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친절한 알라딘이 1년 통계를 올려주면서, “올해 당신이 사랑한 작가는 대프니 듀 모리에입니다”라고 알려줬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지라 내심 흐믓했다. 올해 나의 선택은, 대프니 듀 모리에이다.
작년에 『인형』을 읽었고 올해는 『나의 사촌 레이첼』, 『레베카』, 『자메이카 여인숙』, 『희생양』까지 다섯 권을 읽었다. 중고서점을 통해 『새』를 구입했는데 그건 아직 읽지 않았다. 바람이 황량하고 마음이 쓸쓸한 어느 날엔가 읽으려고 아껴 두고 있다. 그럼 남는 책은 현대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뿐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라고 하면 대부분 『레베카』,를 떠올리는데, 나는 『나의 사촌 레이첼』이 훨씬 더 좋다. 간단하다고 하면 간단하고 복잡하다고 하면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나의 사촌 레이첼』의 화자는 레이첼을 연모하는 남성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젊은 남성의 시선으로 레이첼을 관찰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약자가 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불리하다. 화자 필립은 아름다운 저택에 드넓은 영지, 그리고 영지에 속한 사람들까지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더 견고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무일푼의 젊은 미망인 레이첼 앞에서는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다. 사랑 앞에서 무력한 가엾은 영혼은 그렇게 존재한다.
반면에 『레베카』,의 화자인 ‘나’는 부모를 여의고 하인에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정처없이 떠도는 젊은 여성이다. 우연히 만난 드 윈터 백작 맥심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그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맥심이 자신과 결혼해 맨덜리로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고민한다.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 남자를 따라가도 되는 걸까. 고민의 시간. 그녀는 사랑을, 드라이브를, 맨덜리를 선택한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저녁 메뉴를 결정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의 파티 안주인이 되는 걸 말고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나’에게 파국이 찾아온다. 점점 더 가까이.
결혼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신부의 심경, 결혼 생활의 위선과 그 안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레베카』,에서는 솔직하게 드러나있다. 『레베카』,를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밖에 읽지 못 했다. 『레베카』, 읽기가 불편했던 이유는, 『레베카』,가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면은 알고 있고, 일면은 모른 척 하고 살았던, 혹은 모른척하고 싶었던 현실을 대프니 듀 모리에는 망설이지 않고,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레베카』,는 좋지만, 좋아하지만, 좋아하기 어려운 그런 작품이다.
결혼 속으로, 귀양살이로, 나는 느꼈고 알았다. 지금부터 언제나 외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건 이미 익숙해진 빨간 오팔 반지 무게의 일부였다. 그것은 집시의 요술 구슬처럼 반짝거려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반지, 루비로 만든 시뻘건 붕대, 푸아레와 워스가 만든 명품 의상들. 그의 러시아 가죽 냄새 - 이 모두가 공모하여 날 완전히 유혹했다. 그래서 나를 멀리 실어가는 것을 기쁘게 기대라도 한 듯 기차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을 때, 타르트와 엄마의 세계가 어린애 장난감처럼 실에 끌려가듯이 지금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쉬워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8쪽) |
2년 만에 반갑게 재회한 『피로 물든 방』도 어리고 젊은 신부가 결혼 생활에서 예상하는 불안감을 그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피로 물든 방』의 ‘나’는 푸른 수염의 마지막 아내이다. 더 이상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과 미래의 푸른 수염의 아내들을 구원한, 용감한 마지막 아내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궁금하다. 하성란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가 미국 출판전문잡지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선정한 2020 최고의 책 TOP 10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한국문학이 선정된 것은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이후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하는데, 18년전에 출간되어 1만 5천부 정도 팔렸다는 이 책이 미국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니 작은 궁금증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이미 죽었기에 그 존재조차 잊혀졌을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서글프게 실패하고 말았는지 그게 너무 궁금하다. 모든 결심은 결국 하나로. 읽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