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모임이 중단된 교회 소모임 중에 내가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모임은 구역예배이다. 각 가정에서 4-7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예배하는 소모임인데, 그 모임에서 4년 이상 매주 만났던 집사님이 한 분 계시다. 편의상 그 집사님을 A집사님이라고 하자.
모임에서는 교회에서 배포하는 예배순서지를 참고해 예배를 드리고 같이 기도를 한다. 목회자가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첨예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참석자 전원이 전업주부이고 아이들, 육아, 교육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성경에 관련된 이야기도 가끔 하게 되는데, 독실한 신자인 A집사님과 날라리 구역장인 나는 종종 가정 내 남편과 아내의 ‘지위’에 관해 이견을 보였다. A집사님은 성경에 ‘쓰인 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따라서 아내들은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에베소서 5장 22-24절)이 옳다는 의견이고, 나는 하와가 아담의 돕는 자일 뿐 아니라 구원자였다는 의미에서, 가정 내에서 아내와 남편의 지위는 동등하며, 한 쪽이 일방적으로 한 쪽에게 순종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쪽이다.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다. 만약 A집사님이 그런 해석에 근거해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다면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A집사님은 보통 거리는 걸어서 다니신다. 웬만하면 장 본 물건을 들고 다니고 배달도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아이 셋을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먹이고 키운다. 365일 맨얼굴이다. 과시적 소비를 하지 않는다. 여행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나는 가까운 거리도 차로 이동한다. 아이들에게 완전조리식품, 반조리식품, 배달음식을 먹인다. 당연히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 내 맨얼굴을 보면 사람들이 놀란다는 이유로 가볍게라도 화장을 한다. 과시적 소비의 정점, 옷 구매를 좋아한다. 원피스는 각종 디자인을 망라하며, 요가복은 색상별로 구비하고 있다. 최근 2-3년 사이 부쩍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 비행기를 많이 탔다는 뜻이다.
나는 에코 페미니즘을 읽는 시간이 ‘반성문’의 시간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책을 시작할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고,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누가 누구에게 ‘페미니스트라면 어떠해야 한다’거나 ‘페미니스트가 그러면 되니?’라고 말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 사람이 어떠하다, 혹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으로 페미니즘을 한계지을 수 없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이렇게 반성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일은 나의 잘못이며, 나의 한계이다. 반성은 나의 것이다. 나만의 것이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면, A집사님은 나보다 훨씬 더 ‘페미니스트적’이다.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친화적이다. 정직하고 진실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나, 또 한 명의 ‘입만 살아있는’ 1인은 다시 한 번 절망에 빠진다. 책을 읽으면 뭐하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을 읽고 쓴다는 것 무슨 의미인가.
글을 쓰는 일은 밀실 속에서 혼자 하는 행위일지 모르겠지만 그 자체로 사회적 실천이다. 글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그것이 세상을 향한 무기가 된다. (『여자-공부하는 여자』, 민혜영, 105쪽)
그녀의 말은 큰 위로가 되지만 이제는 사회적 실천을 넘어 실체적 실천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그럴 때가 되었다고, 내가 나에게 말한다. 사람은 변한다.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통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바꾸어 갈 수도 있다. 나는 ‘젖과 알, 인간 어른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과 ‘고기는 동물의 시체다’의 『육식의 성정치』를 읽은 후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를 덜 먹게 됐다.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누구든 고기 먹는 일이 어려워진다. 아직 맥도날드 상하이 스파이시 치킨버거와 닭강정, 고기만두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폭풍성장 아롱이의 성장기가 지나고 나면, 육식 섭취를 조금 더 줄여 볼 계획이다.
텀블러를 꺼내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장바구니도 여러 개 챙겨 두었다. 한 끼라도 더 내가 만들어 먹이려고 한다. (오늘저녁: 카레라이스) 덜 읽으면 더 자주 집밥이 가능하다. 며칠은 반성 모드로 가야할 테고, 갈 길은 멀다. 어떻게 마무리해야하나 고민되는 찰나, 한살림에서 보내주었던 카톡이 생각난다. 에코로 가는 길, 에코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의 작은 실천 사항들이다. 여기 딱 세 개에서 시작한다. 가볍게 세 개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