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청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바람막이 얇은 점퍼(작은애꺼)를 입고 있었는데 많이 추웠다. 맑은 콧물이 주르르 흐르는 바람에 자꾸 킁킁댔다. 오늘은 조금 더 두툼한 집업(큰애꺼)을 챙겨왔다. 그런데도 바람이 세다.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20도에도 에어컨을 켜는 이유가, 라고 생각해주는 이해심.
오자마자 내일이 반납인 책 두 권을 후르르 살피고. (궁금해하시는 분들 많으니까. 그 책들은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과 『사랑은 왜 끝나나』입니다)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을 읽는다. 책이 재미없어서가 아니고, 어려워서도 아니고. 순수하게 눈이 아파서, 책상에 엎드려 10분 자고 일어나니 12시 반이다. 설렁설렁 걸어가서 빽다방에서 라떼 한 잔 사가지고 집에서 가져온 호두과자 꺼내놓고 다시 읽기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좀 길기는 한데, 그래도 옮겨 본다.
고통과 행복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 주디스 버틀러의 취약성에 대한 해석은 귀중한 도움을 준다. 버틀러(2006)는 존재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자신의 정치윤리학의 근본 전제로 삼는다. 존재의 취약성이란 어느 누구이든 무엇이든 본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약함 precariousness이기도 하며, 특정한 사회질서 안에서 야기되는 구조적 취약성precarisation이기도 하다. 그러나 논의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버틀러는 주체에게 부여된 실존적 · 구조적 취약성이 그 또는 그녀가 모든 존재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근거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내가 존재하게 되기까지 이미 나는 알거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존재 - 타인, 생물과 무생물, 환경, 세계 전체에 이르기까지 - 에게 의존하고 빚을 졌다. 나는 당신이 없다면, 다수 무명의 그들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약한 존재다. 각자 이토록 약하고 고독한 주체들이 '우리'로 공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그 취약함과 의존성 때문에, 그 누구도 타자에 대한 책임 윤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타자에 대한 공존과 협력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버틀러에게는 주체의 벗어날 수 없는 취약성이 삶, 나아가 공통적인 삶의 원리로 긍정화된다. (28쪽)
실존적이고 구조적인 취약성. 서로에게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각이 특히 눈에 띈다. 버틀러를 한 권, 딱 한 권(당연히 『젠더 트러블』) 읽고, 아, 나는 버틀러를 더는 읽지 못할 거야, 라고 말했으면서 버틀러 한 권 더(『비폭력의 힘』) 구매한 사람은 또다시 버틀러가 궁금해진다.
지금 책상 위에 있는 책은 『내일을 위한 내 일』. 300번 대 사회과학 쪽에 페미니즘 칸에서 발견했다. 페미니즘 도서는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희망 도서’를 신청해 두었던 터라, 이 도서관의 페미니즘 칸을 각별히 애정하는데 그 쪽에서 발견한 책이다. 정세랑 작가 파트를 읽고 싶어 뽑아 들었는데, ‘심드렁하게 계속하기’의 고인류학자 이상희님 파트도 재미있을 거 같고, 무엇보다 이수정 교수님 파트를 읽어야 해서. 대출해야겠다.
현재시간 2시 44분. 6시까지지만 5시 50분에 나가야 하니까. 3시간 6분 남았다. 이제 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