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읽기 모임의 열 번째 책을 읽고 있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고,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호박벌 스타킹의 에밀리 클라크와 상반신 연기의 새 시대를 연 샘 클라플린의 명연기로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고 잘 알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말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루이자를 남겨두고, 윌은 자신의 계획대로 죽음을 선택한다.
윌이 마지막을 보낸 곳은 스위스.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으로써 안락사가 허용된 나라이다. 스위스는 1942년부터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안락사의 일종인 조력죽음 또는 조력자살을 허용해왔다고 한다.
나는 윌의 선택이 윌’로서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고, 자기 육체를 너무나 사랑했던 그가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었고, 최신의 약물 치료를 통해서도 그의 고통을 감소시킬 수 없었다.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윌은 선택했다. 윌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존엄사’ 혹은 ‘안락사’, ‘조력 죽음’의 확대가 가져올 상황에 대한 것이다. 존엄사는 필요 없는 치료를 거두는 것을 의미하고, 안락사는 인위적(적극적으로 소량의 약물 투여로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소극적으로 물, 산소, 영양분 공급 중단 등)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 예정인 ‘호스피스, 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조력 존엄사법)에 의하면,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에 임박한 ‘임종 과정’에 국한해 연명 치료 중단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서도 알랭 들롱처럼 ‘안락사’ 가능?” /한경 정치/2022.05.30)
우리나라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안락사를 허용하려는 입법론은 지금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뇌사자로부터 장기를 적출함으로써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소극적 안락사 허용성은 엄격한 통제 하에 법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락사’)
연명치료 중단을 통해 임종 과정에 있던 환자는 죽음에 이른다. 연명치료 중단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위의 조건 이외에도, 환자가 (미리) ‘사전 연명 치료 의향서’를 의사 2인의 판단하에 작성했거나 환자의 의사가 확인된 경우는 가족 2명 이상이, 환자의 의사가 전혀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는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에 따라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내가 염려하는 바는, 더 이상의 ‘생명 연장이 의미 없다’고 판단하는 범위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이 만족하는 생활 수준, 삶의 질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도 삶을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또 어떤 사람은 훨씬 더 열악한 생활 환경에서도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강할 수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혹은 초고령화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몸의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해질 때, 이전 수준의 삶으로 살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훨씬 더 연약한 정신과 육체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삶의 질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본인이,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 알게 되는 상황에서, ‘저런 삶이라면 삶을 더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될 때, 바로 ‘그 사람’이 판단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요인을 비교,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단순하고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사회에서는 안락사의 기준을 ‘85세’로 잡았다. 그 기간을 전후하여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고, 신청한 사람에 대해 안락사가 진행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안락사 신청 나이가 지난 후에도 당연히 생존의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고, 안락사 신청이 가능한 나이 이전에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안락사 ‘신청’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 78세의 노인이 있다. 대체로 건강하고 가족과의 사이도 원만하고 친구들과도 즐거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다친 무릎 때문에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아졌고 생활이 불편해지면서 우울한 기분에 자꾸 빠지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는 안락사 ‘신청’을 고려하고 있다. 아직 안락사의 기준이 되는 ‘85세’까지는 7년이나 남았지만, 그때까지 삶을 이어가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삶에 만족한다고 말하며, 불편한 삶을 지속하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으로 정돈된 모습으로 깔끔하게 자기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 87세의 노인이 있다. 그는 안락사 ‘신청’ 나이가 지났지만, 아직도 안락사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신장이 좋지 않았고 5년 전부터 인공 투석 치료를 받고 있다. 한 주에 3번씩 투석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고 있다. 혈압약과 고지혈증약을 먹고 있다.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간단 치매 검사에서 위험군이라는 검사 결과를 들었고, 다음 주에는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 그는 '아직도' 안락사 신청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도 혹은 오히려 극한 상황에서 더욱 생존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절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극단’의 경우를 상상한다. 그건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내가 궁금해하는 건, 안락사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을 때, 위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내리는 ‘판단’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사회가 주는 압박과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 로 살아간다면 모를까. 하지만, 자연인으로 산에 사는 그 사람조차 카메라가 필요하다. 보고 있는 사람이 없으면 산속에서의 삶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삶은 소중하다, 인생은 아름다워, 가 아니다. 생명 경시 풍조를 우려한다는 게, 안락사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첫 번째 주장이라고 하던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죽고 싶은 사람의 ‘죽고자’ 하는 의지가,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강압하는 경우를 걱정할 뿐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 생에 대한 의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사진은 『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에서 가져왔다. 박테리아는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고 매일 살아남기 위해 임의적인 움직임을 지속한다고 한다. 유익한 물질을 만났을 때는 달리기 운동을 통해 가까이 가고, 해로운 물질을 만났을 때는 뒹굴기 운동을 통해 도망간다고 한다. 박테리아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조차도 생존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생존한다. 박테리아 단계에서부터 우리 안에 각인된 생존 의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위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예시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이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이기심이 결합할 경우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안락사 ‘신청’의 가능 범위를 대폭 확대될 경우, ‘장기 적출’ 관련 산업의 헬게이트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던 게 1978년이다. 난자를 체외로 채취하여 시험관 내에서 수정시키고 다시 자궁 내에 이식해서 태어난 아기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다. 대부분 딸아들/아들딸 쌍둥이다. 이제 인간은 여러 유전 특질 중에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유전자를 조작해 ‘원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주문형’ 아기가 태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출산은 싫지만, 아기는 갖고 싶은 제1세계의 남녀들이 제3세계 여성을 ‘출산 기계’로 사용하고 있다. 자궁만 빌리는 경우가 있고, 난자와 자궁을 빌리는 경우가 있다. 태어날 아기에 대한 포기 각서를 작성하고 그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 다시는 그 아기를 만나지 못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미 ‘대리모 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앞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가 붙을 테고, 뒤돌아 나오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내 주위에도 가족의 도움 없이 사는 것이 힘든 분들이 많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족의 보살핌으로 살아가는 분도 계시고, 치매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 요양병원에 입원한 분도 계시다. 말기암 환자로서 고통이 너무 심해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환자의 처절한 절규에 온 가족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노인 한 분 봉양하다가 자주 싸우는 바람에,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 형제자매가 의절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삶은 고단하고 애달프다.
하지만, 삶을 그 자체로, 삶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있다. 아이고, 이제 내가 죽어야지. 아이고, 노인네가 별걸 다 먹어, 그지? 하면서도 더 건강한 삶, 더 나은 삶에 대해 기대하는 분들이 있다. 삶을 사랑하는 분들의 그런 태도가 ‘귀엽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상가 엘리베이터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어깨에 수영 가방을 메고 계셨다. 수영 다녀오는 길이라는 그 어르신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에게 물으셨다고 한다. 내가 몇 살로 보이우? 엄마는 80대 초반을 예상했는데 알고 보니 93세셨다. 그렇게 안 보이는 93세의 정정한 할머니. 근데, 내 딸은 죽었어. 일흔 하나였는데, 암 걸려서. 70대 초반의 딸이 암에 걸려 엄마보다 먼저 죽었다. 할머니는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네가 먼저 갔구나. 이를 어쩌나. 나는 어쩌나’ 해야 하는가. 남은 삶을 절망과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할머니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할머니는 살아가기로 했고, 가능하면, 이제 돌봐줄 딸도 없으니 더 건강한 삶을 살기로 선택하셨다. 할머니는 수영 가방을 메고 수영장에 다니신다. 할머니는 삶을 선택했다.
난 지금도 윌의 선택이, 윌에게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윌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선택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이 책을 읽은 후 ‘안락사’와 ‘선택적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뀌는지 추적하기 위해, 지금의 생각을 여기에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