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정치사] 광기의 여자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2부 4장 <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 294쪽까지 읽었다. (작년에 300쪽 정도 읽었으니 여기까지는 재독이라고 주장하는 나란 사람, 누구?)
가부장적 서구 문화에서 텍스트의 저자는 아버지이자 창시자이며 ‘낳는 자’이고, 펜을 음경처럼 사용하며 자손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진 존재다(78쪽). 남성 예술가들이 만들어놓은 여성에 대한 지독한 혐오, 즉 ‘여성에 대한’ 천사와 괴물의 양면적 이미지 속에서 성장한 여성 예술가들은 자아 정의의 과정 내내 가부장적 정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 지금 말하는 나, 창조하는 나, 문장을 써 내려가는 ‘나’가 바로 그 천사, 그 괴물이기 때문이다.
해럴드 블룸의 지적대로 남성 예술가는 선배 작가의 ‘영향에 대한 불안’과 싸워야 했다. 선배들의 작품이 자신을 넘어서서 존재하고 자기 작품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할 것이라는 불안(141쪽)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여성 예술가들은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이겨내야 한다. (145쪽) 여자인 네가? 창조하겠다고? 선배가 되겠다고? 작가가 되겠다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고? 시인이 되겠다고? 소설을 쓰겠다고? 이건 외부의 소리가 아니라 여성 예술가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내면화된 가부장제의 여성 혐오가, 여성 예술가의 몸 ‘속에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생각날 수밖에 없는 토니 모리슨.
제 말씀은 남성들은 작가로서의 자격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저는 그럴 수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글쓰기가 인생의 핵심이고 마음을 몽땅 차지하고 있고, 기쁨을 주고 자극을 주는데도 저는 제가 작가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업이 뭔가요?”라고 물으면 “아, 저는 작가랍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어요. 대신 “편집자랍니다.” 아니면 “교사예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2>. 311쪽)
내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로 아이들을 원했고 – 학계에 직업을 가진 50대 남자로서는 드물게 기꺼이 '도와주려' 했다. 그러나 이 '도움'은 너그러운 행동으로 이해되었고, 가족 안에서 진짜 일은 그의 일, 그의 직장생활이었다. 사실 이 사실은 몇 년간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나는 작가로서 나의 몸부림이 일종의 사치이자 나만의 특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144쪽)
흑인 여성이라면 유모, 보모, 가정부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세계 속에서 글을 쓰는 ‘흑인 여성’인 자신을 ‘작가’라고 부를 수 없었던 토니 모리슨이 말한다. “저는 제가 작가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고의 깊이와 넓이와 폭에 있어서 철학자에 비견할 만한 에이드리언 리치가 쓴다. “나는 작가로서 나의 몸부림이 일종의 사치이자 나만의 특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작가로 정의할 수 없는 여성 예술가의 고뇌,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불화, 미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여성 예술가는 이 모든 과정을 이겨내야만 한다. 내면의 여성 혐오와 싸워 이겨야만 한다. 자신을 작가로 정의하기 위한 여성 예술가의 이러한 투쟁은 여성 선배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행위로 이어진다. 여성 예술가에게 ‘여성 선배’는 죽이거나 넘어서거나 미워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가부장적 권위에 저항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146쪽) 여성 예술가에게 ‘여성 선배’는 작가 세계의 입장권으로 작동한다.
물론 이 작가들은 자신들의 반항적 충동을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미치거나 괴물 같은 (소설이나 시 속에서 적절하게 벌을 받는) 여자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분열, 즉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을 수용하고자 하는 욕망과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에 극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 문학에 등장한 미친 여자가 남성 문학과 달리 단순히 여자 주인공의 적대자거나 들러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친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 자신의 불안과 분노의 이미지다. (189쪽)
이 문단이 이 책의 주요한 생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일 수 없는 여성 예술가가 작품의 주인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반항적 충동을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미치거나 괴물 같은 여자에게 투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수용하는 여자 주인공이 작가의 분신인 것처럼, 가부장제를 거부하며 미쳐 날뛰는 미친 여자 역시 작가의 다른 모습, 즉 분신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내 질문은 이렇다. <제인 에어>로만 특정해 보았을 때, 제인 에어 속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는 브론테의 분신인가. 미쳐 있고 갇혀 있으며 저택에 불을 지른 버사는 시련을 극복하고 자립하고 결혼하는 제인 에어의 다른 모습인가.
소설과 시에서 여성 괴물을 불러냈던 모든 19세기, 20세기 여성 작가는 자신을 괴물과 동일시함으로써 괴물의 의미를 수정하고 있다. 여성 작가는 보통 마녀-괴물-미친 여자야말로 작가 자신의 결정적인 분신이라는 생각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관점에서 가정생활의 순종적 침묵을 거부한 여성들은 무시무시한 대상(고르곤, 세이렌, 스킬라, 라미아, 죽음의 어머니, 밤의 여신)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괴물 여성은 자신을 표현할 힘을 구하는 여자일 뿐이다. (191쪽)
작년에 함께 읽은 [소설의 정치사]를 읽으면서 ‘광기의 여자’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두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제인 에어>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읽기를 통해 “버사를 야생 속 광기 어린 동물적 존재로 취급하면서, 미쳐 날뛰어 스스로 지른 불에 목숨을 잃게 하는 <제인 에어>의 서사 구조는 서구 주체가 인식하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폭력성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46쪽) 헬렌 티핀은 “<제인 에어>가 일조하는 식민주의 담론에 따르면, 술에 취해 있고 난폭하며 음탕하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은 곧 백인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고 주장하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브론테의 서사에 미친 영향”을 파헤친다. (<비평 이론의 모든 것>, 884쪽)
즉, <소설의 정치사>의 낸시 암스트롱,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길버트와 구바가 ‘미친 여자’를 사회적 정체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분신”으로 해석한 데 반해, 스피박과 티핀은 버사를 ‘미친 여자’로 이해하는 제인 에어가 가진 식민주의적 시선, 백인 위주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다.
제일 관심을 끄는 건, 스피박의 해석이다. 제1세계의 여성인 제인이 제3세계의 여성 버사를 ‘죽이는데’ 공모함으로써, 제인은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사랑을 획득하는 ‘주체’가 될 수 있었으나, 이는 제3세계 여성 버사의 죽음으로만 가능했다는 점에서 제인 역시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Three Women’s Texts and a Critique of Imperialism>/<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 비교적 최근의 저작(<Readings>, 2014년 / 번역서 <읽기>)에서 스피박은 이렇게 밝힌다. 알라딘 책소개를 그대로 가져왔다.
다음 장인 「스피박 다시 읽기」에서는 자신의 과거 텍스트인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잘못을 바로잡기」를 검토하면서 이 글들이 나온 배경과 더불어 저자인 과거 자신의 '검토되지 않은 문화적 가정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이 "요컨대 그들은 틀렸고 우리가 옳으며, (비록 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 말할 만큼은 조심스러웠지만) 샬럿 브론테는 인종주의자라는 식"(99) 으로 읽혀 온 것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 것에 유감을 표명하며... (<읽기>, 알라딘 책소개)
샬롯 브론테가 인종주의자라고 읽혀온 것에 유감을 표하는 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그다음에 어쩌자는 건지. 이 책을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다. 읽을 때도 그렇게나 어려웠다, 한없이. 그래서? 그래서!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제인과 로체스터’로만 읽었던 텍스트를 ‘제인과 버사’로 읽어보려고 한다. 버사가 제인의 억압받은 내면인지, 버사가 작가의 분신인지. 버사는 제인의 두려움의 상징일 뿐인지, 역사성을 소유한 인간인지. 그런 면에 중심을 두고 다시 읽어보겠다.
제인 에어는 소중하니까. 오랫동안 제인으로 살았던 내가 버사라면, 이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나. 내가 생각하는 최상은 제인의 다른 자아로서의 버사이다. 은유로서의 버사. 찬찬히 다시 살펴보자. 제인인지 버사인지. 버사인지 제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