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청소를 하지 않는 날이라 글을… 무엇이든, 어떤 이야기든, 꼭
글을 쓰리라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가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꺼내는데, 차린 게 없는데 먹을 게 많아서 깜짝 놀랐고. 저녁을 먹고 그릇을
설거지 전 단계로 준비시키고, 노트북을 열어 알라딘에 들어가 이웃님들 글을 읽으며 댓글 달며 잠시 놀다가
노래 한 곡 플레이! 하며 유튜브에 들어가 선우정아가 부른 <황금가면>을 보고 듣다가 <유미의 세포들> 클립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응?). 아, 내가 알던 결말이 진짜 결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아 여기저기 확인해 보니, 그랬다. 두 사람은 이별
후 재회했으나, 다시 이별했고, 그리고 재회했으나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었으니. 완결에 대한 나의 집착이 시작되어 버리고. 왜! 왜 두 사람은 끝내 헤어진 거야? 하면서 <유미의 세포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김고은을 좋아하지만 상대 배우 박진영도 좋았는데. 뭐든 용서해 주고
싶은 그 사슴 같은 눈망울의 남주를 왜 김고은은, 왜!! 이러면서
한 시간 반. 이것이 인간인가.
어제 읽은 책은 <친밀한
적>. 저자는 아시스 난디, ‘식민주의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이 부제다. 30여 쪽을 읽었는데 밀도가 높고 강렬해서
단번에 <단발머리 픽 올해의 책> 후보로 오름
직하다. 인상 깊었던 문장은 여기.
우리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서구에 대한 가장 맹렬한 비난이 싸르트르(Jean-Paul
Sartre)의 우아한 문체로 쓰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구는 근대 식민주의를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도 만들어냈다. 그 해석을 해석하고 있는 이 책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문, 21쪽)
탈식민을 추구할 때, 그러한
고민과 갈등의 주체는 벗어나고자 하는 대상에게서 얼마나 ‘탈출’할
수 있는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 혹은 그 억압에
대한 비판과 고발은 어떤 언어로 만들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고소가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피지배자의 언어로 재현되었을
때, 그 효과는 어떠한가.
어젯밤에 찾다가 결국 못 찾았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못 찾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읽지 않은 내가, 썼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고, 서발턴의 말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발화’될 수밖에 없다. 그
언어는 지배자의 언어여야 하고, 그래서 영어여야 한다. (제가
이 글 어디에 썼는지 아시는 분, 좀 알려주시길~~)
그러던 와중
스피박의 인생에 일대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 일어난다.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저작권을 직접
구입하여 영역한 것이다. 이 번역서는 책의 명성을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번역 뿐 아니라, 책머리에 붙인 역자의 '비판적 서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49쪽)
스피박이 젊고 유망한 전 세계적인 학자로 주목받게 된 데에, 이 사건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배자에 대한 비판과 고소, 그리고
고발이 지배자의 언어, 지배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루어질 때의 위력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한편으로 ‘지배자의
연장으로는 지배자의 집을 부술 수 없다’던 오드리 로드의 말을 연결해 보고 싶은데, 오드리 로드 책을 한 권(<자미>) 밖에 안 읽어서... 오드리를 더 읽어 보는 것으로 하고. 다시 아시스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