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세계가 그랬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전업주부 엄마들 중에서 아이들 ‘독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은 그러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넣어’ 놓고는 아이들 교과 과정과 관련이 있는 도서들을, 학년별 필독 도서들을, 청구기호별로 정리해서는 쫘악 대출을 해서, 아이들에게 쭉쭉 읽히곤 했다. 내가 살던 세계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운동화를 꺾어 신고 도서관에 들어가서는, 애들 칸에 가서 제목으로 훑으며 책을 고르고, 북카트에 올려진 책들을 훑으며 책을 골랐다. 금방 고르고 내 책 고르러 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책도 필독서를 중심으로 골랐을까. 설마 그럴리가. 내 책도 그렇게 골랐다. 특별히 찾는 책을 제외하고는 슬슬 거닐다가 맘에 드는 책을 골라 들었다. 가끔, 집에 있는 책을 빌려오기도 했다.
그런 세계에서 내내 살아왔으니 지금이라고 다를까. 지금도 비슷하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쓰윽 살피고 쭉 훑는다. 그렇게 골라와도 자주 교과 과정 속의 책들, 혹은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활용하시는 책들과 겹치는 책들이 많아, 나는 혹 ‘모범생’인가 라는 생각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 번씩 해보기는 한다.
저번주 내가 제일 ‘밀었던’ 책은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였는데 아이들이 아무도 안 골라서 이제 곧 반납할 때도 다가오고 해서, 내가 읽었다. 나 혼자. 예전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었으니 이번에는 책 표제에 맞게 그림을 위주로 보리라 했는데, 유명하신 분 4분이 함께했다고 그러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은 아니었다.
빌 브라이슨 책의 특징은 ‘알고 있는 걸’ 풀어서 쓴 책이라기 보다는 ‘공부해서’ 쓴 책이라는 점인데, 3년간 세계의 여러 과학자들을 찾아가 설명을 듣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글쓰기의 힘이 더해져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이래 ‘최대의 화제가 된 과학 교양서’가 되었다고 한다. (알라딘 책소개) (한편으로, <시간의 역사>는 화제의 과학 교양서라 하기에는, 너무 재미가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집에 그 책이 있어도 내내 읽지 않고 있는 내가, 하고 있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 생물과 인류의 역사를 꼼꼼히 파헤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비전문가의 입장이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자료를 찾아본 흔적이 촘촘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이런 종류 책의 장점이라면, 이 책을 ‘한 사람’이 썼다는 데 있다. 물론 감수받는 과정도 있었을 테고, 중간중간 편집자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하고, 그리고 문장으로 써 내려간 사람이 한 명이라는 건, 책 전체의 통일성은 물론 가독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읽는 사람의 입장으로 보자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쭉 이어서 듣는 느낌.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여기, <단백질 스프>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화학물질(탄소, 수소, 질소, 소량의 황, 인, 칼슘, 철)에는 특별한 점이 전혀 없는데, 이러한 조합이 어떻게 생명으로, 우리 인간으로 이어져 왔는가. 아미노산들이 정확한 순서에 따라 조합되고, 일종의 화학적 종이 접기를 통해 아주 특별한 모양으로 접혀야 하며, DNA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그것을 ‘생명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이 책은 필독서 없는 세계의 베스트셀러인 <동그라미>.
어느 날, 동그라미, 세모, 네모가 숨박꼭질을 한다. 규칙은 하나, 동굴 안에 들어가지 않기. 네모는 숨을 생각도 안 하고 멍하니 서서 세모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준다. 세모를 찾기 위해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간 동그라미. 세모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시전한다. 너, 왜 이렇게 규칙 안 지켜! 너 때문에 화나! 그리고는 미안해서 급사과. 그래도 너는 나의 좋은 친구야. 고마워, 세모가 동그라미 뒤에서 말한다. 그럼, 그럼.... “누구야, 넌?”
어제 만든 리스트를 째려보며 제일 먼저 살 책을 고르고 있다. 마음으로는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사고 싶은데, <자살의 이해>는 구입하자마자 바로 시작할 것 같아 고민 중이다. 지난주에 도서관에 신간 몇 권을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올해 예산이 소진되어 내년 2월에 다시 신청하라는 문자가 왔다. 그러니까, 11월부터 2월은 책을 마음껏 사도 되겠으며............
필독서 찾아 읽지 않고, 베스트셀러에도 무덤덤한 세계이지만, <정희진 선생님 픽!> 필독은 읽어줘야 한다. 몰라도 읽어야 되며, 이해 안 되도 읽어야 되고, 없으면 사야 하고, 사서 읽을 때는 열심히 읽어야 하며.....
정신 집중 안 하고 홀랑홀랑 팔면 안 된다. 책정리한다고 팔아도 안 되고, 슈퍼바이백에 속아 넘어가서도 안 된다. 팔면 안 된다. 팔면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