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춘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청춘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어색해진 제 껍데기를 끌어안은 채 붙박여 멈춰 서 버린 낯선 느낌이며, 갈피를 잃은 정신을 가다듬는 혼란의 숨 가쁜 상태로 그려지곤 한다. 누구나 청춘의 뜨거움에 질식하고 때론 그 청춘이 죽을 만큼 힘겹게 덮쳐 오는 불편한 정경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시절만큼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때도 없다. 이처럼 청춘의 열병은 젊음을 시샘하는 삶의 통과의례처럼 빗나간 육신과 마음을 다듬고 깎아 제자리에 맞추는 조탁의 과정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청춘은 홧홧한 열정의 에너지를 쉼 없이 발산하고 방황도 때로는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일까? 세상을 향한 청춘의 몸짓은 서툴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삶에서 결락된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 지상과제인양 삶의 이상理想이 되기도 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그렇기에 청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꽃처럼 화려하기도 눈꽃처럼 시리기도 하다. 세상은 무언가 정체모를 이물감이 어딘가에 탁 걸려 그 답답함으로 인해 온몸으로 번지는 막연한 불안처럼 냉소적이고 허무하다. 어쩌면 청춘이 이방인의 고독에 어울리는 멜랑콜리의 입맞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청춘은 푸르른 몸짓만큼 회복도 생기도 충만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이별, 사랑, 연민, 상처는 새살이 돋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 젊음에 후회가 될지언정 습관처럼 회고하고 읊조리는 시절이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타협이 될 수도 포옹이 될 수도 있겠으나 누구나 거쳐 야 할, 건너야 할 통과제의가 아니겠는가.




        신경숙 작가의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존재의 상실을 통한 아픔과 부재에 대한 허망한 교태가 합작한 청춘의 출발선에 선 가녀린 영혼들의 절규와 같이 살처럼 콕콕 날아 와 박힌다. 오염된 세상의 파편에 쓰러지고 울부짖는 청춘의 뜨거운 몸부림은 위태롭다. 세대의 접경지대에 선 청춘은 오르페우스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교차된 혼돈의 무게에 힘겨워한다. 성장의 순간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고는 하지만 산화되지 못한 슬픔은 미래의 시간마저 과거의 자리에 포위당하고 말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설계된 대로 흐르지 못하는 삶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체성의 혼란은 현기증이 난다. 그것이 누구나 짊어진 원죄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처참하고 가혹하다면 청춘은 또한 아련해진다.




        신경숙 작가는 사랑을 통해 청춘을 위무했다. 긴장이 도처에 떠돌고 아픔이 곳곳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던 그 독재의 시절, 청춘을 노래했다. 작가의 눈을 통해 재단된 청춘은 문장의 행간을 이어주고 공감을 유도한다. 이미 전작 <엄마를 부탁해>로 눈물샘을 말려 버린 그녀의 필력이기에 달리 썰을 풀어낸다는 것은 중언부언처럼 민망하다. 그래서 온전히 나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생각이 머무는 곳에 안주하기로 했다. 그녀가 설정한 젊은 영혼들의 외침에 동참하고 세파의 부침에 맞서고 싶은 충동이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2000. 민음사.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에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한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겪고 방황하고 또 상처받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기록은 그래서 치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경숙 작가의 글은 페이소스처럼 정열적이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




        소설은 화두를 던진다. 청춘에 대해. 신경숙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던진 화두는 크리스토프의 명제에 오롯이 담겼다. 소설 속 인물인 윤, 단, 명서, 미루를 가로지르며 관통해 나가며 깃든 삶의 무게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인식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짊어진 어깨 위 아이의 무게를 홀로 감내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고독의 항체처럼 질긴 운명인지 모른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자조 섞인 희망에서 슬픔을 극복해 낸 순간의 떨리는 윤의 바람처럼 나는 그들과 연대감으로 묶였다. 이따금 삶은 날 선 세상에 아프고 뜨겁다. 고통은 삶을 무두질하며 신열이 열꽃처럼 번져 오르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흡수되고 소실된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은 삶의 좌절과 절망을 구분 짓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희망이 된다. 타성에 젖지 않은 순수의 청춘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크리스토프의 메타포는 세상에 맞서는 자세이며 자아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소설 속 윤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픔이 오래도록 침전되어 빛을 상실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한 아픔은 윤에게 트라우마다. 도시에 나와 옥탑 방에 기거하면서부터 걷기 시작한 행위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그림자를 뒤쫓는 과정을 통해 번민하고 슬퍼함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끌어안는 행위로 새겨진다.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가늠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든 어딘가로 이어지든 길은 걷기를 동행하는 벗이다. 윤에게 걷기는 씻김과 떠나보내기의 과정쯤으로 보아진다. 그러므로 명서가 윤에게 이어지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감정이 침잠하고 가라앉을 때 방심한다. 방심은 긴장을 놓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앞서며 아픔을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윤에게는 명서와 아픔을 연대하고 서로의 틈입 사이로 밀어 넣는 관계로 발전한다. 반면 미루는 언니를 잃었다. 미루에게 언니는 세상이었고 존재 그 자체였다. 그 옛날 외할머니 댁을 찾았다 닥쳐든 뜻밖의 사고로 인해 무릎을 다친 언니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은 미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일로 인해 빛을 잃어 버린 별처럼 침몰하기만 하던 언니는 어느 남자를 만나고 서야 안정과 행복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행복은 길지 않았다. 남자의 실종, 사회적 타살 소식에 언니는 분신자살로 맞서고 미루의 손에 지울 수 없는 상실의 기억을 아로 새기게 된다.




        윤에게 단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주는 길목에서 만난 풋풋한 관계다. 윤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으로 방황할 때 단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단은 먼발치에서 윤을 지지하고 윤의 앞에 나서 길을 가는 방해물을 제거하고 등불이 되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하지만 윤과 단은 친구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단이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방황할 때 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단은 내성적이었지만 굳건했고 순수했다. 그러나 단의 순수는 오염된 현실에 내 버려진 가녀린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방인으로 내모는 구실이 되었다. 단의 내몰림은 그렇게 총기자살을 가장한 도피로 이어지며 청춘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렇게 단과 윤의 관계는 비이성적인 영역에 머문다. 기다리는 사랑은 피를 말리고 허파를 타들어가게 하는 아픔이다. 나는 단과 윤이 맺어지기를 은연중에 바랬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가 던진 화두를 푸는 키워드는 아님을 또한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 또한 삶의 단면임을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명서와 윤의 관계가 낙관적이지 못했음은 그 시대의 비릿한 울분과 상황이 만든 아픔임을 비로써 인식하게 된다. 또한 윤에게 미루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미루가 언니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실종된 언니의 남자를 찾아 헤매는 것도, 윤이 걷는 것도 닮았다. 그들의 이동은 회피의 수단이라기보다 맞서서 찾는 본성의 감정에 충실한 흔적이다.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픔을 연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오묘한 진실을 찾는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그 마음과 닿아있다. 그래서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바랐으며 명서가 미루를 잃은 절박한 심정을 위로하고 제 것인 양 끌어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건너간다는 의미는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그쪽으로 간다는 말은 고독 속에 뒹구는 영혼을 끌어안겠다는 포용의 시도처럼 들린다. 더불어 희망 섞인 바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크리스토프를 언급한 윤 교수의 존재는 젊음을 인도하는 길잡이처럼 그려진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원망도 미움도 열정도 시간 앞에서는 허무하고 부질없다. 윤 교수를 통해 작가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고 보다 깊이 있게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마치 한 순간 암전 후 찾아드는 광명처럼 윤 교수의 말은 새록새록 마음으로 새겨진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자아를 찾는 탈출구가 되며 충실한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삶은 어디서든 계속된다는 말처럼 별빛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경숙 작가의 이 소설은 성장소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젊음 이들의 사랑을 간결하게 빗어 낸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공명하게 한다. 윤과 단, 명서와 미루를 통해 세상이 할퀴고 간 트라우마의 흔적과 극복의 과정을 공감하게 되고 하나의 지향점을 만들며 성장해 간다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처럼 희망이 울려 퍼지고 기쁨과 환희가 커져가기를 작가의 프리즘을 통해 드려다 보았다. 슬픔보다는 기쁨에 저울추가 기울어지기를 바랐다는 신경숙 작가의 바람은 이 책을 통해 충실한 성공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쓰리고 아픈 기억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고 살기 마련이므로 세상과 용서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소망해 본다. 작가의 여명의 바람처럼 모두 뜨겁게 달궈 굳어진 손 위의 돌을 내려놓고 낙관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기를 말이다. 용서는 자신과 하는 약속이며 삶을 바로 세우는 균형추에 다름 아니므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8-3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오는걸거예요.^^

穀雨(곡우) 2010-08-30 09:54   좋아요 0 | URL
마기님, 오랜만이네요.
이제 수면위로 나오신건가요...^^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온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yamoo 2010-08-3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습니다만...이 리뷰는 추천을 안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넘 잘 봤습니다~

穀雨(곡우) 2010-08-31 00:01   좋아요 0 | URL
야무님, 추천 감사합니다.
소설은 안 읽으시나 봅니다.^^

yamoo 2010-09-02 10:12   좋아요 0 | URL
소설은 그리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꽂히는 작가 위주로 읽습니다.. 신경숙 작가 작품은 멀리합니다..ㅎㅎ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남은 대한민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강남에 산다는 것은 곧 부자라는 공식이 절로 형성되니 말이다. 강남에 있다고 해서 모두 부자라는 것은 물론 아닐 테지만 강남이라는 메타포는 엄청난 부자프리미엄을 뱉어내며 모두 부자로 격상된다. 그러니 강남으로의 입성은 곧 새로운 유산계급에 편입되는 즉각적인 과정이 아니겠는가. 비록 치열하고 던적스러운 과정을 딛고 내달린 결과물이라도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키기에 불나방처럼 맹목적으로 퍼덕거리며 날아 오른 욕망의 우듬지가 아닐까. 그러므로 강남은 욕망의 집합체이자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욕망의 가면은 부풀린 질퍽한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간에게 있어 욕망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므로.




        황석영 작가의 이 책 <강남몽>은 강남의 연대기를 심층적으로 되돌려 곱씹어 보며 이러한 사유를 통해 헛된 욕망의 부질없음을 넌지시 일깨워준다. 오늘날의 강남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고 천덕꾸러기에서 욕망의 결정체로 이어지는 그 시대적 배경과 세태를 날카롭고도 고스란히 뒤엉켜 풀어낸다. 황석영 작가는 설정된 인물들의 자화상을 통해 다각적인 삶을 조명하고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쓰러지고 피어나기를 반복하는 연결의 중추를 강남으로 설정했다. 강남의 문화, 정치, 경제, 사회의 매몰된 기억의 단층을 복구하고 연결시킴으로써 오늘날 강남이 쌓아 올린 이미지에 미끄러지듯 이내 닻을 내린다. 강남열풍에 휩쓸리게 만드는 광풍의 정체가 무엇인지 금세 득달같이 그려진다.




        강남의 얼개는 비릿한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을 뭉개고 짓밟으며 피어난 적자생존의 꽃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정의했다. 수직적 굴종의 상태를 통해 대타자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라캉의 욕망에 관한 정의는 강남의 실체와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말죽거리에서 타워팰리스에 이르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땅덩어리에 강남신드롬으로 채워지는 그 같은 기현상은 욕망이 빚은 전주곡이다. 저자는 그 무엇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진실의 실체를 까발리며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통해 스산하게 접목시킨다. 그러므로 저자가 연결한 알고리즘의 연결망을 통해 강남은 재탄생되고 새롭게 세워진다. 보이는 강남에 보이지 않던 강남이 욕망을 뚫고 비쳐진다. 강남은 한국사회의 명암을 숙명처럼 끌어안은 거대한 블랙홀에 다름 아니다. 한낱 지명이 부를 상징하는 대체물로 뒤바뀐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의 시작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기억으로부터의 출발이다. 해방이후 한국 사회는 이념과 주의, 지역감정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다. 야합과 쇼비니즘이 난무하던 격동의 시절을 거쳐 산업근대화의 기치 아래 민주주의는 왜곡되고 자본주의는 물질을 탐닉했다. 고도성장의 소산이 곧 삼풍백화점이었으며 날림과 부조리가 합작해 만든 치욕의 상징이자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통해 나는 자본주의에 굴욕당한 허망함과 비루함을 동시에 맛보았다. 탐욕의 괴물이 무너질 때 파묻혀 버린 소외받은 이들의 아픔을 보아야 했으며 혐오스런 탐욕의 부질없음에 탄식했다. 저자가 망각의 기억으로 밀려 난 삼풍백화점사건을 필두로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소실된 기억의 복원임과 동시에 무너지는 세태를 반영한 장치다. 애 태우고 마음 아파하던 그날의 기억을 통해 전염병처럼 퍼지는 탐욕의 맹수를 길들이고 삶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희망의 독백은 동심원처럼 채워진 저자의 연륜이 소환해 낸 염원인지 모른다.




        이야기는 박선녀의 회상을 통해 김진이 등장하고 다시 이어받고 갈마드는 과정을 통해 일정한 고리를 형성하는 옴니버스형태의 반복이다. 허구와 현실이 한순간 교차하는 상황은 황석영 작가의 특유의 노련미가 돋보이며 문장을 부리는 탁월한 터치와 감각적 재구성을 통해 몰입은 극에 달한다. 상하 수직으로 나뉜 다양한 군상들의 파노라마 같은 풍광을 통해 작가가 탐구한 중심은 바로 권력이다. 변화무쌍한 시대적 환경에 따라 권력에 적응하는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또한 권력에 침투한 자본권력의 장악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사실적인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경험과 내공에 의해서 불어나오는 감정표현의 힘은 호기심과 옅은 기억의 단층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빨려 들어 갈 듯 몰아치는 엄청난 흡입력을 생산해 낸다. 시대극이 주는 존재감을 통해 정치권력세계의 암영, 조직폭력세계의 비열함, 부자들의 특권의식, 소외받은 계층의 고단함을 여과 없이 투영함으로서 우리는 보이는 너머의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에 눈을 뜨게 만든다.




        이처럼 작가가 설정하고 포섭된 인물들의 행동반경은 일정한 고리를 형성한다. 강남의 연대기를 단권에 담아내기 위해 인물들 간의 연결과 반향은 이 책을 보다 사실적으로 탈바꿈하는 포인트다. 김진, 박선녀, 심남수, 홍양태, 임정아 5명의 인물을 하나의 구심점을 지향하며 숨 가쁘게 질주하는 역사의 현장을 동행한다. 김진을 통해 대한민국의 1930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의 근현대사를 격동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김진은 만주에서 태어나 일본의 정탐꾼으로 해방과 동시에 미국정부요원이 되어 권력의 근저에 위치했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의 배경과 풍광을 통해 남로당사건, 몽양 여운형 암살사건, 제주 4.3사건 등 굵직굵직한 정변들을 끌어안으며 근대화에 희생당한 민주화의 암울한 시대상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김진은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강남에 입성하며 부를 거머쥔다.




        반면 박선녀는 비루한 집안에서 태어나 계층을 극복하는 계기로 미모의 힘을 신봉한다. 한 순간 손안에 날아든 기회를 부여잡은 박선녀는 룸 쌀롱을 경영하며 밤의 세계를 서서히 점령해 나가며 부동산투기로 쌓아 올린 부유한 삶을 걷게 되며 김진의 첩이 되어 자본권력에 편승하게 된다. 이렇게 박선녀는 심남수를 만나면서 부는 가속화된다. 말단 세무공무원으로 퇴직한 부동산업자 심남수는 우리 시대 강남의 불패신화를 형성한 소위 말하는 투기꾼이다. 작가는 그를 통해 현대아파트 수서택지지구 고위공무원 분양특혜로 떠들썩하게 했던 그 장본인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이렇게 부의 지도가 강남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을 자본권력을 중심으로 조밀하게 엮어 나가는 작가의 의도는 어긋남이 없다. 또한 홍양태를 내세워 비열한 거리로 대변되는 주먹세계의 중심에 포섭하며 자본권력을 향한 불잉걸을 피워 올린 것 또한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래서 작가가 빚은 임정아의 설정은 더욱 도탑게 다가온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틈바구니에서 만난 박선녀와 임정아의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한바탕 꿈처럼 평행세계를 걸어 온 두 인물의 조우는 의미심장하다. 희망을 꺾지 않고 행복을 위해 살아 온 임정아의 강단함과 비열한 욕망으로 세워 뭉친 박선녀의 나약함이 포개지는 상황은 이 책을 관통하는 모든 이념을 뛰어 넘는 장면이다. 무엇이든 이루어 낼 것만 같은 자본권력의 침몰이다. 침몰은 시멘트 더미에 깔리고 먼지에 산화되어야 하건만 끈질긴 욕망의 덫은 헤어날 길이 없다. 한줌 햇볕도 채 들지 않는 다닥다닥 붙어 솟은 열망을 깔고 앉아 강남으로의 끝없는 집착은 되풀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강남불패신화와 교육광풍이 몰아치며 천문학적인 자금의 맥이 꿈틀대는 이곳 강남은 쉽게 무너지지 않아 보인다. 영욕과 부침의 틈 바퀴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이야기꾼으로 불리 우는 황석영 작가의 이 책 <강남몽>은 불콰하게 달궈진 상태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강남을 욕망의 원형으로 그려내며 슬프고도 억제된 쓸쓸함은 긴 여운을 남긴다. 아울러 질곡의 역사와 함께 다층적인 깊이를 드러내는 작가의 넉넉한 잣대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작가를 통해 본 강남은 곧 갈급 하는 목마름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도처에 떠도는 속절없는 희망이 떠도는 곳이 아닐는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0-07-31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급하는 목마름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네요. 그래서 세종시는 꼭 필요하겠죠?

穀雨(곡우) 2010-08-02 09:03   좋아요 0 | URL
잔뜩 부풀린 풍선처럼 팽창하면 터지기 마련아닐까요. 세종시는 원안대로 수용되어야 합니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글에도 도락이 있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기지가 번뜩이고 시류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매번 알 수 없는 즐거움에 빠진다. 판에 박혔다거나 식상한 이야기가 진부해서 싫다는 것이 아니라 매력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바야흐로 구매자가 판매자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는 시장, 즉 바이 마켓Buy's market시대가 아닌가.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눈에 확 띄지 않으면 변변한 기회도 없이 아웃당하는 게 대세다. 물론 독점자본에 의해 왜곡된 공급현상과 여론몰이에 의해 수요를 창출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문학을 담보하는 주된 동인은 감동과 재미다. 하지만 문학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문학은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본질이다. 또한 문학은 자본주의의 논리로 포섭하기 이전에 그 시대의 창을 대변하는 가늠좌다. 그러므로 문학이 인류의 역사에 당당하게 굳건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도 책이 없다면 곧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문학적 본질의 심오한 패러다임을 떠나서 기존의 관습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면하면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구심에 휩싸이게 한다.  




        배명훈 작가는 괜한 엄살을 부리지만 떠오르는 플레이메이커 감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끄집어내는 능력도 그렇고 펼쳐 보이는 재주 또한 절묘하다. 생활인의 채취를 풍기다가도 이내 우주로 날아가고 신을 영접하는 극단을 오고가는 서커스단처럼 현란하다. 그는 상상력이라 추켜세우는 신형철 평론가의 극찬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그를 퍼뜩 알아채지 못한 한국문단을 나무라고 신소리를 뱉어도 이제라도 배명훈 작가를 발굴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할 일이겠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문학 동네 젊은 작가상 모음에서다. 이 책의 타이틀인 <안녕, 인공존재!>로 접했더랬다. 그때 기록한 리뷰를 발췌하여 인용한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당시의 감동처럼 배명훈 작가의 다른 글에서도 유사한 맥락을 더듬었다. <크레인, 크레인>에서는 인간의 나약함과 존재의 출현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맛보았다. 크레인이 당최 신이라니 누가 할 수 있을까. 가벼움 속에 천착한 심오한 물음은 돌발적이다. <누군가를 만났어>는 판타지장르를 보는 긴장감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찰한다. 고고심령학회라는 비현실적인 연구와 공룡발굴단, 폭발물제거반의 기형적인 만남을 적절하게 배합해고 어울리게 만드는 것은 배명훈 작가의 알싸한 필력이리라. 이러한 신묘한 이야기는 <매뉴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의 눈에만 펼쳐지는 휴대폰설명서에 기록된 비서秘書같은 상상력은 보이는 것을 부정케 의심케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다. 두 작품에서 배명훈 작가는 규명되지 못한 이전의 세상을 보았는지 모른다.




<코스모스>의 칼 세이건은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배명훈 작가의 모든 글은 이에 부합하며 일맥상통한 의미를 갖는다. <엄마의 설명력>이나 <안녕, 인공존재!>는 천문학과 과학의 프리즘을 통해 펼쳐진 화려한 영상을 들여다보는 심정이다.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 존재에 대한 물질현상 등은 날카로운 지식이 자양분이 되었다는 반증이겠다. 논리 정연하고 개념이 반듯한 배명훈 작가의 이야기가 쉬운 구어체를 기폭제로 날아오른데 장애는 없다. 가볍게 날아 오른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감정과 뒤엉키고 고스란히 내려앉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믿기 힘든 것이든 밝혀지지 않은 것이든 허무맹랑하든 상관없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는 명제처럼 그 속에서는 모두 가능하지 않겠는가.




<얼굴이 커졌다>는 킬러의 불협화음 같은 현실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이야기다. 반대로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뉴질랜드 작가 버나드 베켓의 <2058 제너시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에 대해서는 묻는 두 책의 공통점은 뉴웨이브하며 철학적이다. 리바이어던은 철학자인 괴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또한 제너시스에도 그리스철학을 빗대어 진화를 이해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것은 상당부분 닮았다. 또한 대화체로 이어가는 기교마저 비슷하다.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과 이해하는 폭도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살린 실험적인 이야기다. 52만 명의 조종사가 로봇을 움직이고 합체하지만 실제 299명의 주조종사만 지배한다는 가상의 현실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지 싶다. 299명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를 의미한다는 사실.




이 밖에도 <마리오의 침대>는 우화를 통한 사랑의 해석을 엿 볼 수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불편도 감수하며 아내의 코골이를 참기 위해 침대를 넓히고 우주로 이주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엉뚱한 발상이지만 참신한 이야기는 상식을 허무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전의 앞과 뒤처럼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다보면 전혀 뜻밖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논리다. 요즘 시류가 그런 것도 이유가 되겠으나, 배명훈 작가의 글은 올레, 생각을 뒤집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어 낸다는 것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와 맞설 때가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나로서는 대략 가늠하기 힘든 감정과의 낯선 대면에서 연유한다. 소설은 허구라는 외피로 단단히 무장하였음에도 그 치밀한 메트로놈의 정형성을 따라 실재의 경계를 무시로 넘는다. 허구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잰 걸음으로 빠르게 온몸으로 전이되고 나의 삶에 올라탄다.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나를 지배한다. 소설은 서사를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비집고 솟은 무한한 감정들의 총체이자 가면이 수시로 바뀌는 복마 술인지 모른다. 현실과 상상이 용해될 수 없는 성질임에도 이미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일쑤다.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일이 아닌 그것은 있었거나 있음을 예정한 일로 흐려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설은 숨겨둔 감정을 허락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만화경처럼 신기하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엇비슷한 세대의 눈에 비친 이야기라면 연대감은 더욱 공고해 진다.





        2010년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타이틀이 거창하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신선한 피를 지속적으로 펌프질하겠다는 사뭇 진중한 취지다. 물론 읽는 자의 특권을 오롯이 거머쥔 독자인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고답적임은 피할 수 없다. 나에게는 작가를 괴롭히는 쥐어짜는 창작의 고통과 솎아 내야 하는 인생의 카테고리도 필요치 않는다. 읽고 받아들일 최소한의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이 고르지 못하면 쉽게 끊기고 아웃당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과 검증의 단계를 거친 묶음 형태의 책을 쥘 때면 선입견이나 가벼움도 동시에 따라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당혹감을 추스르기 위해 경험했던 축적의 관성이 만든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잘 빠진 글은, 어수룩한 나로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데자뷰를 보듯 기시감에 빠지기도 혹은 모종의 동질감에 연민하며 글은 마음껏 나의 마음을 유영한다. 밀고 당기는 사이 울림은 커지고 정서적 유대는 소통으로 번진다. 어느 새 수상작으로 뽑힌 7명의 글이 문장과 문장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다다르게 한다. 삶에 지쳐 고독의 숲으로 뒤엉켜 음습해진 나의 마음을 청량한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갓 구워 낸 책의 채취가 이와 같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반문하는 피할 수 없는 불안한 자아를 위무하기에 소설은 더 없이 적합하다. 고독과 번민은 불안에서 유발되었으나 타자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사회적 욕망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소설은 범위 내의 현실이 된다.

 




        김중혁 작가의 <1F/B1>은 기발함이 조합한 퍼즐처럼 기묘하다. 어떤 형태나 현상이 상태를 지배한다는 음모이론의 지배적 의사(疑似)의 심리적 표출장치가 신선하다. 숱해 보고 지나치는 층과 층을 나누는 슬래시를 기점으로 표류한 현상은 단락을 지나 우리 사회가 안은 치명적이고 소외된 문제에 정박한다. 실제 집단공동체 생활의 한 형태인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취약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건물관리자연합, 일명 슬래시메니저(SM)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본에 매수되고 문명의 이기와 편리에만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부패하기 쉬운 재물처럼 공간은 쉽게 변질되고 오염된다. 매수당한 통제는 이미 제어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다.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상상력은 무방비에 대처하는 현란한 내러티브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시스템을 구비한 신식건물이라도 관리자의 익숙한 손놀림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거미줄처럼 꼼꼼히 얽히고 지하통로로 이어진 관리자연합의 탄생은 소멸할 수 없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그 속에서 관리자인 그는 세상을 꿈꾸고 현실을 다독이는 갈망의 표현인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선과 선이 만나는 소실점 위에서 <1F/B1>은 트위터처럼 너의 일을 실어 나른다.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한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구애(求愛)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의 마음을 얻는 행위다. 문장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열망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이와는 반대의 대척점에 선 상태는 실연이다. 구애는 위험을 내포한 갈등의 경합상태를 뜻한다. 순조롭거나 험난하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불안한 감정이 유발하는 긴장의 순간을 매끄럽게 포착해 냈다. 고립된 상태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은 본성인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등장한 김은 애도와 축하를 전달하는 화환을 배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편혜영은 그를 통해 죽음을 분해하고 구애를 해체한다. 구애의 완성은 서로의 결핍된 순간이 충만해 진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죽음 또한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상태를 뭉개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편혜영은 어색한 감정 선이 충돌하는 순간을 긴장의 대립과 표출로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미완성의 연속이다. <저녁의 구애>를 덮은 후 나는 갓 우려낸 우동의 개운함보다 통조림의 텁텁함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를 속이고 살아갈까?

        




        변희봉은 입 언저리 어느 부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낯설기만 하다. 뱉어 내지 못한 말이 날것처럼 울대를 자극한다. 물론 존재감만으로 묵직한 실존배우다. 윤인호 감독의 <더 게임>에서 변희봉의 연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관객을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변희봉이 이장욱에 노출되어 포위당한 것은 우연일까? 변희봉이 삶에 구속당한 연극배우의 눈에 비치게 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변희봉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이장욱은 모험을 감행하였는지 모른다. 이야기 속 배우는 삶의 극단까지 밀려난 위태로운 상태다. 아내는 오사카로 공예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이혼을 감행하며 아버지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들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고달프기만 하다. 삶은 이처럼 지독하고 부조리하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을 꿈꾸듯 아버지로부터의 가냘픈 동조는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고단한 세월을 닦아 내는 보상이다. 희망은 절망에서 핀 우아한 꽃처럼 말이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다문화 가정과 불법체류문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감출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지리적인 거리가 인접해 있는 중국인들의 불법체류는 대립과 갈등이 뒤엉킨 채 웅크린 상태다. 매번 불거 터지는 문제의 출현에 나는 정의(正義)에 의문을 갖는다. 규범과 현실을 매조지는 문제의 대처방법은 살벌하다. 분명 명분을 위시하여 처리되었음에도 나의 눈은 불신으로 물든다. 냉혹한 소외의 그림자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위세는 연민을 쓰러트린다. 김미월 작가의 <중국어 수업>은 심란한 무대를 짧은 단문으로 밀어냈다. 짜임이나 틀이 빈틈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어 “짜이젠(다시 만나요) “의 은유적 비유를 통해 희망을 쏘아 올렸다. 희망은 곧 동기가 될 터이며, 동기는 움직임을 바꾸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눈물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준비되어 분출된 정소현 작가의 글에 설익은 응원, 한 자락을 날려 보낸다.




        가족은 이따금 내게 평안한지를 묻는다. 범주에서 벗어난 위태로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맞설 수 없는 아픔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가족은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으나- 언제고 내 편이 될 것 같은 그런 존재다. 나는 그 중심에 집을 연상한다. 집은 회귀할 생물적 본능처럼 돌아갈 보루다. 기약 없는 소식이 제비처럼 넘나들기를 소망하며 봄꽃처럼 따뜻하기를 기대한다. 정소현 작가의 <돌아오다>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비록 해체되고 부서진 가족이지만 정상의 기능을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이야기의 실체는 헛것 또는 유령이 되어 방황하다 가슴을 이내 후벼 판다. 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순간을 통해 침전된 마음을 위무한다. 단절되고 소외된 가족을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 나가는 이 글은,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인상 깊은 이야기다.


        나는 개그맨을 볼 때면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에 감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웃겨야 하는 강박관념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떠 올린다면 웃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깊이를 당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을 처음 대한 나의 인상은 진부한 역설보다는 아픔이 먼저 전해져 왔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의 편차만큼 사회는 빠르고 간결한 즉각적인 배출을 요구한다. 웃기지 못하면 철저히 외면당하고 존재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스무 살 젊음이 어우러져 풋풋함 가득한 시절 만나 결합되지 못한 사랑의 궤적을 뒤쫓는다. 다소 실험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는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은 쉽게 산화되어 소멸될 성질이 아니다. 곰삭혀 묵힐수록 풍부해지는 홍어처럼 글맛이 강하다. 보트피플을 희망한다는 이 작가, 마음에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궁의 노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별궁의 노래 - 잊혀진 여걸 강빈 이야기
김용상 지음 / 순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를 들여다보면 왕이 되지 못했거나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은 치열하다. 필요에 따라 압축되거나 혹은 삭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빈약한 약전이나 기록을 바탕으로 주춧돌을 쌓고 보와 기둥을 세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검은 두건을 쓰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심정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축약되고 매몰된 기록을 바탕으로 잊힌 영웅들의 복원작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이 녹아들어 있다. 발굴자에 의해 소환되어 생생하게 불타오른 뜨거웠던 현장을 토해내기라도 할 때에는 이것으로 모든 긴장과 오류로 점철된 과거는 일시에 무너진다.




        과거는 이렇게 다시 쓰인다. 무너진 그 자리에 새롭게 생명의 빛을 부여받아 든든한 역사의 도량으로 조밀하게 엮이고 뭉쳐진다. 이것은 시간의 물리적 개념을 확장하는 유연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념상 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적 정의는 이념이나 명분, 권력에 의해 편향되고 왜곡된 해석은 심각한 오류를 유발한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로 회귀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을 유지한다면 이 책 <별궁의 노래>는 버려진 역사의 복원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대개 파란만장한 역사의 복기는 후대에 가서 빛을 발하곤 한다. 조선조를 통틀어 암울했던 시기나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 인물이라면 그 후보로 으뜸으로 꼽히고 회자 되는 이유도 그러하다. 게다가 신분, 남녀의 차별이 심했던 봉건제 사회에서 그들의 활약이 더욱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도 호기심을 부추기는 주효한 이유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소현세자는 역사가들의 호기심에 불을 댕기기 좋은 재료다.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여 볼모로 8년간의 모진 고통을 겪었음에도 일신의 명멸을 피하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 그였다. 최근 김인숙 작가의 <소현>에서 볼 수 있듯 애환과 번민의 고통은 이러한 시류를 잘 대변해 주는 빼어난 작품 중에 하나다. 해서 이 책 <별궁의 노래>도 그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저자 김용성의 오랜 신문사 기자의 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원칙과 허구가 완벽한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춘다. 소현세자를 위시하여 주인공인 민희빈 강 씨의 비범한 일화를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살려 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밑천으로 민희빈 강 씨는 여걸로 그려진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합리적인 이성과 기준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향해 경영하는 세자빈의 모습은 시쳇말로 알파 걸의 우상이자 여걸이라고 칭할만하다. 신분의 벽을 온몸으로 밀어 내고 굳건하게 일어선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었던 시대다. 그러나 그녀는 부국강병을 위해 무엇보다 실사구시의 경영이 중요하였음을 통감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강단한 행보와 실용적 의식은 후대에서야 빛을 발하지만 치명적인 독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인물의 강점과 약점을 교차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갈등의 전조가 모두 하나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역사는 늘 그랬다. 개혁의 중심이 곧 폭풍의 진원지였음을 말이다. 그래서 세자빈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전개방식도 고정된 결말을 향할 수밖에 없는 한계치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영역에 철저하게 구속되고 피할 수 없는 영향력 아래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모든 팩션소설은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외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이 지어지고 얼개가 다듬어지면 실록의 단문은 작가의 상상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변신을 거듭한다. 그렇게 태어난 팩션소설은 때로는 기대치 못한 변화를 거머쥐기도 한다.




        이 책은 딱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가려지고 숨겨진 이면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심리적 연대의식도 한 몫 했겠으나 진실을 향한 시대적 반영이다. 권력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고 배척당한 아픔을 통해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쓰지 않겠다는 민중의 염원인지 모른다. 실제 강빈이 김수진이라는 묘령의 인물을 거느리고 개성상단에 버금가는 커다란 상단을 운영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소현세자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였는지 학질에 의해 병사하였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실록에 나타난 모든 기록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의 탄생은 숱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지표가 된다. 이러한 가능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고증의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추측이나 과장된 행적의 부풀림은 부작용이 반드시 뒤따른다. 하지만 이 책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싶다. 명백한 사실성을 배경으로 적절하게 버무려진 상상력이 전체를 장악하였기에 단지 나의 기우에 불과하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김인숙 작가의 <소현>을 함께 읽는다면 재미가 더욱 배가될 것 같다. 김인숙 작가의 글이 짜임새 있게 절제된 아픔을 노래한다면 김용성 작가의 이 책은 끌어안아 분출하는 아픔을 그린다는 차이가 있다. 또 소현세자와 더불어 강빈의 삶도 동시에 접한다면 전체적인 밑그림이 보다 더 입체적으로 형성될 시너지를 제공해 준다. 나아가 두 작가의 상상력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책을 통해 왜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중심에 민희빈 강 씨가 연루되어 일가가 몰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는지 무성한 추측만 난무하지만 작가가 만든 상상력의 탄탄한 프리즘을 통해 기대치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으로 기대된다.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땅에서는 연리지처럼 한데 얽혀 사랑하자 하였네.

아득히 먼 훗날 이 세상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언정

두 사람 사랑의 한은 영원히 끊이지 않으리라

당나라 백거이의 시 <장한가 비익연리 比翼連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0-06-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도 있었군요. 저는 소현세자랑 사도세자 대목만 접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소현세자는 더하지요. 사실 강빈을 알게 된 것은 한국사전이었는데 마지막에 자막 올라갈 때 울었어요--;; 막연하게 조선왕조가 쇄국의 틀안에 갇혀 있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시대에 벌써 서양문물을 접하고 개혁정치를 펼 저력을 지닌 세자와 세자빈이 있었다는 게 참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야사 같은 것 읽으면 인조가 소현세자 부부를 질투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던데...

곡우님이 저번에 써주신 <소현>에 강빈 얘기가 빠져있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말씀대로 상호보완해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곡우님 글은 참으로 정갈하고 단아합니다.

2010-06-22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06-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현을 읽고 이 책 읽으면 좋겠군요. 소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는데 이 책까지 읽으려면 바쁘겠는걸요.

穀雨(곡우) 2010-06-26 16:48   좋아요 0 | URL
비교되는 대목이 한눈에 보여서 좋더군요. 소현에 부각된 인물과 별궁의 노래에 부각된 인물에 대한 대비도 나름 재밌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대하는 시각이 비슷하나 질감이 다르다는 차이가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