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쓰여있는데 읽을 수 없는 슬픔
수하님의 이 글(https://blog.aladin.co.kr/suha/14807668; 한국어로 쓰여있는데 읽을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댓글로 작성한 글입니다.
수하님의 고민, 저의 고민인 것이며.... 한편으로는 수하님은 공부할 수 있는 기관도 알아보시고 하신 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수하님 글을 찬찬히 2번 읽으며, 나는 어떻게 했던가 혹은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생각해 봤거든요.
저는 그렇게 했던 거 같아요. 그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일단 몰라도 '무조건' 읽는 방향으로. 그냥 읽는 걸로 합니다. 일전에 읽었던 책인데, 우치타 다쓰루 책이었던 거 같은데요. 이런 문장이 있어요.
롤랑 바르트도, 푸코도, 데리다도, 라캉도, ‘어째서 여러분은 이렇게 어렵게 글을 씁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내 글이 어렵다고? 그건 네가 독자로 상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읽지 않아도 돼!”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프랑스만을 두고 생각했을 때 언어 사용 자체가 계층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했을 때, 고급 독자층이 아닌 데다가 외국인인 저 같은 경우, 그가 상정한 ‘독자’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더(열받아서!!), 그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혹은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겠지만, 저 같은 경우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책을 끝까지 읽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성의 역사>나 <젠더 트러블>을 ‘그렇게’ 읽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만 의미를 둔다면 그게 진정한 의미의 ‘공부’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고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우치다 다쓰루나 양자오 시리즈처럼 고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저자들의 책을 십분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 저자는 그런 사람들이 눈에 안 띄니 그건 또 그것대로 아쉽지만요.
수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전공 분야를 자신의 언어로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갈 수 있고, 또 일본의 학생들이 분명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유리한 점이 있을 것 같고요. 뒤쳐진 우리는 몇 배나 더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마침 <감시와 처벌>을 읽어야 하는 처지의 저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합니다. 쉽고 재밌게 읽었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현실… 왜 읽는 걸까요,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