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y by the sea>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뉴욕을 상륙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루시,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는데, 과학자인 루시의 전남편 윌리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이혼한 세번째 부인과 막내딸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장성해서 이미 결혼한 두 딸의 이사를 의논하고, 그리고 외곽에 집을 얻어 자신이 직접 루시를 데리고 뉴욕을 떠난다. 탈출한다. 이 주 정도 머물 거라 생각하고 윌리엄을 따라나섰던 루시는 코로나가 뉴욕을 강타하는 현장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확인하며 우울함과 절망감을 느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상황이 나아졌을 때, 루시는 딸들을 만나러 간다. 저기 멀리 두 딸이 보인다.
I could not believe it.
Chrissy and Becka walked to the table - William and I were now standing up - and they put their arms out and made hugging motions; even with their masks on, I could see their happiness just beaming forth.
I have never seen anything as beautiful as those girls. These women. My daughters!
They were laughing and laughing - and William was beaming behind his mask as well, as he glanced at me. I said, "William! You planned this?"
"We all did," Chrissy said. "We wanted to surprise you, so we did.” (219p)
나는 딸이 하나뿐이라 딸이 둘인 느낌이 어떤 건지 모른다. 나는 자매가 없어서 언니와 여동생 간의 애정과 미움, 숭배와 연민에 대해 잘 모른다. 나는 그런 감정을 책으로 배웠다. 그러니깐 <A summer to die>의 자매 이야기에서, 두 사람의 감정선이 베스트 프렌드 사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추측할 뿐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의 레누와 릴라처럼 말이다.
아들은 나와 생김새와 성격, 성향, 심지어 춤출 때의 바이브까지 비슷하다. 딸아이는 자기 아빠의 생김새와 성격, 성향, 피부톤, 머리카락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나는 내 분신이 딸아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딸은 한 명이고, 그래서 나는 내 사랑을 나눠줄 필요가 없다. 딸아이가 내게 관심을 요구할 때, 그 애는 누구와도 그것을 나눌 필요가 없다. 나는 딸이 하나니까.
싱가포르 창이 공항 스타벅스에 앉아있을 때였다. 금발의 엄마가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큰아이는 10살, 작은 아이는 7살 정도 되어 보였다. 엄마는 커피를, 아이들은 음료와 작은 빵, 그리고 샐러드 종류를 시켰던 것 같다. 바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작은 아이가 책을 펼쳤다. 물론, 영어책이었다. 나도 영어책이 있긴 했다. 짐 쌀 때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어깨에 메고 온 가방 안에 책이 있었다. 책을 펼쳐 놓고, 영어책을 펼쳐만 놓고 곁눈질로 두 아이를 살폈다. 그녀에게는 딸이 둘이었다. 예쁘고 귀여운 두 명의 여자아이. 소녀이고 이제 곧 성년이 될 아이들. 두 명의 딸을 가진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다. 내게 딸이 한 명 더 있었더라면.
아이가 화장실에 다녀왔다. 가방 속 짐을 다시 정리하고, 잠깐 쉬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리어를 끌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루시의 문장이 떠올랐다. my beautiful two daughters. 내게는 my beautiful daughter겠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한다지만 모든 새끼는 예쁘고 그래서 고슴도치 새끼도 예쁘다. 나도 그렇게 내 새끼가 예쁘다. 내 눈에는 예쁘다.
키가 크고 하얗고 당당한 아이가 내 눈에는 예쁘다. 나 스스로는 키가 크다는 걸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컸다. 키가 크다는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랑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그건 이쪽 세계를 모르는 이들의 말이다. 한 반에 여학생이 55명이고 번호를 키순으로 매길 때, 49번에서 54번의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더 작다고 우기며 앞번호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키가 큰 건 좋지만 (여자가) 너무 큰 건 좋지 않다’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 ‘너무’의 범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말이다. 나는 키가 171센티미터다. 학교 졸업하고 나서 1센티 더 자라서 회사에 들어가 영양상태 좋아져 키가 더 컸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이힐을 신으면 177에서 178 정도 된다. 일반의 한국 남자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고, 난 그걸 당연시하면서 살았다. 그게 불편하지 않았고 싫지 않았다.
싱가포르 Changi공항을 나와 대형 쇼핑몰을 구경하고 시내 중심부에서 점심을 먹고 National Stadium으로 이동했다. 현지기온 30도에 체감온도 36도, 테일러 스위프트에 대한 사랑을 더하고 나니, 대략 6만명 정도 모였다는 현장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 같은 열기로 뜨거웠다. 거기에 내 딸이 있었다. 키가 크고 하얗고 아름다운 내 딸. 싱가포르는 다인종국가라 다종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거리, 쇼핑몰, 그리고 테일러의 공연 현장까지 내 딸 같은 사람은 없었다. 관광객이 분명한 금발의 여성들이나 말레이시아에서 온 듯한 사람들, 그리고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을 통틀어서, 내 딸 같은 사람은 없다. ‘너무’ 키가 큰 나보다 ‘훨씬’ 더 큰 내 딸. 동양인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골격이고 동양인답지 않은 모습이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내 딸을 본다. 키가 크고 하얗고 아름다운 내 딸.
건수하님의 페이퍼 <생각을 부르는 책>(https://blog.aladin.co.kr/suha/15363237)을 인상깊게 읽었다. 처음 페미니즘을 읽었을 때부터 그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이 콕콕 마음에 박혔다. 하나의 명쾌한 답으로 정리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안다. ‘자매애는 없다’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도 당연히 떠오르고.
기혼페미에 대해, 내가 아는 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인 내 딸에게 ‘오늘의 너는, 나의 눈물 나는 혹은 절절한 돌봄노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비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낳아달라고 했냐?’라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좀 그렇기는 하다. 그 애의 동의 없이 그 애를 낳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로 한 나의 선택이, 오늘 그 애의 삶을, 삶 속의 기쁨과 행복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지만, 페미니즘이 말하고자 바를 명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언어로 설명할 줄 아는 이 아이를, 나는 이해하고 그리고 안타까워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당연히 미팅을 하고 남자 친구를 사귀고 취직 후에는 결혼, 그 후에는 '출산과 육아'라는 일반적이고 쉬운 선택지를 쫓았던 내 세대(정확히는 나)와 달리, 자신의 삶을 옥죄는 다분히 기업적인 억압과 위협(화장실 몰래카메라, 리벤지 포르노, 데이트 폭력, 이별 살인, 경력 단절, 독박 육아)을 이들 2-30대 여성들은 알아차렸다. 결혼이라는 커다란 그물망 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 이중성을 간파했다. 현실이 전쟁보다 더한 상태임을 여성들은 합계출산율 0.78로 증명했다. 친한 언니들의 아이들까지 합해 모두 4명의 대학생들이 있지만, 그중에 남자 친구가 있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인지 몰라 사귀기 무섭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이들의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굳건한 결심에 대해 이해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쉽게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혼페미를 밀쳐내지 않으면서, 과격하게 들리는 주장들을 홀대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연대를 만들어갈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공부라는 실천, 공부라는 연대를 넘어서는 또 다른 모습의 연합을 만들어가고 싶다. 내가 가진 경험을 나누고 싶고, 그들의 혜안을 통해 배우고 싶다. 그걸 일상의 내 삶 속에서 구현하고 싶다.
키가 크고 하얗고 아름다운 내 딸이 그러한 것처럼, 내가 낳지 않은 그들 역시 나의 딸이다.
페미니즘 책을 읽지 않았어도 알아채고 행동하는 그들이, 내게 지혜를 나눠주는 나의 어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