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1‘

얼마나 오랫동안 읽었던지, 얼마나 여기 저기 들고 다니며 읽었던지, 책이 많이 더러워졌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나는 책을 깨끗하게 읽으려 하고, 책이 깨끗하게 꽂혀진 모습을 좋아한다. 고로 모서리가 닳아지고, 손때로 얼룩덜룩해진 레미제라블 1권이 속상하다. 울적하다.

그렇지만 주교에게는 옛날의 소유물 중에 은식기 여섯 벌과 커다란 스푼 하나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마글루아르 부인은 날마다 허름한 흰 식탁보 위에서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 이 은그릇 외에, 그가 어느 대고모로부터 상속받은 두 개의 커다란 은촛대가 있었다. 평소 이 촛대는 양초가 꽂혀 주교의 벽난로 위에 놓여 있었다. 저녁 식사 손님이 있을 때면, 마글루아르 부인은 양쪽 초에 불을 켜서 두 개의 촛대를 식탁 위에 갖다 놓았다. (46-7쪽)

책 처음부터 계속해서 주교님의 인품과 행동, 그리고 그의 숭고한 성직 수행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여기에 와서야, ‘은그릇’과 ‘은촛대’가 등장하고 나서야, 내가 읽고 있는 ‘레 미제라블’이 내 기억 속 ‘장 발장’ 이야기와 겹쳐지기 시작한다. 속도를 내자.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먼저, 노동자인 나에게 일거리가 없었고, 부지런한 나에게 빵이 없었던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닌가? 다음으로, 과오를 범하고 자백하기는 했지만, 징벌이 가혹하고 과도하지는 않았던가? 범죄인 쪽에서 범행에 잘못이 있었던 것보다도, 법률 쪽에서 형벌에 더 많은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 과중한 형벌은 범죄는 조금도 없애지 못하고, 입장을 뒤집어, 범죄자의 잘못을 억압의 잘못으로 바꾸어 놓고, 죄인을 희생자로 채무자를 채권자로 만들어 놓고, 바로 권리를 침범한 자 쪽에 결정적으로 권리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163쪽)

지독한 가난, 가난한 자에게 더 엄격한 법률,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 탈옥 그리고 과중한 형벌. 이렇게 시골뜨기 '장발장'은 장기 복역수, 중대한 범죄자, 위험한 인물이 되어 간다. 사실 그가 한 나쁜 행동이란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것뿐인데.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그 자신의 잘못이라고만 말하기에는 그의 처지가 너무 안타깝다.

1862년, 장발장의 질문이다.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한겨레 ‘표창원의 죄와 벌’이라는 칼럼의 제목은 이렇다.

‘무기징역+22년 6개월’은 마땅했을까

희대의 흉악범이 등장할 때마다 같이 등장해 범인의 심리를 추리 및 설명해 주었던 국내 최초 범죄심리분석관 ‘표창원’ 교수의 새로운 칼럼 첫 번째 이야기다.

신창원은 15살 때 소년원 감호를 시작으로, 16살엔 절도죄로 검거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22살 때, 공범 3명과 함께 한 주택에서 강도질을 하다가 공범 중 한 명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바람에 ‘강도치사죄’의 공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수감 7년 만에 탈옥을 감행한 신창원은 탈옥 2년 6개월 만에 검거되었다. 이후 기존의 무기징역에 더해 22년 6개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표교수의 지적은 이렇다. 신창원 사건의 경우, 피해자를 살해한 자는 명확히 밝혀졌고, 신창원은 그 살인행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확인되었음에도, 그에게 ‘공동정범‘ (2명이상이 함께 범죄를 저지를 경우)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무기징역‘형을 선고한 것이 정의로운 판결이었을까? 또한 신창원이 태어나 자란 과장에 교육과 복지, 소년사법 등의 국가·사회적 기제가 잘못 작동된 책임은 전혀 없을까? 22년 6개월이라는 추가 형량 역시, ’경찰과 국가제도를 우롱하고 장기간 도주에 성공한‘데 대한 ’괘씸죄‘라는 ’감정‘이 작용한 측면은 없을까? (한겨레신문, 2013년 2월 23일, 표창원의 ’죄와 벌‘)

신창원을 장발장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발장이 사는 사회와 신창원이 사는 사회는 너무나 닮아 있다. 1800년대 프랑스에서 새로운 장발장이 계속 만들어진 것처럼, 2013년 한국에서도 신창원은 이렇게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신창원은 신분세탁이 불가능하기에 ‘마들렌 시장’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차이라 할까.

우리는 떠나오. 떠났소. 우리는 라피트의 품에 안기고 카야르의 날개에 실려 도망하오. 툴루즈의 역마차는 우리를 구렁텅이에서 꺼내 주었소. 그 구렁텅이란, 오, 우리의 귀여운 미인들이여! 그것은 바로 당신들이오. 우리는 사회 속으로, 의무와 질서 속으로 한 시간에 30리씩을 달려 돌아가는 것이요. (261쪽)

한여름밤의 꿈과 같았던 날들이 지나가고, '빅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듯 손 흔들며, 웃으면서 떠나간 그들은 그녀들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긴다.

'우리는 떠나오. 떠났소.'

그들은 떠난다. 어디로부터? 그들의 귀여운 미인들, 구렁텅이로부터. 악의 구렁텅이, 파멸의 구렁텅이, 어둠의 구렁텅이로부터. 그리곤 어디를 향해 가는가? 사회 속으로, 의무와 질서 속으로, 그들이 원하는 자리로, 그들이 갈구하는 모습으로, 점잖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건전하고 도덕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떠났을 때, 이젠 남겨진 그녀들이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그들은 구렁텅이에서 떠나고, 그녀들은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누가 그녀들을 욕할 수 있을까? 왜 사랑의 속삭임에 넘어갔냐고, 왜 그렇게 쉽게 그들을 믿어버렸냐고, 왜 모든 것을 걸고, 육체까지도 걸고 그들을 사랑했냐고, 왜 그렇게 부주의했냐고, 왜 이별을 예상하지 못했냐고, 왜 일의 결국을 가늠하지 못했냐고, 그렇게 그녀들을 탓할 것인가.

의무 속으로 돌아간 남자들에게 돌아오는 건 환대이고, 사랑을 믿어버린 그녀들에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과 모욕 그리고 지독한 가난이다. 팡틴의 운명이 그러했다.

그야 어쨌든, 누구한테 불행이 온들 그것은 추호도 내 탓이 아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뜻이다! 주님이 정하시는 것을 방해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에 간섭하려 하는가? 이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뭐? 어쩐지 후련치가 않다고! 그러면 도대체 내게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허구한 세월 내가 열망해 온 목적, 야밤중의 몽상, 하늘에 축원하던 대상, 일신의 안전, 그것을 나는 달성하고 있다! 주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거다. (397-8쪽)

1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자신을 닮은 샹마티외가 붙잡힌다. 그는 ‘장발장’으로 오인받고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가 ‘장발장’이라는 전제하에 그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다. 샹마티외가 장발장으로 오인받고 감옥에 가게 된다면, 장발장은 남은 생애를 ‘마들렌 시장님’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자베르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장발장은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 믿고 싶다. 주님이 하셨기에 이 일이 가능한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런데...

운명과 인간의 오류가 이루어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것을 막지 않는 것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것에 찬동하는 것은, 요컨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무엇이고 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선적인 비굴의 최후 단계다! 그것은 비열하고, 비겁하고, 엉큼하고, 야비하고, 추악한 죄다! (400쪽)

그 때 그는 하나의 목소리가 자기 속에서 외치는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장 발장! 장 발장!”

그의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는 마치 무슨 무시무시한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오냐, 잘한다! 어서 해라!” 그 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네가 하는 짓을 마저 해라! 그 촛대를 부숴라! 그 기념품을 없애라! 주교를 잊어라! 모든 것을 잊어라! 샹마티외를 죽여라! ... 그럼 됐다. 너는 신사로 있어라, 너는! 시장님으로 머물러 있어라. 명예롭고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어라. 이 도시를 번영시켜라.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려라. 고아들을 길러라. 행복하고 유덕하게 칭송을 받으며 살아라. ... 그 모든 축복은 하늘에 이르기 전에 떨어지고, 오직 저주만이 주님에게까지 올라가리라!” (412-3쪽)

침묵함으로써 운명과 인간의 오류가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려 했던 장발장은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의 바깥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는 소리, 영혼을 팔아 육신의 안락을 취하라는 소리, 모멸과 치욕 대신에 존경과 명예를 선택하라는 소리, 팡틴과 코제트를 도우라는 소리.

장발장은 그 소리를 거부하고, 재판장에 가보기로 결정한다. 마차를 타고, 다른 마차로 갈아타고, 말을 빌리고, 그리고 도보로, 걷고 또 걸어서 재판장에 도달한다. 자신이 ‘몽트뢰유쉬르메르의 시장 마들렌’임을 밝히고 방청권을 얻어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말한다.

“배심원님 여러분, 피고를 석방해 주십시오. 재판장님, 저를 포박해 주십시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저입니다. 제가 장발장입니다.” (485쪽)

인제야 1권이 끝났다. 내가 너무 팡틴에게 빠져 있었나. 1권에서 팡틴이 죽어버리니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싶다. 이후로는 ‘프랑스 혁명사’가 계속 나오는 건지 어쩐건지. 나도 학교다닐때는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서 ‘줄줄이’ 꿰고 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  2권 초반에는 나폴레옹 이야기도 많이 나와서, 다른 책도 찾아봐야 되나 어쩌나 생각중이다.

기다려라, 2, 3, 4, 5. (많이 남았네.)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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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2-2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사두고 아직 시작도 못했어요~~~~ 영화만 보고.
장발장을 만드는 사회, 신창원을 양산하는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지요.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갖게 하는 제도, 없는 자가 더 잃어야하는 사회는 바뀌어야겠지요.

나를 묶어두었던 2012학년도여 안녕, 2월이여 안녕~~~~~ 오늘 이러면서 할랑거려요!^^

단발머리 2013-03-01 14:47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전 이제 겨우 1권이라 앞으로도 기나긴 여정이 기다립니다. 가진 사람들이 더 갖겠다고 난리 치는건 인간 본성에 의거 조금 이해도 되는데, 없는 사람들꺼 빼앗아 가겠다고 할 때는 정말 짜증이 많이 나지요.

이제 3월이예요. 얘들은 월요일에 개학하고요. 그럼 저는 비수기입니다!!! 만세~~~

dd 2013-03-1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