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부장제 문화와 의식이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형성해왔는가를 자료로 입증해나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은 생산 수단과 재생산 수단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꾸준히, 성적으로 또는 다른 측면에서 치욕을 당했다. (25쪽)
사진은 이수정 교수님의 국민의 힘 공동선대위원장 임명 반대 시위 모습이다. 채워줄 부분이 있고 가르칠 부분이 있어 직책을 맡기로 했다는 이수정 교수님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분의 평생의 커리어가 도리어 ‘이용’당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는 별개로,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대다수 여성의 권익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에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마음은, 그대로다.
댓글 몇 개를 읽어봤는데, 이런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페미니즘 집회는 여성들만 참여하지만, 안티 페미니즘 집회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참여한다. 이 집회가 무슨 여성 혐오 집회냐? 저 뒤에 보이는 여성들도 여성 혐오자라는 뜻이냐. 그 뒤는 어김없이 뒤따르는 페미 정신병 등등.
계급, 인종, 종교 등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남성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는 데 반해, 페미니즘은 여성 대부분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이 하나의 사조, 하나의 주장으로 간략하게 설명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각각의 위치에서 여성들의 삶은 제각각이다. 유럽의 백인 여성과 미국의 흑인 여성, 제3세계의 유색인종 여성과 남미의 가난한 라틴계 여성의 삶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현저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성계급’이 존재하고 성 카스트 하에서 여성이 ‘이등 시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일부 여성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남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자라는 페널티를 극복하고 그 자리에까지 올라설 수 있지만, ‘여자’라는 이유는 언제든 수직 몰락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을 그 이데올로기의 주된 집행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부장적 통제의 가장 유해한 요소 중 하나다. (『요즘 애들』, 883쪽)
가부장제의 종속을 어느 범위까지 보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사회와 유리된 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그 기대에 요구받는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은, 비교적 안전하고 쉬운 방법은 누구보다 열심히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미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여성’임을 알지 못한 채. 안티 페미니즘 집회에서 <페미니즘 반대한다>라고 적힌 표어를 들고, 앞줄에 설 수 있을 정도의 신념. 가부장제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정도의 신념이 필요하다.
『제2의 성』에서 보부아르는 말한다. 여자들은 다른 계급, 다른 인종의 여성들보다 몇몇 남자와 더 긴밀한 관계에 매여 있다. 여자들은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우리들’이라고 말한다. 흑인들 역시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체로 확립하면서 부르주아와 백인들을 ‘타자들’로 바꾸어 놓는다. 여자들은 – 모호한 시위에 머무르는 몇몇 집회를 제외하고 –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자들’이라고 하는데, 여자들은 자신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말을 다시 쓴다. 여자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을 주체로써 자처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러시아에서, 흑인들은 아이티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인도차이나 사람들은 인도차이나에서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들의 행동은 상징적인 준동에 불과했다. … 여자들에게는 그들 고유의 과거도, 역사도, 종교도 없고, 프롤레타리아처럼 노동과 이행의 연대 의식도 없다. (『제2의 성』, 32쪽)
이것을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전 시대에는 여남간의 이러한 차이와 차별을 우주의 원리로 이해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여성으로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겪었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이건 뭔가 이상해, 이건 불합리한 일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여성은 극소수다. 대부분 천재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짓의 벽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건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정신병원에 오는 여성 환자들은 친절하게 치료를 받거나 전문적인 의료 행위를 받지 못했다. 온전하게 제정신이든 산후 우울증이나 다른 우울증을 겪든 간에, 환청을 듣든 ‘히스테리에 걸려’ 마비가 되었든 간에, 잘 교육받고 유복하든 못 배운 노동계급 출신이든 간에, 비교적 특권층 생활을 했든 구타당하고 겁탈당하고 학대당했든 간에,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더 이상 해내지 못하든 그런 역할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오랫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냈든 오랫동안 너무 부지런히 일해 측정할 길 없는 만성피로에 시달렸든 간에 말이다. (『여성과 광기』, 19쪽)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기 어려운 ‘여성’이라는 계급이 ‘동일하게’ 취급되는 현실에 대해 읽는다. 중간중간 여러 번 숨을 골라야 했다. 그녀의 문제 제기가 ‘당연하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너무 좋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저자가 학계에서 ‘미쳤다’는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고 연구하고 탐구해서 이런 저작으로 자신의 주장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깨달음을 주는 책, 늦은 밤 몸을 부르르 떨게 하는 책, 다시 한 번!이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읽고 있어서, 그래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