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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김훈선생의 글에서는 향이 피어오른다. 글로 다듬어 뽑아 올린 힘찬 문장들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린다. 선생의 글을 읽고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의 칼칼한 성격이 오롯이 틀어 박혀 각인된 문장들의 태동과 역동감에 절로 흥분된다. 실제와 당위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움으로 반듯한 원형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천리향처럼 마음 속 울림의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인간의 거친 삶을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조탁하고 드러내 보여주기에 감출 것도 덮을 것도 없음을 이내 알아차린다.
인간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인간은 비루하고 던적스럽다는 선생의 말처럼 삶은 치열하다 못해 버겁기까지 하다. 숭고한 이상도 이념도 삶 앞에선 아무도 어찌할 수 없을 테다. 인간의 삶이 우연성의 우듬지로부터 기인한다면 유약한 본능의 기억은 적나라하게 인간을 괴롭힌다. 선생이 조명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목적을 상실한 허무한 날개 짓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삶이란 것은 적절한 균형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의 상태로 회귀하며 유지하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공존의 삶을 추구하는 항상성일 게다. 그렇기에 인생은 음과 양이 빚어낸 조화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말이다. 해서 제 아무리 암울하고 비열하고 구차한 삶에 쫓길지라도 우린 하나의 희망처럼 꿈을 안고 나아가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설정되고 배치된 인물들의 면면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의 틈바구니를 살아가는 대표적인 캐릭터들의 집합체다. 신념을 목숨처럼 경외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결의를 다지던 그들도 생활의 덫에 걸려 끝없는 추락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런 거창한 명분이 아닐지라도 삶이라는 야수의 추격에 몰려 이러지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군상의 발버둥쯤 아니겠는가. 굳이 특정인물을 끄집어내어 낱낱이 해부하고 까발리지 않아도 우리에게 놓인 삶의 모습이 순탄치만은 않은 현실에 자조해지까지 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이토록 암울하기만 하던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자존심은 개나 줘 버리라는 공지영작가의 말처럼 분노와 울분이 샘솟아 오르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그 속에서 익힌 현실의 관성이 새로운 희망의 싹을 절로 움트게 마련이리라.
현대사를 흔히 질곡의 삶으로 빗대곤 한다. 조선왕조 5백년의 넘지 못했던 신분사회의 갈등구조를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청산하고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화의 물결을 넘었다. 이로 인해 우리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의 근간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분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계급과 계층을 나누고 보수와 진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경계의 벽으로 구별 지었다. 해서 김훈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사회를 재조명하고 인간의 불안정한 내면을 투영하고자 한 것은 인간을 추동하는 본질에 더욱 접근하고자 했음이리라. 더 나아가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자 함도 아니고 바로 살아 내기 위한 몸부림의 현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 公無渡河歌, 여옥의 노래 -
차안과 피안으로 나뉘는 안식의 염원은 강은 건너는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김훈선생은 공무도하가에서 보았듯 강을 건너는 행위의 불안정한 상태의 현실을 이상이 아닌 현세에서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화합과 통합의 바람으로 이끌었다. 그 옛날 중생대 쥐라기시절 공룡이 바다로 향한 까닭과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해골 속에 담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진실의 이면도 현재에서 찾았다.
그러하기에 이 책에서 공무도하의 상징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와 닿는다. 백수광부의 아내 여옥이 남편을 잃은 상실의 아픈 현실과 책 속에 설정된 인물들의 아픔은 오롯이 일치한다. 오금자가 자신의 아들이 키우던 개에 죽임을 당하였으나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 장철수가 노학연대를 배신하고 권력의 끄나풀이 되어 삶의 바닥으로 추락하던 아픔, 박옥출이 현실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캐피털백화점화재사건에서 귀금속을 훔치던 아픔, 후에가 베트남의 지긋지긋한 가난이 생산하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도피하듯 국제결혼을 해야만 했던 아픔. 이 모든 아픔의 실체 또한 포위된 현실의 반영이다.
지지리도 고단한 현실을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그들은 또 다른 삶을 산다. 시종일관 욕지기를 일삼던 편집부 차장의 독백처럼 힘겹고 분투하는 삶이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아픔을 끌어안고 이들은 해망으로 찾아든다. 누구나 아픔은 있듯 복잡다단한 일상의 반복된 역겨움에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 또한 아픔을 안고 산다. 그를 위무하고 보듬어 주는 존재인 노목희 역시 화가로서의 치명적인 아픔이 그러하다. 기실 아픔과 상처는 보듬어 주고 품어 치환을 기대한다. 그들의 엇갈린 삶의 명암도 서로에게 주고받는 교감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에 삶은 순환되어 가는지 모른다. 갯벌의 생태가 자연 치유되고 진화의 지층이 겹겹이 기록된 삶의 반복을 통해 흘러가는 연유이리라.
실제 책 속에 던져진 각자의 아픔은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아픔을 탈피하기 위한 행위가 만든 피할 수 없는 삶의 간극을 메워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의 행위는 가냘프기 짝이 없다. 미 공군 폭격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밤섬의 조차기간동안 해망의 원주민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생태가 변하고 환경이 척박해져 유린된 땅을 목숨처럼 지키던 그들도 미군이 떠난 후 득달같이 밀려들던 개발논리의 강자에 엉겨 붙게 된다. 명분과 신념은 이미 물을 건넜으며 더 이상 알량한 자존심 따위로 수치스러워할 단계는 지난 지 오래다.
결국 삶은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가 남긴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비루하고 던적스럽다. 현상이 달라지면 요구도 달라지고 이유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탐욕으로 얼룩진 뺏고 빼앗기는 약탈의 혐오만이 똬리를 길게 튼다. 김훈 선생이 잘라 보여준 인간의 단면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우리네 삶이다. 자본화되고 이해타산의 논리에 변모하고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상실의 시대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서든 계속된다. 비록 가슴 저린 신산한 삶의 무게가 짓누를지라도 숙명처럼 질긴 연을 이어가는 이유는 살아 있음의 허기로움 때문이다.
이처럼 사유하고 숙고한 흔적이 행간을 따라 겹겹이 쌓인 김훈의 글은 생각의 무게를 더 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상황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속물처럼 더러움에 물들어 타락했든 밥벌이를 위해 살아가든 우리의 삶은 채만식 선생의 레디메이드 인생처럼 허무함만 쌓인다. 이처럼 이 책에 투시된 하류인생의 고통과 연민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계층 간 갈등, 맹목적 탐욕자본주의의 열망은 이 시대가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희망의 싹일지라도 이름 모를 땅에도 꽃은 피고 지리라. 우리에겐 암울한 현실보다 희망의 부재가 주는 절망이 더욱 크다. 그러하기에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