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분업 노동의 정착과 가부장제의 발달,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통해 여성 종속은 견고해졌다. 여성의 목소리는 음소거 되었고, 여성의 역사는 지워졌다. 마저 읽어야지 하면서 어젯밤에 이 문단을 읽는데, 에이드리언 리치가 생각났다.
사고하는 남자들 중 누구도 생각하는 대가로 자신의 자아 정의와 사랑에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사고체계를 창조하는 과정에 여성이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 힘인 성별 통제(gender control)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394쪽)
여성은 단일 집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여성은 이미 고대 사회에서부터 ‘사물’이었고, 그래서 교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암소의 운명과 고대 귀부인의 운명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결합으로 탄생된 여성의 노예화(374쪽)는 지참금을 넉넉히 소유한 고대 귀부인이라 할지라도 가구의 우두머리인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지배 아래 평생 종속되도록 강제하는 힘이 있었다.
이것을 깨달은 여성이 겪는 곤란함. 이 무거운 굴레를 어렴풋이 인지한 여성의 방황과 고민. ‘사고하는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자신이 ‘이상하고 별스럽다’고 생각하며, 시를 쓰려는 자신을, 창조하려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쓰는 천재 여성의 암울함이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에서는 보인다.
내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아이들을 원했고 (학계에 몸담고 있는 50대로서는 드물게) 기꺼이 도우려"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도우려" 하는 것은 너그러운 행동으로 이해되었고, 가족 내에서 진짜 일은 남편의 일이자 남편의 직장생활이었다. 사실 우리는 수년간 이 문제를 문제 삼지조차 않았다. 나는 작가가 되려는 나의 몸부림을 사치이자 별난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내 일은 대개 돈이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이라도 글을 쓰기 위해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면 심지어 돈이 나갔다. 1958년 3월, 나는 이렇게 썼다. "남편은 내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한다. 하지만 운을 떼는 건 언제나 나다." 나의 우울과 폭발적 분노, 덫에 걸린 느낌은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는 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안겼는데도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143-4쪽)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여성성의 신화』로 초대박을 치고 미국 여성 운동의 양지를 걸었던 베티 프리단마저도, 그 유명하고 놀라운 책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하지 않았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고 궁금했다.” 스물다섯의 나이로 남성과 여성의 성에 기초한 계급-카스트의 존재를 고발(『성의 변증법』, 31쪽)하고 성구별을 철폐하고 여성과 남성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공존하는 새로운 세상을 예견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알아챈 여성들, 그 견고한 성벽과 그 무게와 파괴력을 간파한 여성이라면. 미치지 않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미치지 않은 채로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의문과 분노, 연구와 또 연구. 공부와 공부를 거듭해 이 책을 완성한 거다 러너의 마지막 충고를 옮겨본다.
가부장적 사고의 바깥으로 나가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고(thought)의 모든 알려진 체계를 향해 회의적이 되는 것이며, 모든 가정들과 서열짓는 가치와 정의들에 대해 비판적인 되는 것이다. … 우리 머릿속에 있는 위대한 남성들을 없애고, 그 남성들을 우리 자신으로, 우리의 자매들로, 익명의 선대 여성들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훈련된 사고인 우리 자신의 사고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결국, 그것은 지적 용기, 즉 혼자 우뚝 설 수 있는 용기, 우리에게 닿는 것보다 더 멀리 뻗으려는 용기, 실패를 감수하는 용기를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사고하는 여성에게 가장 큰 도전은 안전과 승인을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비여성적인' 자질 -세계를 다시 질서짓는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최상의 자기과신인 지적 오만 ㅡ 로 옮겨가려는 도전이다. 신을 만드는 자의 자기과신, 남성 체계건설자들의 과신으로. (396-7쪽)
알려진 사고 체계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내 머릿속 위대한 남성들을 지우고, 위대한 여성들의 시와 소설로 그 남은 자리를 채우기. 나 자신의 사고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기. 혼자 서는 용기를 기억하기. 실패하더라도 멈추지 않겠다는 결심을 계속하기. 세계를 다시 질서 짓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재정의의 주체가 되기. 비여성적인 자질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자기 과신, 지적 오만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새로, 다시 시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