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141쪽)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를 읽은 후 제일 먼저 찾아 읽은 책이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였다. 이어서 『한낮의 우울』을 반 정도 읽었고, 올해는 『유쾌한 우울증의 세계』를 읽었다. 우울, 고통, 호소. 이렇게 세 단어가 지난해 하반기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호소는 ‘토로’로 바꿀 수도 있겠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에서 특히 좋았던 건 이 부분이다.
고통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도 아프게 한다. 어차피 나눌 수 없는 고통이다. 지금 나의 이 글도 고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나 읽힐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공감과 위로 대신 이렇게 말한다.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지 마세요.", "안 아픈 사람을 배려하세요 (아픈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안 아픈 사람은 피해 의식에 시달리기 쉽다).", "주문(呪文)으로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세요.” 몸속의 고통을 밖으로 꺼내는 일 - 소리내기 - 은 고통을 줄여준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89쪽)
대부분의 충고는 고통당하는 사람의 ‘곁사람’에게 향한다. 더 많이 들어줘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줘라. 더 많이 사랑해줘라. 저자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고통당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혀둔다.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지 마세요. 안 아픈 사람을 배려하세요. 감사합니다, 를 반복하세요. 선생님은 고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나 자신의 글이 읽힐 거라 쓰셨는데, 정말 그랬다. 이 글을 읽으면서 눈이 ‘번쩍’ 띄었다.
길지 않은 인생살이, 이 세상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나는 그랬다. 요즘에는 의리 없고 배신하고 몰인정한 인간보다 고양이, 강아지, 물고기, 화초, 토마토 모종이 선사하는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이웃들의 ‘간증’을 자주 듣기는 한다.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존재인 인간은 가장 큰 슬픔을 안겨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살고 싶은 희망을 통째로 빼앗아 가기도 하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실망감, 함께한 시간에 대한 환멸, 저주를 퍼붓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모두 다 인간이다.
책을 펼쳐 목차를 보는데 다시 한번 눈이 띄였다. <2장 : 통증의 위치>. ‘친구의 우울과 고통과 토로를 들어주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든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거리 때문이었다. 코로나 이전에도, 아니 훨씬 이전부터, 나는 사람들과의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하는 편이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적다. 적은 편이다. 기대가 적으니 호의에 마음껏 기뻐할 수 있다. 서운하다는 건 기대했다는 뜻이다. 기대하지 않으니 서운할 일도 별로 없다. 나는 그랬다. 하지만 ‘외로워’, ‘외로움이 밀려와’, ‘힘들어’를 반복하는 친구 앞에서, 친구 옆에서, 나는 거리 두기에 실패했다. 다른 친구를 만났을 때,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내 친구가 자꾸 ‘외롭다’고 그래요. 지혜로운 친구가 답했다. 인생, 원래 외로운 거예요. 사람이 많은 자리라 참기는 했지만, 그 순간 그 지혜로운 친구를 꼭 안아보고 싶었다. 인생의 비밀을 아는 그대여. 그대는 어찌 이 놀라운 인생의 비밀을 이토록 편안하게 받아들이는가.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할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137쪽)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에게 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걱정하지 않을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비밀을 말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고통 앞에서도 의연하게 혼자인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나를,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혼자보다는 같이 사는 편이, 함께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고통을 없애는 과정이 다른 사람의 고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그 고통에 질식되지 않으면서도 고통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할 수 있을까. 잘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나를, 나는 아는데.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