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탐닉』이 워낙 강한 느낌이라 이 책은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다. 굳이 비유하자면, 『탐닉』이 고소한 향의 진한 에스프레소라면 『단순한 열정』은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다고 할까. 두 책을 읽는 순서가 바뀌었다면 좋았을걸.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너무나 뜨겁고 절절하게 애달프다. 그녀의 열정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본다. 본래적으로, 태생적으로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지만 나는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내겐 왜 이런 마음이 없는 걸까. 그녀의 사랑이 ‘일시적’이었다는 건 중요하다. 와해에 가까운 이런 정신 상태로 그녀는 거의 2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이렇게 5년, 10년을 사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즉, 그녀의 열정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었던 건, 그가 끝까지 그녀의 완벽한 소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 완전히 가지지 못했기에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건 아닐까.
더 많이 주고 계속 주면서도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그녀, 그를 왕자님으로 대우하는 그녀의 모습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멈추지 않는 시간을, 영원히 기억될 순간을 선물해줬으니. 그녀는 그의 이런 사랑에 만족해한다. 까칠한 나와는 다르다.
<해설 :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에는 그녀의 작품과 관련해 그녀의 인생이 소개되는데, ‘자서전’, ‘자전적 소설’, ‘혈통소설’ 나아가 ‘오토픽션’으로 불리는 ‘자아의 글쓰기’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자신이 속했던 계급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지식인이 자기 부모와 계급을 되돌아볼 수밖에 상황에 대해서는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디디에 에리봉이 떠오른다.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를 들으면서 사랑의 열정은 나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23쪽)
위의 본문과 관련해서, 해설 중에 이런 문단이 있다.
단순한 열정에 빠진 문학교수는 예전처럼 바흐를 듣거나 사르트르를 읽지 않고 유행가와 영화에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부르디외의 견해에 따른다면 문화소외계층이 도무지 진입할 수 없는 취향 영역이 음악이다. 다시 말해 신분상승과 더불어 취미, 의상, 입맛 등이 바뀌지만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가는 전남편의 권유로 가까스로 바흐를 듣게 되었지만 연인에게 버림받자 <마태수난곡> 보다는 실비 바르탕의 노래에 절감하게 된다. (해설; 86쪽)
어제저녁에 소파에 반쯤 누워 이 부분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아, 부르디외. 부르디외의 말이 옳았어.
10여 년 전 일이다. 평생교육원에서 유아 피아노 수업을 듣게 되었다. 수업해주시는 교수님은 유아 페다고지 쪽으로 일가를 이루신 분이어서, 수강생 중 몇 명은 지방에서, 한 명은 제주도에서 매주 서울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활달하고 에너자이저와 같은 교수님께서 어느 날엔가는, 신세계 정용진 회장 이야기를 하시는 거다. 그때는 ‘멸콩 논란’ 한참 전이니까,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그냥 고현정의 전남편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때였다. 교수님께서 그의 트위터를 인용하시며 그가 클래식을 얼마나 골고루 넓고 깊게 듣는지, 전공자인 자기도 모르는 곡을 좋아하고 강추하더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 나는 클래식 들으면 졸리던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더란다. 교수님도 이야기 말미에 어렸을 때 듣는 음악의 중요성, 클래식을 어려서부터 듣는 환경에 대해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떤 문화가 더 고급이다, 혹은 저급이다, 라고 나누는 것 자체가 우습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런 구분과 구별을 기본으로 하는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김동률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왠지 더 우아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이고. (나만 그렇습니까?)
말로는,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만, 순간순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은 나보다 더 클래식을 좋아하고 더 많이 들었으면 하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교육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해보지만, 실제 효과는 매우 미비하다. 손열음 연주회, 실황 공연에 데리고 가고, 나 혼자라도 김선욱 피아노 독주회 다니고, 한국의 자랑 조성진이 쇼팽 콩쿨 1위했을 때 쇼팽 악보집 사서는 연주 플레이시키면서 악보 읽는 모습 보여주고, 라흐마니노프 아무리 크게 틀어놓아도.
눈치 100단, 사회생활 만랩의 귀염둥이 아롱이는 실컷 놀다가, 슬슬 발동 걸린 내가 “이제 (공부하러 방에) 들어가야지?”, “(공부) 할 거 시작해야지?”라고 말하기 정확히 1분 전에. 김광석, 이문세, 박효신, 성시경, 잔나비, 아이유, 에일리 노래를 플레이한다. 그렇게 지혜롭게 4분을 번다. 엄마가 말로는, 김선욱의 베토벤 해석이 제일 맘에 든다고, 김선욱 진짜 좋다고 하지만,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은 잔나비인 걸 아롱이는 아니까.
짝궁의 공부. 오른쪽의 아이는 32 나누기 52 하다가 집에 갔고, 왼쪽 아이는 턱 jaw 외우고 있다. 맞은편 아이는 <Unit. 3. 일반 동사의 과거형> 보고 있고 그 옆의 아이는 노트정리 하다가 지금은 종이 접고 있다. 책 읽는 아이는 대각선에 딱 한 명. 그 옆에, 또 그 옆에 중학생들도 다 문제집 풀고 있다. 아, 문제집이 문제가 아닌데 말이지요.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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