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도 아프게 한다. 어차피 나눌 수 없는 고통이다. 지금 나의 이 글도 고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나 읽힐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공감과 위로 대신 이렇게 말한다.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지 마세요.”, “안 아픈 사람을 배려하세요(아픈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안 아픈 사람은 피해 의식에 시달리기 쉽다).”, 주문으로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세요.”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 89)

 


밤마다 아껴 읽었던 정희진 선생님의 이 책에서, 위 문단을 최고의 문단으로 꼽는다. 선생님의 통찰이 제일 빛나는 부분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혹은 고통을 통해 성숙해진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대한 정면 승부이고, 그녀의 글을 읽고 내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고통이 자기성찰, 반성,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때는 고통이 끝난 이후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추천하는 엄기호의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었다. 목적이 있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 책읽기였다. 최근에, 고통에 대한 호소와 그와 함께 밀려오는 감정 때문에 힘들었다.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가족과 친구가 쏟아내는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의 호소를 받아내는일이 고통스러웠다. 어느 정도 그러한 고통의 말과 소리, 호소를 반사해 버린 나 자신 때문에 또 며칠이 괴로웠다. 왜 더 사랑하지 못할까. 왜 더 받아주지 못할까.

 

몰려드는 후회와 괴로운 심정에 답을 찾고 싶어 책을 읽었다. 나눌 수 있는가. 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내 몫으로 돌아온 고통과 고통의 호소를, 그 소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인가. 나는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인가. 이기적인 사람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괴로웠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좋아하는 친구가 이렇게 힘든데, 그런데도 나는 계속 이기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기적인 나를 새로 발견했고, 그런 내가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굽힐 수도 없었다. 이미 충분히 이기적인 사람임을 인정한 이상, 도로 착해질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들이 미웠다. 나를 더 이기적으로 만든 그 사람들이 싫었다.

 

반 정도 읽었을 때, 밤늦게 퇴근하고 돌아와 식탁에 마주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나는 답을 찾고 있는데,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답이 안 나와. 답이 여기 안 나오네. 그걸 몰랐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앉은 사람이 말한다. 답이 어디 있어. 원래 책에는 답이 없잖아.  

 



아니었다. 책에는 답이 있었다. 그다음 날, 그다음 페이지를 읽다가 나눌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엄기호의 을 찾았다. 고통을 덜어내는 방법으로 엄기호는 글쓰기와 걷기를 권했다. 그리고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다. 고통을 함께 할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당하는 사람 곁에 있어 줄 수는 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고통은 동행을 모른다. 동행은 그 곁을 지키는 이의 곁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의 곁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곁에 선 이의 위치는 고통의 곁의 곁이 된다. 이렇게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되는 것, 그것이 고통의 곁을 지킨 이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곁에 선 이는 고통을 겪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249)

 


인권 활동가도 아니고, 그들을 위해 대단한 희생을 하지도 않은 내가,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더 오랜 시간 고통의 호소를 들어줄 수 있을까. 더 많이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을까. 없는데.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허락된것은 신이나 사물이다. 인간人間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홀로‘라는 단수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무엇과 함께 그 사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이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성격인 ‘복수성 plurality‘ 이라고 말했다. - P59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과‘를 내야 한다. 이 성과는 내가 자족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있는 차원의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던져진 사회에는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과에 대한 판별 기준이 있다. 무엇이 인정받을 만한 성과이고 어떤 것은 아무리 해도 인정받을 수 없는 성과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마다 이런 성과에 대한 인정 체제가 있으며 우리는 선택권 없이 그 안에 던져진다. - P139

응답을 요구하지도, 응답할 수도 없는 말을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 말을 듣는 이는 자기에게 하지 않는 말을 그저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고통을 겪는 이는 "너 아니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만, 듣는 이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그는 아마 똑같은 말을 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 말을 듣고 응답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그 앞에 있으며 무한 반복되는 자기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 P227

홀로 남았을 때 사람은 비로소 ‘남을 넘어선 남‘, 남이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자기와 함께하고 있는 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남을 넘어선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그에 비추어 자기에 대한 앎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자기 안의 복수성을 인식하게 되고그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이해를 구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때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도 자기를 납득하지 못할 때가 아닌가? 그것은 인간이 바로 ‘자기의 복수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 P236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1-06-02 12: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 진짜 단발님 엄청 애정하는 거 아시죠? 애정하는 단발님이 애정하는 이 책 읽어서 너무 좋아요….ㅠㅠㅠㅠ 엄기호 슨생님 글도 진짜 좋죠? (저 지금까지 읽은 한국 사회과학 책들 통틀어 정희진님 다음에 엄기호 선생님 꼽아요.) 희진샘과 다르게 엄슨생님은 조금씩 힌트와 답을 주시는 것도 사실이예요. 이분이 쓰신 책들 저는 거듭 읽었는 데 1위에 ‘공부공부’가 2위에 리셋이 3위에 고통이 있어요!!! 공부공부는 힘내서 꼭 읽어주세요.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함께 걸으면서 꼭 이야기 나눠요. 곁이 되어 좋아요. 고통의 곁의 곁의 곁이 되겠어!!
(공감포인트 발견해서 심각하게 호들갑중인..나..ㅜ)

단발머리 2021-06-02 13:04   좋아요 6 | URL
엄기호 슨생님은 정희진선생님과 친하신 듯 해요. 그런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저는 여러 작가의 글을 모아놓은 책에서 엄기호 슨생님 글은 읽어보았고 단행본으로는 이 책이 처음인데 좋았어요. 필요한 독서였구요. 공부공부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이 댓글이야말로 고통의 곁의 곁의 곁의 곁이 되는 거네요. 고마워요, 쟝쟝님!!

다락방 2021-06-02 14:16   좋아요 4 | URL
(메모메모) 엄기호 공부공부.. 오케.

공쟝쟝 2021-06-03 14:42   좋아요 0 | URL
정희진님, 엄기호님 두분 친하신거 저도 어디서 읽고 반가웠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친하다니... 나도 껴줘~~~ 이럼시롱~~~
덧붙여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읽을 당시에는 몰랐는 데, 지금와서 떠올려보니 미셸푸코의 ‘자기배려‘를 텍스트로 차용했었던 것 같아요..(나도 모르는 나의 일관성)라고 적다가 책 뒤졌는데 푸코가 있긴 한데 각주로만 찾았고 본문에서 못찾았고 ㅋㅋ 되려 ‘한나 아렌트‘와 ‘서발턴‘의 스피박이 나와서 기뻐짐.... 여러분 읽자.

얄라알라 2021-06-03 16:55   좋아요 0 | URL
비오던 날이었나? 기억이 조금 가물한데, 멀리 대학로까지 북토크 들으러갔던 날이 생각나네요. 엄기호 선생님 책 읽고, 오호!!! 꼭 뵈어야겠어!! 하며 찾아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티나무 2021-06-02 15: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섬주섬... 집에 있는 책 중에 엄기호 이름 찾으러 갑니다. 있는 거 먼저 읽자! 어딘가 있을 겨...

단발머리 2021-06-03 11:44   좋아요 0 | URL
있을 거라 저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화이팅!!!

수이 2021-06-02 1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엄기호 엄기호 공부공부 엄기호 엄기호 메모메모

단발머리 2021-06-03 11:44   좋아요 0 | URL
이게 세트에요. 엄기호공부메모 공부엄기호메모 메모공부엄기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6-03 12:23   좋아요 0 | URL
공부공부공부 메모메모메모 엄기호엄기호엄기호 단발님 단발님 단발님❤️🧡💛💚💙💜

공쟝쟝 2021-06-03 14:43   좋아요 0 | URL
공부공부 메모메모 엄기호엄기호 단발님단발님 수연님수연님

얄라알라 2021-06-02 1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직 89쪽까지 가지 못하고, 요새 책 안 읽는 병에 걸렸는지 중간에 쉬고 있는데 89쪽 쯤에 눈 힘주고 읽어야겠네요.
저도 ˝곁의 곁˝을, 엄기호 선생님께서 강조해주신 덕분에 전혀 생각못해본 차원으로 생각이 나가더라고요. 엄기호 선생님 팬덤이 확실하네요^^

단발머리 2021-06-03 11:46   좋아요 1 | URL
책 안 읽는 병의 치료법은 책을 당분간 안 읽으면 다시 읽게 되고 싶어진다고 들었습니다. 89쪽을 포함한 이 챕터 전체가 좋아요.
엄기호 선생님 책이 처음인데 전 좋더라구요. 일단 다음책은 공부공부로 정했구요^^

얄라알라 2021-06-03 16:54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어요?^^ 저 어제 한국 사회 마약 중독 실태를 다룬 책을 새벽 2시까지 꾸벅 졸며 읽으며 ㅋㅋㅋ책 안 읽는 병은 잠시 지나가는 병이었어요 ㅋ

붕붕툐툐 2021-06-02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고민은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외침으로 보이는 걸요~ 읽고 고민하시는 것만 봐도 너무 좋은 사람~ 곁에 있어주는 거, 나 자신을 나눠주는게 젤로 중요하고 좋은 거죠?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단발머리 2021-06-03 11:48   좋아요 1 | URL
그것은 아니었지만 ㅠㅠㅠㅠㅠㅠㅠ 툐툐님 제안으로 그렇게 한 번 해볼까요?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와 들어주는 이웃들이 있어 너무 감사해요. 알라딘 최고에요. 저를 좀 더 나눠주는 거는.... 조금만 더 생각해볼께요. 흐미 ㅠㅠㅠ

수이 2021-06-03 12:21   좋아요 2 | URL
저는 안 나눌래요 ㅋㅋㅋㅋㅋㅋㅋ 대신 단발님과 툐툐님이 나누어주시면 이 사랑을 갖고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아자!

붕붕툐툐 2021-06-03 14:16   좋아요 1 | URL
알라딘 최고에 저도 한표!ㅎㅎ
수연님께 마구마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