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1‘

얼마나 오랫동안 읽었던지, 얼마나 여기 저기 들고 다니며 읽었던지, 책이 많이 더러워졌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나는 책을 깨끗하게 읽으려 하고, 책이 깨끗하게 꽂혀진 모습을 좋아한다. 고로 모서리가 닳아지고, 손때로 얼룩덜룩해진 레미제라블 1권이 속상하다. 울적하다.

그렇지만 주교에게는 옛날의 소유물 중에 은식기 여섯 벌과 커다란 스푼 하나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마글루아르 부인은 날마다 허름한 흰 식탁보 위에서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 이 은그릇 외에, 그가 어느 대고모로부터 상속받은 두 개의 커다란 은촛대가 있었다. 평소 이 촛대는 양초가 꽂혀 주교의 벽난로 위에 놓여 있었다. 저녁 식사 손님이 있을 때면, 마글루아르 부인은 양쪽 초에 불을 켜서 두 개의 촛대를 식탁 위에 갖다 놓았다. (46-7쪽)

책 처음부터 계속해서 주교님의 인품과 행동, 그리고 그의 숭고한 성직 수행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여기에 와서야, ‘은그릇’과 ‘은촛대’가 등장하고 나서야, 내가 읽고 있는 ‘레 미제라블’이 내 기억 속 ‘장 발장’ 이야기와 겹쳐지기 시작한다. 속도를 내자.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먼저, 노동자인 나에게 일거리가 없었고, 부지런한 나에게 빵이 없었던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닌가? 다음으로, 과오를 범하고 자백하기는 했지만, 징벌이 가혹하고 과도하지는 않았던가? 범죄인 쪽에서 범행에 잘못이 있었던 것보다도, 법률 쪽에서 형벌에 더 많은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 과중한 형벌은 범죄는 조금도 없애지 못하고, 입장을 뒤집어, 범죄자의 잘못을 억압의 잘못으로 바꾸어 놓고, 죄인을 희생자로 채무자를 채권자로 만들어 놓고, 바로 권리를 침범한 자 쪽에 결정적으로 권리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163쪽)

지독한 가난, 가난한 자에게 더 엄격한 법률,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 탈옥 그리고 과중한 형벌. 이렇게 시골뜨기 '장발장'은 장기 복역수, 중대한 범죄자, 위험한 인물이 되어 간다. 사실 그가 한 나쁜 행동이란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것뿐인데.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그 자신의 잘못이라고만 말하기에는 그의 처지가 너무 안타깝다.

1862년, 장발장의 질문이다.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한겨레 ‘표창원의 죄와 벌’이라는 칼럼의 제목은 이렇다.

‘무기징역+22년 6개월’은 마땅했을까

희대의 흉악범이 등장할 때마다 같이 등장해 범인의 심리를 추리 및 설명해 주었던 국내 최초 범죄심리분석관 ‘표창원’ 교수의 새로운 칼럼 첫 번째 이야기다.

신창원은 15살 때 소년원 감호를 시작으로, 16살엔 절도죄로 검거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22살 때, 공범 3명과 함께 한 주택에서 강도질을 하다가 공범 중 한 명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바람에 ‘강도치사죄’의 공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수감 7년 만에 탈옥을 감행한 신창원은 탈옥 2년 6개월 만에 검거되었다. 이후 기존의 무기징역에 더해 22년 6개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표교수의 지적은 이렇다. 신창원 사건의 경우, 피해자를 살해한 자는 명확히 밝혀졌고, 신창원은 그 살인행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확인되었음에도, 그에게 ‘공동정범‘ (2명이상이 함께 범죄를 저지를 경우)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무기징역‘형을 선고한 것이 정의로운 판결이었을까? 또한 신창원이 태어나 자란 과장에 교육과 복지, 소년사법 등의 국가·사회적 기제가 잘못 작동된 책임은 전혀 없을까? 22년 6개월이라는 추가 형량 역시, ’경찰과 국가제도를 우롱하고 장기간 도주에 성공한‘데 대한 ’괘씸죄‘라는 ’감정‘이 작용한 측면은 없을까? (한겨레신문, 2013년 2월 23일, 표창원의 ’죄와 벌‘)

신창원을 장발장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발장이 사는 사회와 신창원이 사는 사회는 너무나 닮아 있다. 1800년대 프랑스에서 새로운 장발장이 계속 만들어진 것처럼, 2013년 한국에서도 신창원은 이렇게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신창원은 신분세탁이 불가능하기에 ‘마들렌 시장’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차이라 할까.

우리는 떠나오. 떠났소. 우리는 라피트의 품에 안기고 카야르의 날개에 실려 도망하오. 툴루즈의 역마차는 우리를 구렁텅이에서 꺼내 주었소. 그 구렁텅이란, 오, 우리의 귀여운 미인들이여! 그것은 바로 당신들이오. 우리는 사회 속으로, 의무와 질서 속으로 한 시간에 30리씩을 달려 돌아가는 것이요. (261쪽)

한여름밤의 꿈과 같았던 날들이 지나가고, '빅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듯 손 흔들며, 웃으면서 떠나간 그들은 그녀들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긴다.

'우리는 떠나오. 떠났소.'

그들은 떠난다. 어디로부터? 그들의 귀여운 미인들, 구렁텅이로부터. 악의 구렁텅이, 파멸의 구렁텅이, 어둠의 구렁텅이로부터. 그리곤 어디를 향해 가는가? 사회 속으로, 의무와 질서 속으로, 그들이 원하는 자리로, 그들이 갈구하는 모습으로, 점잖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건전하고 도덕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떠났을 때, 이젠 남겨진 그녀들이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그들은 구렁텅이에서 떠나고, 그녀들은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누가 그녀들을 욕할 수 있을까? 왜 사랑의 속삭임에 넘어갔냐고, 왜 그렇게 쉽게 그들을 믿어버렸냐고, 왜 모든 것을 걸고, 육체까지도 걸고 그들을 사랑했냐고, 왜 그렇게 부주의했냐고, 왜 이별을 예상하지 못했냐고, 왜 일의 결국을 가늠하지 못했냐고, 그렇게 그녀들을 탓할 것인가.

의무 속으로 돌아간 남자들에게 돌아오는 건 환대이고, 사랑을 믿어버린 그녀들에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과 모욕 그리고 지독한 가난이다. 팡틴의 운명이 그러했다.

그야 어쨌든, 누구한테 불행이 온들 그것은 추호도 내 탓이 아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뜻이다! 주님이 정하시는 것을 방해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에 간섭하려 하는가? 이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뭐? 어쩐지 후련치가 않다고! 그러면 도대체 내게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허구한 세월 내가 열망해 온 목적, 야밤중의 몽상, 하늘에 축원하던 대상, 일신의 안전, 그것을 나는 달성하고 있다! 주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거다. (397-8쪽)

1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자신을 닮은 샹마티외가 붙잡힌다. 그는 ‘장발장’으로 오인받고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가 ‘장발장’이라는 전제하에 그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다. 샹마티외가 장발장으로 오인받고 감옥에 가게 된다면, 장발장은 남은 생애를 ‘마들렌 시장님’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자베르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장발장은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 믿고 싶다. 주님이 하셨기에 이 일이 가능한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런데...

운명과 인간의 오류가 이루어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것을 막지 않는 것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것에 찬동하는 것은, 요컨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무엇이고 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선적인 비굴의 최후 단계다! 그것은 비열하고, 비겁하고, 엉큼하고, 야비하고, 추악한 죄다! (400쪽)

그 때 그는 하나의 목소리가 자기 속에서 외치는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장 발장! 장 발장!”

그의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는 마치 무슨 무시무시한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오냐, 잘한다! 어서 해라!” 그 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네가 하는 짓을 마저 해라! 그 촛대를 부숴라! 그 기념품을 없애라! 주교를 잊어라! 모든 것을 잊어라! 샹마티외를 죽여라! ... 그럼 됐다. 너는 신사로 있어라, 너는! 시장님으로 머물러 있어라. 명예롭고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어라. 이 도시를 번영시켜라.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려라. 고아들을 길러라. 행복하고 유덕하게 칭송을 받으며 살아라. ... 그 모든 축복은 하늘에 이르기 전에 떨어지고, 오직 저주만이 주님에게까지 올라가리라!” (412-3쪽)

침묵함으로써 운명과 인간의 오류가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려 했던 장발장은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의 바깥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는 소리, 영혼을 팔아 육신의 안락을 취하라는 소리, 모멸과 치욕 대신에 존경과 명예를 선택하라는 소리, 팡틴과 코제트를 도우라는 소리.

장발장은 그 소리를 거부하고, 재판장에 가보기로 결정한다. 마차를 타고, 다른 마차로 갈아타고, 말을 빌리고, 그리고 도보로, 걷고 또 걸어서 재판장에 도달한다. 자신이 ‘몽트뢰유쉬르메르의 시장 마들렌’임을 밝히고 방청권을 얻어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말한다.

“배심원님 여러분, 피고를 석방해 주십시오. 재판장님, 저를 포박해 주십시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저입니다. 제가 장발장입니다.” (485쪽)

인제야 1권이 끝났다. 내가 너무 팡틴에게 빠져 있었나. 1권에서 팡틴이 죽어버리니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싶다. 이후로는 ‘프랑스 혁명사’가 계속 나오는 건지 어쩐건지. 나도 학교다닐때는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서 ‘줄줄이’ 꿰고 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  2권 초반에는 나폴레옹 이야기도 많이 나와서, 다른 책도 찾아봐야 되나 어쩌나 생각중이다.

기다려라, 2, 3, 4, 5. (많이 남았네.)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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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2-2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사두고 아직 시작도 못했어요~~~~ 영화만 보고.
장발장을 만드는 사회, 신창원을 양산하는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지요.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갖게 하는 제도, 없는 자가 더 잃어야하는 사회는 바뀌어야겠지요.

나를 묶어두었던 2012학년도여 안녕, 2월이여 안녕~~~~~ 오늘 이러면서 할랑거려요!^^

단발머리 2013-03-01 14:47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전 이제 겨우 1권이라 앞으로도 기나긴 여정이 기다립니다. 가진 사람들이 더 갖겠다고 난리 치는건 인간 본성에 의거 조금 이해도 되는데, 없는 사람들꺼 빼앗아 가겠다고 할 때는 정말 짜증이 많이 나지요.

이제 3월이예요. 얘들은 월요일에 개학하고요. 그럼 저는 비수기입니다!!! 만세~~~

dd 2013-03-1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읽었습니다 ^^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가 아니라, 아들의 권유에 의해 작성된 리뷰입니다.

1. 명절 3일전

나비님의 서재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헤헤~~ 안녕하세요, 나비님*^^*)

 

 

 

책 표지를 보자마자, ‘헉!’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영어로 된 책이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그림들이란. 잠시 감상의 시간~~

 

 

 

 

 

 

 

 

 

 

 

나도, 아들도 당장 책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알라딘에서는 이 책이 ‘일시품절’, 연휴가 끝나는 12일 이후에나 주문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어쩔 수 없이 타 인터넷서점에서 주문을 했다. 주문하면서 내 책도 한 권 주문했는데, 이는 ''명절 3일 전“이었기에 가능했다.

 

 

 

 끝까지 한 번이나 읽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장담도, 확신도 없이 오직 의심만 가득한 상태에서) 일단 구매를 했다. 영풍문고에서 잠깐 서서 두 챕터를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가는데, ‘역시 스티븐 킹‘이었다. 책이 너무 안 돼서, 어제 두 페이지를 읽었다. 한글로 먼저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한글로 읽으면 영어로는 안 읽게 될 거 같은데. 모르겠다.

 

 

2. 내가 너무 알라딘 서재에서 놀았나

알라딘 서재에 들어가, 글을 읽고, 추천을 누르고, 가끔은 킥킥대는 날 보고는, 어제 아침, 아들이 말했다.

“엄마, 알라딘에서 책 쓰는 거 있잖아~~”

“책? 아, 책 쓰는 거 아니야. 리뷰, 감상이지.”

“그래, 그거. 내 책도 좀 해 줘. 우리 아들 <닌자고> 책을 샀다. 좋아했다. 어쨌다. 그렇게. 내용은 엄마가 알아서 하고.”

“음, 엄마가 그거 하면 좋겠어?”

“응.”

“그래, 알았어.”

그래서, 알라딘에서 구매 안 한 이 책들에 대한 페이퍼를 이렇게 쓰고 있는 거다.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게 아니고, 아들의 권유에 의한 리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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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2-2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아 단발머리님. 초절정 귀여움을 가지고계셨군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3-02-21 18:04   좋아요 0 | URL
귀엽다니요? 저 진지한 사람이예요. 저 알라딘서재에서 책 쓰는 사람이라니까요~~~~~~~~~~~푸핫!

saint236 2013-02-2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의 권유에 의해서...ㅎㅎㅎ 저도 5살난 아들이 닌자고 사달라고 해서 약속은 했는데 이게 왜그리 비싼지...

단발머리 2013-02-21 18:06   좋아요 0 | URL
넹, saint236님도 가격에 훅! 놀라셨군요. 제 아들도 시리즈 몇 개 가지고 있는데, 제 돈으로는 못 사주겠더라구요. 너무 비싸서요. 근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아들 말로는 그게 "꼭 필요하다"고 하네요. T.T
 

 

1. 대학교 2학년, 아니 3학년 때였나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잃어버렸다. 난 너무 억울했는데, 내가 그 책들을 알고 대출한 것도, 읽으려고 대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냥, 대출 가능 권수가 남아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두 권 대출한 거였다. 난 잃어버린 책값을 변상하는 대신, 똑같은 책을 사가겠다고 했다.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읽지도 않은 책 잃어버렸는데, 억울해서라도 읽고 반납할거야!”

내가 도서관에 변상한 책은 두 권이었는데, 한 권은 이름을 잊어 버렸고 (안 읽은 것이 분명하다.) 나머지 한 권이 이 책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7인의 소설집. '왜 쓰는가?‘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한 젊은 소설가들의 대답을 치열한 내면의 기록으로 풀어나가는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끈 꼭지는 함정임의 <동행>이었다.

스물 둘, 아니면 스물 셋, 그 때 난 아직 사랑이 뭔지, 사랑은 어떻게 씨를 뿌려 어떻게 자라는지, 어떻게 물을 줘야 하는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몰랐다. 난 ‘사랑’이란 두 글자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함정임의 글에서는 ‘열매’를 맺은 사랑이, 이제 그 잎을 떨어뜨리고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이, 사랑만큼 소중한 생명과 함께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결림과 통증을 오로지 내 손 끝에 의지한 채 묵묵히 견디고만 있었다. 나는 약도 못 쓰고 시각시각 줄어드는 그의 몸무게를 지켜볼 뿐 주문을 걸 듯 그의 배를 애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시계방향으로 배를 쓸어주되 손끝에만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를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그가 편안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손마디가 뭉그러질 때까지 그의 배를 쓸어주고 또 쓸어줄 텐데... (167쪽)

글을 읽다가 울어버린 적이 언제였던가.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글을 읽고 울고 싶었다.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솟아 올라, 난 막 울고 싶었다. 촉망받는 문인, 아직 젊은 남편, 어린애의 아빠, 어머니의 피같은 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남았다. 남은 자. 남겨진 자.

책을 변상하고 나서, 난 이 책을 샀다. 그 때도 지금처럼 난 도서관 책만 주구장창, 책을 잘 사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책은 굳이 구입했다. 그건, 가끔씩, 아주 가끔씩 나는 ‘함정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나는 남겨진 ‘그녀’가 궁금했다.

2. 울랄라세션 임윤택

이번 주, 수요일이던가 임윤택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우리집엔 텔레비전이 없어서, 난 울랄라세션이란 그룹 이름만 알았지, 그의 얼굴을 처음 본 건 그의 ‘영정’을 통해서였다. 영정 속 고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난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내가 물질로만, 단백질과 기타 여러 물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죽음 후에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는 ‘나’, 사랑하는 ‘나’, 분노하는 ‘나’, 슬퍼하는 ‘나’가 그냥 그렇게 사라진다고 하기에는 지금의 내 느낌이 너무나 뜨겁고 강렬하다.

그래서, 나는 ‘임윤택’의 죽음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음악을 원없이 했고, 오랜 무명생활을 거쳤지만 결국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박수를 받았고, 그렇게 떠났다. 이젠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리라 믿는다.

내 마음을 끄는 건, 임윤택의 남은 ‘그녀’다. 암 말기환자임을 알고도 임윤택을 사랑해 결혼을 결심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은 ‘그녀’가 궁금하다. 결국 이야기는 남은 자들의 것이 아니던가.

3. 다시 함정임

현대백화점 영풍문고에 가 보니,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보였다. 작년부터인가 표지가 바뀌었는데, 연두색 음영으로 보이는 이상의 사진이 산뜻하고 예뻤다. 대상 수상자는 김애란이었다. ‘지난 2005년 소설가 한강이 세웠던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고 이상문학상 대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로 선정’되었단다. 나는 김애란의 문장을 좋아한다. 허걱, 김애란이 1980년생이구나. 아하...

 

 

 

 

 

어서 가자는 딸애의 성화에 김애란의 ‘수상소감’만 읽고 나서려는데, 우수상 수상작 목록에 올려진 그녀의 이름을 보게 됐다.

함정임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

함정임이 어떻게 아픔을 이겨냈는지, 어떻게 살아갔는지 난 잘 모른다. 하지만, 아빠 없는 아이를 혼자 키우기가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쉬이 짐작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아픔은 잊혀지고, 또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녀는 또 다른 삶, 또 다른 글쓰기로 남겨진 자신의 몫을 담당했을테고, 이 단편도 그 작은 결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임윤택의 아내도 그러하기를. 파랗게 젊은 그녀도, 두 살배기 딸아이의 엄마, 그녀도 함정임처럼 잘 이겨내기를, 다시 일어서기를, 또 다른 결실을 맺어가기를. 그러하기를.

그녀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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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2-17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정임이 사랑했던 그남자 '김소진' 이름처럼 육체는 소진되었을지라도 남겨진 그녀와 딸,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독자들에겐 영원히 기억되고 있겠지요. 그중에 나도 살짝 들어있지만...
임윤택의 남겨진 그녀들도 씩씩하게 잘 살아가리라 믿고 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13-02-18 07:34   좋아요 0 | URL
네~~ 순오기님. 임윤택과 결혼한 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씩씩한지 알 수 있어요. 어린 딸아이가 엄마에게 큰 힘이 되리라 믿고, 저도 그녀들을 응원합니다!

월요일이네요. 오늘은 딸롱이 친구들이랑 엄마들이랑 놀러오기로 했어요. 즐건 하루가 될듯합니다.
순오기님도 즐건 월요일 되세요~~~
 

 

1. 싱가폴에서 돌아와 리뷰 좀 올려볼까 했을 때 :

알라딘서재는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 ‘도서정가제’ 때문이었다. 아직도 어쩌자는 건지, 그래서 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양은 얼마 안 되더라도 알라딘에서 주로 책을 구매하는 한 사람으로서, 알라딘 서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알라딘의 ‘성급함’에 대한 대형 출판사들의 ‘담합’은 ‘횡포’로 느껴진다. ‘알라딘이 온라인 서점 1, 2위였다 해도 이렇게 했을까’라는 물음 또한 함께다. 그와 동시에 알라딘 중고서점의 중소도시 진출에 대해선, 반대한다.

2. 요즘엔 신앙서적도 잘 안 읽는데 :

학교 다닐때는 성경은 물론이고, 신앙서적도 한 주에 한 권씩 뚝딱! 잘 읽었는데, 요즘은 신앙서적 초베스트셀러도 잘 읽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김길 목사님의 ‘증언’이었나. 이후로도 책이 여러권 더 나왔던것 같은데.

 

 

 

 

 

아,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말자

나는 삼십대가 된 어느 봄날,

내 마음을 바다보다 문득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깨닫는 순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지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보통 사람은 제작기 자기 생각만 하기에도 바쁩니다.

남 걱정이나 비판도 사실 알고 보면 잠시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내가 모두를 좋아하지 않듯, 모두가 나를 좋아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는, 남을 위한다면서 하는 거의 모든 행위들은

사실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었다는 깨달음입니다.

(중략)

그러니 제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다른 사람에게 크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남 눈치 그만 보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하고 사십시오. (127-9쪽)

사실, 따뜻한 위로의 글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위로를 얻는 곳이 따로 있어서, 굳이 책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 ^^) 그럼에도 이 책을 읽게 된 건, 이 꼭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다. 혜민 스님의 첫번째 깨달음을 읽다보니, 이 책도 생각났다.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욕망해도 괜찮아, 105쪽)

이건 참 간단한 사실 같아도, 이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인생이 행복해진다. 알게 될 때, 편안해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 어제는 '레 미제라블'을 봤다.

 

 

CGV의 상영 예정표에 어제가 상영 마지막 날이라, 얘들 학교에 보내고 바로 극장으로 고고! 오전 8시 50분 조조는 어제의 마지막 상영이자, 어제의 유일한 상영이었다.

나는 노래 듣기를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 보기를 좋아하고,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노래 잘 하는 법에 늘 솔깃하다. 그래서, 중요한 대사가 모두 '노래'로 표현된 이 영화가 싫지 않았다. 앤 서더웨이의 노래가 특히 좋았다. 그래도 내 마음이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는데.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 내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사랑은 괴로움을 가져다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을 때 그게 진짜 사랑 아닌가 싶다.

내일이면 새 날이 열리네! 자유의 깃발을 올려라!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모두 사랑의 전사가 되세! 강하고 용감하게 행군하세!

바리케이트 저 편 어딘가엔 그리던 낙원이 있을까?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아득한 북소리가 들리는가?

저 노래는 그들이 이뤄나갈

미래의 소리!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레미제라블은, 아직도 1권을 읽고 있다. (다락방님, 보지 마세요~~~)

팡틴이 이를 뽑았다. 처참한 그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안 좋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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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2-0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봤어요, 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3-02-07 11:29   좋아요 0 | URL
에잉~~~~~~~~~~~ 어떡해~~~~~~~~~ ㅁㅎㄷ

순오기 2013-02-0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다녀오셨군요, 다뜻한 나라에~ ^^
나는 1월에 혜민스님을 직접 뵈었지요, 강연장에서 불러준 퍼햅스러브 노래도 들었고요~ 헤헤, 자랑질!
레미제라블은 여러가지로 가슴에 남는 영화가 됐어요, 책은 이참에 샀는데 아직 못 열었어요.ㅠ

단발머리 2013-02-08 17:03   좋아요 0 | URL
헤헤헤, 순오기님. 안녕하세요~~ 따뜻한 1월, 무시무시한 2월이예요. 혜민스님을 직접 뵈셨다니, 사뭇 궁금해지네요. 실물과 목소리가... ㅋㅎ 전 지금 레미제라블 1권이예요. 상상 속 팡틴을 화면으로 직접 보니 너무 좋았는데, 근데 어쩌죠. 책이 진도가, 진도가 안 나가요.

명절이라 가족들이 모두 모일테니 순오기님 바쁘시겠네요. 그래도 따뜻한 설이네요.
즐건 설명절되세여~~~
 

돌아온 날 아침, 서울은 영하 7도였다. 아니, 영하 8도였던가.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미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우리 딸롱이는 쉬폰 나시 원피스에 쪼리, 난 핫팬츠에 반팔 차림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담요를 덮을 수 있어 얼마나 추운지 감을 못 잡았는데, 인천에 도착하니, 이건 뭐, 덜덜덜~~ 뿐이었다. 기모티로 갈아입고, 청바지를 입었어도, 여전히, 한국은 추웠다.

나 돌아갈래~~ 가 절로 나왔다.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하고, 그 와중에 어제는 손님들도 한 팀 오셨더랜다. 얼른 책 읽고, 리뷰도 올리고 싶은데, 여전히 짬이 안 난다. 아이들이 방학인지라, 나는야 이른바 ‘성수기’이다.

그저께는 <크라센의 읽기 혁명>을 샀다.

 

 

 

 

 

“읽기는 언어를 배우는 최상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이 책을 사지 않을 수가 있겠나. 일단 구매하고.

어제는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가기 전에 읽다 만, <곰브리치 세계사>를 읽어댔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

 

 

 

 

 

 

 

<레 미제라블>도 3권까지 사 놨는데. 싱가폴에 가져간 1권은 읽지도 못 하고, 책만 더러워져서 초라하게 돌아왔다.

그런데도, 오후에는 아파트문고에 가서 <대위의 딸>을 빌려오다니.

 

 

 

 

 

나 정말 괜찮은거야? 싱가폴하고 한 시간 밖에 차이 안 나는데, 아직도 시차적응 중이냐.

에라, 나도 모르겠다. 일단 잡히는 거 먼저 읽어버리고 말테다.

사진 하나 올려본다. 베이프론트 바깥쪽 전경이다. 과도한 확대가 금물임을 간곡히 부탁드려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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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22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싱가폴은 한국보다는 따뜻하죠?
야경이 참 멋져요.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단발머리 2013-01-22 18:22   좋아요 0 | URL
간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고 왔어요. 소이진님이 반겨주니 진짜 '알라딘'이 고향이네요. *^^* 나의 살던 고향이요~~~ㅋ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