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는 제인의 분신인가
『제인 에어』에 대한 질문, ‘버사는 제인의 분신인가’에 대해 쓴다.
공동 저자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미친 여자를 작가의 분신 혹은 작가 자신의 불안과 분노의 이미지”(189쪽)로 보았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반항적 충동을 여자 주인공에게 투사할 수 없으니 괴물 같은 미친 여자에게 투사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결론은 이렇다.
밤중에 나타나는 유령은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다. 그러나 비유적 심리적 수위에서 버사라는 유령은 제인의 또 다른 (사실상 가장 위협적인) 화신이다. … 즉 버사는 제인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어두운 분신이고, 게이츠헤드의 삶 이후 제인이 억제하려고 애써왔던 숨겨진 사나운 자아 고아 아이의 분노한 자아다. (635쪽)
공동 저자들은 버사를 제인의 억눌린 자아, 분노한 자아로 보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두 사람의 해석은 물론이고, 스피박 혹은 다른 이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여러 해석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답을 찾아내고 그 답을 확증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답은 작품 속에 있다. 작품 안에 있다. 버사는 누구인가. 로체스터의 말이다.
나는 그녀가 블랑슈 잉그램 형의 미인이며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에 검은 피부를 가진 여자임을 발견했소. (<제인 에어>, 136쪽)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그 지독하고 얼토당토않은 심통이나 터무니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혹한 명령을 견디어낼 수 있는 하인이 없으니… (137쪽)
… 정신이 이상한 것과 같은 정도로 강건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 (140쪽)
저 미친 여자는 교활하고 근성이 나빠요. (144쪽)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결혼의 장애물인 아내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버사는 크리올(Creole: 1. (특히 서인도 제도에 사는) 유럽인과 흑인의 혼혈인 2. 서인도 제도나 남미 초기 정착민의 후예. 또는 미국 남부에 정착한 프랑스나 스페인 정착민의 후예/네이버 영어사전)의 딸로서 아름다운 미모와 재산을 미끼로 로체스터와 결혼했으며, 결혼 후 드러난 파괴적인 성격과 행동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해져, 현재는 손필드의 다락방에 억류되었으며, 그레이스라는 간호사의 돌봄을 받고 있다. 한때 아름답고 찬란한 그녀가 이제는 다락방의 미친 ‘그’ 여자가 되어 동물처럼 생활하고 있다. 폭력적으로 행동하다 못해 오빠에게 칼을 휘두르는 그녀, 다락방의 ‘그’ 미친 여자.
로체스터의 일부는 브론테이다. 브론테가 알았든지 혹은 알지 못했든지 로체스터는 브론테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다락방의 ‘그’ 여자에 대한 태도를 볼 때, 브론테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로체스터는 의심하게 된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혹 나쁜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 이전에, 그는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성장한 남성이다. 그 자신이 가부장제의 피해를 입었을 때(아버지가 형에게만 재산을 상속함) 그는 버사를 통해 피해분을 보충하려고 한다. 처음에 선의를 가지고 버사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결혼 이후 로체스터는 변했다. 로체스터는 버사가 변했다고 혹은 그녀의 어떤 면을 알지 못했노라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를 믿을 수 있는가. 로체스터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로체스터는 열정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광기와 집착, 그리고 뜨거운 열정 역시 사랑의 한 측면임을 인정할 때, 로체스터는 그런 사랑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말 그대로 사랑의 화신이다. 나는 그의 그런 면을 사랑한다. 그의 광기와 집착을, 그리고 불같은 뜨거움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로체스터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 그의 주장을 그의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변심한 남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광기란 무엇인가. <여성과 광기>에서 필리스 체슬러는 ‘개인에게 부과된 상투적인 성역할을 총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광기’라고 정의(<여성과 광기>,182쪽)했다. 즉, 버사가 여성적인 성역할의 수행을 거부했을 때, 그녀는 ‘미쳤다’고 여겨졌다. 로체스터가 버사를 부담스러워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녀의 육체적 강인함과 남편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를 제압할 정도의 완력과 노골적인 불순종, 듣기에 불편한 험한 말들과 주위를 울리는 큰 목소리. 여성이 이런 기질을 지속적으로 발산할 때, 미쳤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버사 역시 미쳤다고 여겨졌다. ‘미쳤다’기 보다는 ‘미쳤다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버사는 제인의 분신인가. 버사는 제인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어두운 분신인가. 나는, 버사를 제인의 분신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오히려 버사를 ‘식민지 혹은 유색인종 여성’으로 해석한 스피박의 해석 쪽으로 끌린다.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하고자 했던 제인의 페미니스트적 열망, 혹은 이에 집착하는 해석들은 여성 인물들을 남성인물로부터 해방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버사로 대표되는 식민지 혹은 유색인종 여성을 희생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 해방을 표방하는 유럽의 진보적 페미니즘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대의명분을 상기시킬 수 있기에 위험하다. 스피박은 제인을 페미니스트적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인물로 읽어내는 비평이 "식민 지배자의 사회적 사명의 영광을 위하여 버사를 스스로 희생하는 식민 주체로 구성하는 일이며, 이는 결국 제국주의가 휘두르는 인식론적 폭력(epistemic violence)과 다르지 않다고 맹렬히 공격한다(Spivak 251).
(<손필드 저택의 세번째 이야기 : 서발턴 텍스트로 다시 읽는 『제인 에어), 임경규)
버사를 ‘식민지 혹은 유색인종 여성’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존경하는 서재이웃 바람돌이님은 최근의 페이퍼에서 ‘피부가 검다는 표현이 딱 한 번 나오지만 그게 인종적 특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개인적 피부톤의 차원으로 이해하는게 맞을 것 같다’고 쓰셨고, 또한 이를 ‘제3세계에 대한 차별’로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쓰셨다. 이 페이퍼의 댓글에서 존경하는 서재이웃 꼬마요정님은 ‘버사가 피부톤이 어두운 건 그 태양이 작열하는 곳에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라 쓰셨다.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인데, 작품에 딱 한 번 나온 ‘검은 피부’라는 표현은 버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종의 구성 과정을 돌이켜 볼 때, ‘희다’는 것, ‘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백인’이 기준이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방송인 노아 트레버는 자랄 때 ‘백인’ 취급을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백인’으로 대우했다. 학교에 다닐 때 노아는 ‘유색인’으로 분류되었고, 미국에서라면 그는 분명 ‘흑인’이다. 그는 흑인보다 하얗고, 백인보다 검다. 흑인과 있을 때 그는 백인이고, 백인과 함께 있을 때 그는 흑인이다. 버사는 백인인 로체스터가 보았을 때 ‘검은’ 피부의 사람이다. 이 ‘검은’은 우리가 피부색으로서 흑인을 떠올릴 때의 ‘검은’이 아닐 수도 있다. 아시안인 우리의 피부와 비교했을 때 버사는 분명 ‘하얀’ 피부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체스터, 이 믿을 수 없는 사람 로체스터에게 버사는 ‘검은’ 피부의 사람이다. 이러한 버사의 가시적 이질성은 그녀에 대한 로체스터의 혐오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녀의 ‘검은 피부’가 미움과 변심의 시작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버사를 제인의 분신으로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버사의 죽음을 통해 얻어진 제인의 ‘결말’ 때문이다. 제인은 손필드를 탈출했고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로체스터와 결혼했다. 하지만, 버사가 살아있었다면? 손필드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버사가 살아있었다면? 제인은 그와의 행복한 결말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제인의 행복은 언제 완성되었는가. 버사가 죽었을 때다. 중혼의 위협, 정부로의 비도덕적이고 불안정한 지위를 복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버사의 죽음뿐이다. 제인의 행복은 버사의 제거, 버사의 죽음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다. 만약, 버사를 제인의 분신으로 해석한다면, 버사를 제인의 억눌린 ‘자아’로 해석한다면, 버사의 죽음은 제인의 일부가 죽었음을 의미한다. 로체스터와 맞서는 나, 로체스터와 싸우는 나, 로체스터에게 부담을 주는 나, 가 사라진다, 는 뜻이다. 남은 것은 로체스터와 결혼하는 나, 로체스터의 아내가 되는 나, 로체스터의 동반자가 되는 나, 바로 그런 ‘제인’인 것이다.
제1세계 페미니즘과 제국주의 결합이라는 비판이 날카롭게 읽히지만, 또한 스피박이 최근의 저작 『읽기』에서 자신의 논문에 근거해 샬럿이 ‘인종주의자’로 읽히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나는 스피박의 해석이, 스피박의 불편한 해석이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읽힌다. 이제 남은 의문은, 그렇다면 나는, 제인처럼 제1세계에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버사처럼 제3세계에 속한 사람인가,라는 것인데.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진짜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