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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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향수는 개인의 역사와 밀접하다. 나고 자란 산천의 얼이 담긴 강산의 생명은 이 땅 위에 숨 쉬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가 된다. 그렇다. 역사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시작된 작은 몸짓이 세월이라는 물질을 터전 삼아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 흐름의 시간이다. 그러니 역사에 대한 인식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의 얼에 새긴 정신적 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이처럼 살가운 이유도 그러하다. 처음 책이 출간된 1993년 그 해, 나는 미래를 포부 하던 청춘이었다. 선생의 간결한 글은 여태껏 알던 얕은 지식은 뭉개버리고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되었다. 깨닫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닌 통과하기 위해 알아야 했던 그 모든 역사의 층위를 갈아엎어 버린 선생의 글은 명징했다. 제도권 교육이 형식의 구태에 포위당하고 명분에 허덕일 때, 선생의 답사기는 이 땅위에 태어난 사실에 자랑스럽게 만드는 중심이었다.

이제 다시 문화유산답사기 시즌2가 돌아왔다. 꼭 10년만의 귀환이다. 오래 묵힌 장일수록 맛은 더 진해진다는 진리처럼 이 땅의 문화를 관망하는 깊이가 더 깊어지고 우려진 기분이다. 봉숭아물처럼 어여쁘게 퍼진 글은 선생의 감성조각과 너무도 잘 배합되어 읽는 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해 보았을 그 물음의 공통성을 어찌 그리도 잘 솎아 내고 다져 빚었는지, 실로 이것은 읽는 이의 축복이다. 진심이 없다면 해 낼 수 없는 선생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책은 경복궁을 필두로 선생의 제2의 고향 부여를 정점으로 막을 내린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선생의 묵직한 가르침처럼 청맹과니에 불과했던 눈과 귀를 열리게 한다. 때로는 살랑대는 바람처럼, 때로는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글은 완급을 조절하며 치환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 버려졌거나 망각된 유산의 복원은 진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열린다. 그것은 근정전 앞마당에 박힌 박석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핍박에 의해 훼철되고 도륙에 의해 유린된 이 땅의 유구한 역사와 슬기로운 조상의 지혜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선생의 이 책은 새롭게 쓴 역사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선생이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모든 역사의 기록이 연대기에만 사로잡힌 기형적인 현실의 허물을 벗는 시작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우리네 문화유산에 담긴 오묘한 진리를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로 풀이해 낸 선생의 시선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유상수에는 구들장의 슬기나 구전되는 농사의 기술처럼 대대손손 이어져 온 선조의 지혜를 엿보게 하며 삶을 대하는 처세도 곁으로 배우게 된다. 길 위에서 만나고 연을 맺은 장인들의 숨결을 통해 그 옛날 그 자리에 새겨진 역사의 숨결을 더불어 깨닫는다.

아울러 선생의 글은 에세이를 쓰듯 편안하게 비뚤어지고 굳어 버린 생각의 우듬지를 교정해 준다. 이것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던 선생의 경력이 단단히 한 몫에 했으리라 본다.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스미듯 용해시켜 유연하고 부드럽게 해 준다. 여기에 산천에 자생하는 나무, 풀, 꽃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그 하나하나에 담긴 거룩한 뜻에 감복하게 된다. 그 과정이 명쾌하기도 하지만 놓치기 쉬운 생각을 익숙하게 펼쳐 놓는 단정함이 알알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단순한 기행문과는 격이 다른 결이 곱고 바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의 역사를 회고할 때 아픈 기억의 시간을 떠올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일제강점의 시간 동안 우리의 문화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손실되었다. 그것은 도시의 형태를 바꾸고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본질은 변화시키지 못했다. 우리의 역사가 그네들의 조각배 같은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래적으로 강인했던 이유는 반듯한 정신, 즉 얼에 있다. 선생의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건만 대강의 모양새만으로 조상의 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신묘해서도 아니고 나름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다녀오고 밟은 영암사 쌍사자 석등의 우뚝함에 서 관망할 수 있다.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의 기이한 4등신의 불상에서도 매 한가지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2010.9.1. 김정봉] 

또 다른 함의는 선조들의 수려한 건축, 토목, 조각술에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모든 건축물은 건물로서의 단순한 덩어리가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룬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은 비단 궁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림집의 역사에도 그 하모니가 단아하게 피어난다. 선생이 귀향한 부여의 반교리 폐허를 허물고 지은 휴휴당의 세칸집이 그것과 같다. 휴휴당에 머물며 농촌의 고단한 일상 속에 깃든 풍광을 사색하는 것은 경계의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속에서 매몰된 돌담길을 복원하고 우리네 정서를 회복하는 치유의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매한 시간이다. 

이처럼 풍성한 우리의 역사에 담긴 시각을 넓힌 선생의 책은 부족함이 없다. 선생의 글로 인해 거창에 가면 아픔의 학살현장 외에도 동계고택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순천 선암사에 들러 유쾌한 해우소에 들러 근심 한 자락 풀어 낼 것 같다. 또 낙화암의 풍광에서 더 이상 영욕의 백제의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떠 올리지 않을 테고 그 너머의 역사를 떠올리지 싶다. 따라서 답사는 아는 것에 더해 숨어 있던 세상과 조우하는 신실한 기쁨이 될 테다. 

한 시대, 한 민족의 문화는 건축이라는 나무에 미술이라는 꽃으로 남게 된다.(p.366)

다시 문화유산을 생각해 본다. 선생의 지기 이강승이 쓴 편지 한 꼭지에 소개된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에 깃든 의미처럼 다양한 문양과 형상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돋을새김 하나에 깎이고 패인 세월의 흔적을 따라 유구하게 흘렀던 그 정신이 오롯이 피어나지 않을까.

반갑다, 나의 문화유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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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2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 큼큼 .
 

穀雨(곡우) 2011-05-12 18:15   좋아요 0 | URL
책내음이라면 아주 좋아요. 선생님의 책.
길가에 핀 코스모스향이 날 것 같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