 두 개의 뇌를 봤고 구토를 했다는 것은 확실한가. 그것도 믿을 수 없다. 투명한 통 속에 담긴 뇌는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통에 붙여진 N.J. 라는 알파벳 약자를 통해 '나루세 준이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조차도 또 거짓. 

  힐러리 퍼트넘의 '통 속의 뇌' 이론을 적용시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루세 준이치의 뇌를 가졌을 때 사물을 인식하는 법과 기증자의 뇌를 가졌을 때 사물을 인식하는 법은 다르다고. 그 또한 조작된 것이라고. 결국 나루세 준이치가 자신의 뇌를 가졌을 때 보였던 행동양식과 가치관이 기증자의 뇌를 가졌을 때 보였던 그것과 다르다고 말 할 수도 없다. 전기적 자극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구미를 향한 준이치의 사랑도, 준이치에 대한 메구미의 사랑도. 

  뇌를 바꾸면 그 사람의 특성도 바뀌는지, 그 사람의 정체성도 바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애초의 물음 "타인의 뇌를 이식한 나는 본래의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그렇다, 아니다, 라는 확실한 답을 내리려하진 말자. 행동의 급격한 변화를 보인 뇌이식 이전의 나루세와 이후의 나루세 뿐 아니라, 뇌이식을 받지 않은 우리 모두 또한 변화하고 있다. '뇌이식'은 잊고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1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의심하라. 내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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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신기루 2007-07-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만을 꺼내놓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통 속의 뇌'는 <매트릭스>와 비슷하네요
인간의 신체를 움직이는 데 사용될 에너지를 기계에 사용하는 대신 가만히 누워있게 만든 인간에게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머릿속으로만 인식하도록 하는 거 잖아요
만약 우리가 정말 매트릭스 안에 사는 거라면, 가상현실 속에서 뇌수술 따위를 하고 그로 인해 인격이 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거겠죠??(이 질문은 약간 생뚱맞은 듯.)
뇌이식에 대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정말 많은데 정리가 안돼요ㅠ_ㅠ

마늘빵 2007-07-1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 다른 식을 전개해나가다가 바꾸지 못한 흔적이 그렇게 남을 줄이야. -_- 수정했습니다.
신기루님 / 모든 것이 의심스럽죠? :) 인간들은 어쩌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 나오는 수많은 개미들 중 하나 일 수도 있어요. ㅋㅋ

마늘빵 2007-07-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데도 하긴하는데, 활동은 잘 안하고 주요 글만 올립니다. 알라딘에서만 '놀아'요.
근데 <변신> 영화 영 아닙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