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교 2학년, 아니 3학년 때였나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잃어버렸다. 난 너무 억울했는데, 내가 그 책들을 알고 대출한 것도, 읽으려고 대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냥, 대출 가능 권수가 남아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두 권 대출한 거였다. 난 잃어버린 책값을 변상하는 대신, 똑같은 책을 사가겠다고 했다.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읽지도 않은 책 잃어버렸는데, 억울해서라도 읽고 반납할거야!”

내가 도서관에 변상한 책은 두 권이었는데, 한 권은 이름을 잊어 버렸고 (안 읽은 것이 분명하다.) 나머지 한 권이 이 책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7인의 소설집. '왜 쓰는가?‘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한 젊은 소설가들의 대답을 치열한 내면의 기록으로 풀어나가는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끈 꼭지는 함정임의 <동행>이었다.

스물 둘, 아니면 스물 셋, 그 때 난 아직 사랑이 뭔지, 사랑은 어떻게 씨를 뿌려 어떻게 자라는지, 어떻게 물을 줘야 하는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몰랐다. 난 ‘사랑’이란 두 글자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함정임의 글에서는 ‘열매’를 맺은 사랑이, 이제 그 잎을 떨어뜨리고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이, 사랑만큼 소중한 생명과 함께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결림과 통증을 오로지 내 손 끝에 의지한 채 묵묵히 견디고만 있었다. 나는 약도 못 쓰고 시각시각 줄어드는 그의 몸무게를 지켜볼 뿐 주문을 걸 듯 그의 배를 애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시계방향으로 배를 쓸어주되 손끝에만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를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그가 편안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손마디가 뭉그러질 때까지 그의 배를 쓸어주고 또 쓸어줄 텐데... (167쪽)

글을 읽다가 울어버린 적이 언제였던가.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글을 읽고 울고 싶었다.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솟아 올라, 난 막 울고 싶었다. 촉망받는 문인, 아직 젊은 남편, 어린애의 아빠, 어머니의 피같은 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남았다. 남은 자. 남겨진 자.

책을 변상하고 나서, 난 이 책을 샀다. 그 때도 지금처럼 난 도서관 책만 주구장창, 책을 잘 사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책은 굳이 구입했다. 그건, 가끔씩, 아주 가끔씩 나는 ‘함정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나는 남겨진 ‘그녀’가 궁금했다.

2. 울랄라세션 임윤택

이번 주, 수요일이던가 임윤택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우리집엔 텔레비전이 없어서, 난 울랄라세션이란 그룹 이름만 알았지, 그의 얼굴을 처음 본 건 그의 ‘영정’을 통해서였다. 영정 속 고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난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내가 물질로만, 단백질과 기타 여러 물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죽음 후에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는 ‘나’, 사랑하는 ‘나’, 분노하는 ‘나’, 슬퍼하는 ‘나’가 그냥 그렇게 사라진다고 하기에는 지금의 내 느낌이 너무나 뜨겁고 강렬하다.

그래서, 나는 ‘임윤택’의 죽음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음악을 원없이 했고, 오랜 무명생활을 거쳤지만 결국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박수를 받았고, 그렇게 떠났다. 이젠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리라 믿는다.

내 마음을 끄는 건, 임윤택의 남은 ‘그녀’다. 암 말기환자임을 알고도 임윤택을 사랑해 결혼을 결심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은 ‘그녀’가 궁금하다. 결국 이야기는 남은 자들의 것이 아니던가.

3. 다시 함정임

현대백화점 영풍문고에 가 보니,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보였다. 작년부터인가 표지가 바뀌었는데, 연두색 음영으로 보이는 이상의 사진이 산뜻하고 예뻤다. 대상 수상자는 김애란이었다. ‘지난 2005년 소설가 한강이 세웠던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고 이상문학상 대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로 선정’되었단다. 나는 김애란의 문장을 좋아한다. 허걱, 김애란이 1980년생이구나. 아하...

 

 

 

 

 

어서 가자는 딸애의 성화에 김애란의 ‘수상소감’만 읽고 나서려는데, 우수상 수상작 목록에 올려진 그녀의 이름을 보게 됐다.

함정임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

함정임이 어떻게 아픔을 이겨냈는지, 어떻게 살아갔는지 난 잘 모른다. 하지만, 아빠 없는 아이를 혼자 키우기가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쉬이 짐작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아픔은 잊혀지고, 또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녀는 또 다른 삶, 또 다른 글쓰기로 남겨진 자신의 몫을 담당했을테고, 이 단편도 그 작은 결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임윤택의 아내도 그러하기를. 파랗게 젊은 그녀도, 두 살배기 딸아이의 엄마, 그녀도 함정임처럼 잘 이겨내기를, 다시 일어서기를, 또 다른 결실을 맺어가기를. 그러하기를.

그녀의 건투를 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3-02-17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정임이 사랑했던 그남자 '김소진' 이름처럼 육체는 소진되었을지라도 남겨진 그녀와 딸,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독자들에겐 영원히 기억되고 있겠지요. 그중에 나도 살짝 들어있지만...
임윤택의 남겨진 그녀들도 씩씩하게 잘 살아가리라 믿고 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13-02-18 07:34   좋아요 0 | URL
네~~ 순오기님. 임윤택과 결혼한 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씩씩한지 알 수 있어요. 어린 딸아이가 엄마에게 큰 힘이 되리라 믿고, 저도 그녀들을 응원합니다!

월요일이네요. 오늘은 딸롱이 친구들이랑 엄마들이랑 놀러오기로 했어요. 즐건 하루가 될듯합니다.
순오기님도 즐건 월요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