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쯤이던가, 근처 도서관에서 주차를 하다가 화단 벽을 받아버렸다. 화단은 멀쩡했고 내 차에만 벽돌색 스트레치가 선명했는데 아픈 마음은 차치하고 어쩌다 이랬나 하는 생각에 크게 상심했다. 화단이 낮아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도 삐삐소리가 들렸을 텐데. 급하지도 않았고 워낙 천천히 후진하는 나인데 이게 정말 웬일인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때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던 것 같다. 김동률을. 무려 김동률을.

 

후진만 안 되는가 전진할 때도 김동률은 안 된다. 운전할 때 자세는 앉아 있는 자세다. (이미 아시는바) 오른발로 차의 전진과 멈춤을, 핸들로 방향을 조정한다. 실제로, 차는 스스로 움직인다.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고 (주로 브레이크에 발 올려놓는 사람), 엑셀을 살짝살짝 밟아가면서 핸들을 양쪽으로 살살 돌리면, 차는 스스로 잘도 간다.

 


김동률의 노래를 듣는다. <답장> 8번 트랙, <Contact>. 멈춰버린 것 같은 3초가 흐르고 김동률이 말한다.

 

널 첨으로 스친 순간

절로 모든 시간이 멈췄고

 


그때, 김동률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 순간, 어깨에 힘이 빠진다. 핸들을 잡고 있는 팔꿈치를 지나 손목, 그리고 손가락 끝을 거쳐 내 몸의 어떤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내 몸 안의 모든 힘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212.

 


네가 나를 만지면 그 작은 울림에 쏜살같이 멀리 튕겨서

빛이 다른 공간에 한없이 떠돌다 타버릴지 몰라

널 놓치지 않게 나를 잡아 줘

 


김동률이 노래할 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0그램이 된다. 이언 맥큐언의 『속죄』 (많은 분이 읽지 않으셨기를)서재 장면’ (많은 분들이 기억하지 못하시길) , 토미가 된다. 내가 했던 모든 약속을 파기해 버리고 싶다. 내가 했던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꿈꿨던 모든 시간이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토미가 서 있는 낭떠러지에 내가 서 있다. 김동률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다.

 

어디에선가 우울증 초기 증세 중 하나가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거라고 하던데, 나는 십 년 전부터 그랬다. 나는 노래를 딱 하나, 앨범에서도 딱 하나만 듣는다. 물론 전체를 다 듣고, 그 노래가 바뀌기도 하지만, 듣는 노래는 딱 하나이고, 그 하나를 들을 때는 딱 그 노래 하나만 듣는다.  

 

 



여기까지다. 컴퓨터에 이렇게 써놓은 게 몇 달은 되었고, 김동률 음반을 넣어 페이퍼로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지지난 주에 도서관에 갔다가 책추천 친구 북트럭을 만났고, 『한낮의 우울』을 뽑아왔다. 예전에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내게 , 우울증 같아. 나 우울증 걸린 것 같아라고 말할 때,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궁금했다. 우울증 증세가 있는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 우울증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자신이 그걸 인지할 정도면 우울증이 아닌 거 아닌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우울함이 확 밀려왔어라고 자주 말하기에 그 친구를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책을 대출했다.

 

어떤 사람은 훨씬 더 쉽게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게 정말 뇌 혹은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의사를 만나고 약을 처방받고 제대로 관리하면 정말 증세가 호전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노력해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영원히 나을 수 없다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1년에 350일 이상 명랑한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친구를 위해 이 책을 읽어봐야지 했다.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들이 우울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들의 우울함이 내게 무거워서. 그런데 이 책을 읽다 이런 구절을 만났다.

 


우울증 환자들은 고통에서 광기로의 이행을 묘사할 때 항상 "벼랑 끝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매우 물리적인 묘사로 심연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다. 벼랑 끝은 실제로 극히 추상적인 은유이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표현을 쓴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벼랑 같은 데서 떨어져본 사람은 거의 없으며 심연으로 떨어진 사람은 더욱 없다. 그랜드 캐니언? 노르웨이의 피오르?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 심연은 발견하기조차 어렵다. 사람들에게 심연에 대해 물으면 거의 일치된 대답이 나오는데 그 첫째는 암흑이라는 것이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은 햇빛으로부터 캄캄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38)


 

김동률을 들으면서 내가 느끼는 막연함, 그 아득한 느낌이 우울증 환자들이 그들의 절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비유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내게 김동률은 나의 미세한 우울함 상자를 여는 비밀 열쇠라고 할까. 김동률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그런 걸까. 정말 그런 걸까. 김동률을 들으면 난 더 우울해지는 걸까. 책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은데 도서관 책이라 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3일 뒤에 찾아오리. 알아보리. 꼭 밝혀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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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10 17: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이번주에 김동률 앨범을 많이 들었는데 우울증 초기 증상일까요? 저는 CD로 음악을 들어서 한 음반을 반복해서 듣는데 그렇다면 종합 우울증? 😅 전 책 읽으면서 김동률 음악은 금지 입니다.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ㅎㅎ

Contact 노래 너무 좋아요. 듣다보면 그렇게 사라져 버릴것 같아요 ㅋ 답장 리페키지에 있는 곡들 다 좋아요 ㅜㅜ

단발머리 2021-10-10 22:21   좋아요 2 | URL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새파랑님~~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ㅎㅎ 김동률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해진다는 거요.
근데 저도 새파랑님과 비슷해서 책 읽으면서 음악을 못 듣습니다. 음악에 집중하게 된다지요.

Contact 노래 너무 좋지요. 전 이 노래랑 <사랑한다 말해도>랑 아이유랑 부른 <동화>를 좋아합니다^^

독서괭 2021-10-10 18: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김동률 노래에 대한 최고의 찬사인 것 같네요^^ 목소리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한낮의 우울 흥미가 생기지만 넘나 두껍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1-10-10 22:23   좋아요 3 | URL
그걸 좀 김동률씨가 알아줬으면 합니다. 미쿡에 있으니 알 수 없겠지요. 목소리는 뭐, 국보급이죠. 20년이 한결같습니다.
한낮의 우울은 일단 그 두께로 말합니다. 우울의 무거움, 우울의 끝없음 같은 것을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1-10-10 20: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윽.....김동률!!!!!!
가장 좋아하는 가수에요.근 20 년 넘게 해바라기 하고 있어요.^^
단발머리님의 이런 글은 제가 더 설레는군요^^
저는 김동률 가수가 참 수줍고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백하고,미안하다 사과 많이 하는 가수의 이미지를 품고 노래를 줄곧 들어왔었는데(주로 취중진담,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출발,감사,기억의 기억의 습작등의 노래만 반복해 들어서 그런가 봐요??) ...오늘 다시 답장과 contact 들어 보니 허~~~억!! 충분히 우울감을 품고 있네요?ㅜㅜ
근데 답장 뮤비를 오늘 첨 봤는데 헐~~현빈!!!!
현빈이 등장하니 절대고독!!!!!ㅋㅋㅋ

근데 전진후진 김동률 금지란 제목이 얼추 맞는 것 같아요.제게 있어 김동률은 첫사랑 같은 가수라 늘 20살 시절 느낌으로 듣는데 우리 신랑은 전진할때 차안에서 김동률 노래 틀어 놓음 졸음 운전 한다고 금지시켜 달라는군요ㅜㅜ
나랑 너무 안맞는 남편이지요ㅜㅜ
그나저나 한낮의 우울 책도 구입하셔야 겠어요.제2의 성과 같은 두께라니.....
도서관 재대출 반납을 여러 번 하셔야 겠네요ㅋㅋㅋ

단발머리 2021-10-10 22:29   좋아요 2 | URL
아, 책나무님도 김동률 좋아하신다니 언제 한 번 김동률 콘서트라도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한 번도 안 가 보았지만 말입니다. 올려주신 곡들 정말 다 좋아요. 특히 저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하고요. 아, 베스트를 꼽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기억의 습작 아니겠습니까. 꺅!!!!

책나무님 이미 아시겠지만 전람회 2집이 또 우울감으로서는 정말 최고봉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노래자랑 시간이네요) 전람회 수록곡 중에 <이방인> 넘 좋아요. 유투브에서도 금방 찾아지니까 한 번 들어보세요!
저는 제가, 명랑하고 가볍고 큰 걱정없는 제가, 이렇게나 김동률을 좋아해서 항상 신기합니다.

한낮의 우울은 한 번만 더 대출해 보고 구입할지 결정하려고요. 사는 것도 문제지만 놓아둘 데가 없어서요^^

붕붕툐툐 2021-10-10 2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요를 진짜 안 듣는 편인데, 그나마 김동률은 좋아하고 잘 듣는 편이라 단발머리님 이야기를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거 같아 다행이에요~~ <한낮의 우울> 다 읽고 꼭 얘기해주세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 거 넘 멋진거 같아요. 전 항상 나, 나, 나밖에 없는 거 같아 반성합니다~

단발머리 2021-10-10 22:32   좋아요 3 | URL
저도 가요를 진짜 안 듣는 편입니다. 친구들이 알려줘야 겨우 찾아듣고 하거든요. 음반 사서 듣고 싶은 가수라지요, 김동률은요. 툐툐님도 김동률 좋아하신다니 넘 반가워요.

한낮의 우울은 일단 <제2의 성>의 거대한 파도를 넘은 뒤에 (혹은 넘으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성하지 마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반성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부만두 2021-10-10 21: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요새 종현 노래 반복해서 들어요. … ㅜ ㅜ

단발머리 2021-10-10 22:33   좋아요 2 | URL
전 종현 노래 이하이가 부른 <한숨> 밖에 모르지만 들을 때마다 넘넘 슬퍼요. 유부만두님도 그만 들으세요 ㅠㅠㅠㅠㅠ

mini74 2021-10-10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평생을 따라다닌 검은개가 있다는 처칠 말이 생각나요. 단발머리님의 검둥개는 김동률입니까 ㅎㅎㅎ 저도 김동률 정말 좋아해요.

단발머리 2021-10-10 23:15   좋아요 2 | URL
처칠이 그런 말을 했었군요. 저는 김동률을 아주 좋아하고 또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한낮의 우울>에서 제가 김동률을 들을 때의 감정에 대한 부분을 읽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 마음은 그대로이지만요 ㅎㅎㅎ

hnine 2021-10-1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낮의 우울> 저 책. 두툼한데도 긴장하며 끝까지 읽었던 책이어요. 우울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롯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것, 뿌리칠 수 없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1-10-11 08:39   좋아요 0 | URL
아… hnine은 벌써 완독하셨군요. 정리해주신 문장이 이 책의 핵심 같아요. 인간이라면 모두 우울을 뿌리칠 수 없다는 말씀이요. 얼른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