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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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경하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만약 고독의 층위가 분절되고 나뉘어져 있다면 누구든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고독은 누구나 공감하고 부정할 수 없는 교집합의 공통분모다. 소외든 고립이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깊은 나락으로 빨려 들어 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흔히 고독한 섬에 붙들어 매곤 한다. 대중 속의 고독,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완강히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또한 누구나 소통에 목말라 하며 해갈되지 못하는 공감의 목마름에 허덕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인용 식탁>은 고독을 노래한다. 옴니버스로 단락과 장을 구분 짓지만 공통된 메타포는 고독이다. 고독을 이토록 보기 좋게 버무려 낸 젊은 작가 윤고은의 글발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디서 이런 고소한 팝콘처럼 아삭하게 톡톡 튀겨 볶아진 글이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총 9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나름의 아우라를 뽐내며 사뿐사뿐 도도한 시선을 내 지르는 힘에 금세 압도당하고 매료된다. 여태껏 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가 만든 상상력은 현란하다. 하지만 글과 글 사이에 들어앉은 행간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다. 건조하게 엮어진 문장만이 스미듯 여미듯 관통한다. 이것이 그미의 필력일까?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라간 그곳에는 텅 빈 허무만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긴 일탈 후 무겁게 짓누르는 허무함이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일인용 식탁>은 도시적 삶의 코드를 통해 매몰되고 소실된 인간을 그린다. 그 자장의 범위 내에서는 혼자서 당당히 식사하는 법을 터득하고, 꿈도 대신 꾸어 주며, 달콤한 휴가 내내 빈대에 굴복당하고, 퍼즐을 맞추듯 인베이더 그래픽을 찾으며 일탈을 꿈꾸는 누군가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녀는 주인공들의 성 정체성을 체계적이며 의도적으로 뭉개 버린다. 이를 통해 중성적 대상, 즉 모두를 향해 누구나 그러하리라는 내밀한 공감을 이끌어 내며 원하는 종착점으로의 유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결국 소설 속 화자들이 곧 당신일수도 아니면 작가 자신일수도 있으리라는 든든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오롯이 만끽해 보자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에 더해 저자의 발칙한 상상력은 당신 안에 잠자던 감성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의 문화코드 짚어 내기는 터를 제대로 잡았으며 주춧돌이 튼실하다. 정이현 작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며 거울에 비쳐 퍼진 영상을 복기하는 것과 같다면 저자의 글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스트가 황금비율로 첨가되어 숙성되고 부풀려진 빵처럼 입체적이다. 하지만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공갈빵처럼 쉽게 오그라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의 박홍도가 베어 문 솜사탕의 자괴감과 허무함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입 안 가득 퍼지는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고독은 현실 속을 점령한 빈대처럼 상상만으로도 불쾌해 진다. 불쾌감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벗어나고 이성은 빠르게 부유물처럼 떠내려가 버린다. 비단 이러한 현상은 도무지 믿기 어렵지만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러니 그녀의 상상이 허무맹랑한 가십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텁텁함에 거북스럽다. 아픔으로 뱉어 내기에는 사소하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광범위하게 퍼진 삶에 무게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배이고 아프기 마련이다. 상처는 시간이 보듬고 무뎌지게 하지만 고독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피어싱의 날카로운 단말마처럼 차가운 냉소가 자리 잡는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 삶에 치이고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성인용품 플라토닉 러브 자판기 판매상의 이야기는 상상과 공상의 어느 경계에서 솟아 난 것처럼 가뭇없어 보인다. 냉소 가득한 현실의 절규에 비례해 짜부라지는 화자의 모습과 현실 속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동일시되는 것은 치열한 경쟁이 낳은 산물이리라. 고립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된 삶의 그늘처럼 야생의 거친 숨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절규하는 것인지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혼자서 폼 나게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원이 등장하고 메트로놈에 맞춰 음식을 주문하고 부지런히 먹는 법을 습득하는지 모른다. “나 홀로식사“의 지존은 뭐니 뭐니 해도 삼겹살 공략이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립된 쇼 윈도우에 갇힌 존재처럼 쏟아지듯 내리 꽂히는 눈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뎌야 하는 살벌한 영역이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멀지 않게 존재한다.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의 경계는 우리를 필요 이상 긴장하게 만든다. 연결된 장면이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상황을 건너뛰고 고립된 상황의 재현이라면 우리는 쉽게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와 함께 라는 심리적 담보에 의해 무탈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혼자는 여전히 민망하다.




        상상이 이처럼 지독하게 현실을 외면한다면 기대한 바와 다르다. 상상은 그저 꿈처럼 말랑말랑하고 블링블링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몽상가의 설렘처럼 조금은 허무하지만 도탑게 다독여주고 위무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작가의 상상은 현실 비틀기를 통해 날것 보다 더 생생하게 버무렸다. 오히려 무게에 눌려 분출된 억압의 잔재를 두텁게 덮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생경한 상상은 현실과 유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과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희망을 읊조렸다면 더욱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결국 상상은 현실을 담보로 시작된 형체 없는 바람에 불과하며 소멸을 예정한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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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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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식은 실체적 표식을 따라 밟은 관념작업의 일종이다. 쓰이는 자에 따라 치우침과 부침이 공존하는 극단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알고 있던 사실과 실제가 다를 수도 있으며 공간, 시간, 상황 등의 조건적 제약에 따라 관점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식을 보는 관점의 일종이지만 실제 역사의 기술방법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문학계의 팩션작업 또한 같은 맥락이다. 기록된 상황의 무미건조한 외피를 박피하듯 들춰내며 상상력의 정서적 이완작업을 병행하는 과정이 팩션소설의 핵심이다. 팩션은 어디까지나 실제를 바탕으로 하나 서술자의 관점을 탈피해 대상인물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미 역사의 시간에 압착된 기록의 범주를 벗어나서도 흩트려 놓아서도 안 되는 정교하고 치밀함을 요하는 발굴작업과 같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등장인물인 소현세자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있었음은 짐작으로나마 가능하다. 철저한 고증작업과 연대기 표를 통한 인물간의 상호관계, 지리적 배경, 정치적 이슈 등 사소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까지 샅샅이 훑고 엮어야 한다는 것에 더해 가공의 인물의 창조는 굳어 버린 의식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과 같음이다. 더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시비비가 불거지는 경우에는 편향된 의도로 재단하기에는 무리수가 따름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저자 김인숙은 말과 말 속, 행간의 잠든 템포를 통해 심상의 변화를 보기 좋게 잡아냈다. 상황적 설명은 심리적 시선을 따라 밀렸났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러운 변주를 통해 실제와의 거리감을 단축한다. 그것은 절제를 통한 미학이다. 닿을 듯 말 듯 전해지는 소현의 마음을 절절히 드러낸 완숙의 절경이다. 한 숨에 달려 시공을 뛰어넘고 소현의 아픔이 곧 읽는 자의 아픔이 되는 감정이입의 숨 막히는 전율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왕이 못된 세자들 중 단연코 비운의 명을 타고 난 인물이다. 아버지 인조의 끝없는 의심과 경계로 일족이 몰살당하는 치욕과 아픔을 겪은 부침으로 점철된 세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득세하여 명나라의 국운이 쓰러질 때 심양으로 아버지 인조를 위해 불모의 신분으로 8년이라는 고난의 세월을 심양에서 보내었다. 결국 청나라가 중화를 점령하고 환국이 결정되고 나서도 인조와의 첨예한 대립에 의한 불화 내지는 내각실료들의 간교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후문이 실록의 여러 곳에 기록된 조선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분명 실록의 명암(明暗)은 과정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 실제 소현세자가 어떠한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는지는 단편의 기록이 전부일 것이며 인조와의 관계와 처한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추측이나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겪었을 아픔에 대해 반드시 인식하고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념과 소신을 바로세우기 위한 확립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역사의식의 통속적인 해석을 넘어 팩션을 통한 변화과정의 함의는 독자들에게 관점의 다양화를 제공하는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팩션소설은 여타 장르에 비해 파급력이 강하고 전이되는 속도가 빠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팩션소설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대상인물을 돕는 가공의 장치와 실존의 장치들과의 관계이다. 이 책에서는 신 내림을 받은 막금이, 신분의 틈을 비루하게 품은 만상, 물과 불의 기운을 품은 흔은 철저하게 가공된 인물이다. 반면 소현세자의 곁을 묵묵히 지킨 효종 봉림세자, 질자(세자의 수행원)의 몸으로 넘지 못할 사랑에 희생된 심석경, 청나라 팔조대왕 중 도르곤의 존재는 사실에 기반을 두나 섬세한 터치로 인해 되살아난 인물이다. 이처럼 두 가지 장치의 상호관계 속에서 소현세자의 완벽한 복원은 실제로 그러하였으리라는 짐작을 뛰어 넘어 가능으로 바꾸는 완벽한 호흡을 뿜어낸다. 고저장단에 맞춰 호흡의 길이를 조절하는 숙련된 작업은 김인숙 작가의 역량이다. 언어를 조련하고 다듬질한 절제의 과정 속에 탄생된 복식호흡이리라. 책 속에 그린 소현세자의 마음이 그와 같음을 절실히 공감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겠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p.316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일컫는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우리는 다양한 생각의 표상을 통찰한다. 이러한 다채로움은 세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는 지침이 된다. 무엇을 볼 것인가는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 달리 변하지만 역사에 새긴 결과 올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이해관계에 따라 묻히고 지워지기는 하겠으나 그 속성이 발현되고 드러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종국에는 빛을 보게 된다. 최근 들어 팩션의 열풍이 번지는 현상 또한 무관하지 않다. 환멸과 번민의 과정을 감내한 그들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회고의 작업은 다가오는 미래를 예행해 보는 이치와 같다. 모든 것이 다르고 변하였다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고 추동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외줄타기를 반복하는 불변의 운명을 타고났음이다. 과거를 이해하고 흔적을 발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잘 만든 팩션소설은 매몰된 역사의 인식을 복원시켜 주는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하기에 김인숙 작가의 글을 만난 것은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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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4-1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댓글을 다는 것 같네요. 곡우님의 리뷰 잘 읽고 있답니다. 다듬고 닦아낸 흔적이 서평에 대한 긴장감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 참 좋아요. 한국사전에서 강비를 다룬 것을 보고 참 인상깊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에서 강비는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김훈의 역사소설의 그 냉철하고 건조한 느낌을 좋아하는데 김인숙씨와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라도 이 책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穀雨(곡우) 2010-04-14 08: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블랑카님. 부족한 글에 좋은 평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김인숙 작가의 이 책에서는 강비가 다루어지질 않았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머문 8년의
세월을 성토하는 내용이며 저 또한 김훈선생의 스타일에 놀랍기도 했답니다. 문장을 다스리는 필력이
흉내로는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능력처럼 보이더군요. 해서 강비를 기대하지는 마시고 다른 리뷰어님들
처럼 말과 말 사이의 깊이를 통해 소현의 아픔을 공감하는 정도로 만족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순오기 2010-04-2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보고 싶게 만드는 멋진 리뷰네요.

穀雨(곡우) 2010-04-26 09:10   좋아요 0 | URL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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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는 남겨진 자에 의해서 기술되고 현재의 흔적을 통해 과거를 더듬는 추적의 지난한 과정이다. 드러난 사실이나 결과도 현장성이 부재한다면 과정의 중추를 제대로 읽어 내릴 수 없다. 사실과 결과의 상호연관에서 우리는 모종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거가 기억한 현장을 현재에 부쳐 사실로 믿게 되며 기록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객관성이 전제된 주관적 해석이 박혀 있는 필요의 모순인 셈이다. 어제까지 굳건히 믿어 왔던 가치의 진실이 하나의 사소한 오류로 다시금 해석되고 베어 나가고 살아나가는 현장을 보면 태생적 모순의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역사를 드려다 보는 해석 작업은 다변적 변수를 이용한 하나의 객관적 과정으로 팩트와의 인과적 연결관계를 되살리는 작업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록된 사실을 토대로 뼈대를 맞추며 살을 붙이고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심오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동일한 결과가 어떤 지점에서 연유하여 흘러 나왔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인과관계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칼의 노래>는 역사소설의 축을 따르지만 전혀 뜻밖의 곳에서 의도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과감함을 생생하게 여쭌다. 마치 경험하지 못한 자를 위해 현장의 살아 움직이는 숨결을 한 움큼 끄집어 와 소중히 들쳐 향유케 하는 그런 수고스러움이 전체를 아우른다. 따라서 팩션은 사실을 배제하고는 힘을 얻지 못한다. 사실과 재창조가 조화를 이룰 때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인식되는 바탕이 되는 것이며 상황을 제대로 보는 얼개에 다름 아니다.

 

이순신은 그 유명함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나라의 얼이자 기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순신의 업적은 뛰어난 전략적 전술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대승을 이뤄 낸 것을 필두로 그의 리더십, 통솔력, 강인함 등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남다름을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글을 지어 만드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자칫 편향된 방향으로 흐르면 돌이킬 수 없는 비판과 통속소설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성웅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키는 작업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냈다. 바로 인간 이순신의 모습과 정체성의 다각적 분석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산다. 또한 드러난 사실과 드러나지 못한 사실에서, 보이는 것과 드러난 것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을 보듬기보다 그 공과에 더 열광하는지 모른다. 베지 못하는 적과 벨 수 없는 적의 차이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완전하게 연결시키는 김훈 선생의 글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은 어느 영웅과 단 1g으l 차이도 없는 역사가 기억한 인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지우고 쓰기를 무던히 반복하며 각고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 노작가의 노고가 가득 담긴 작품이다. 한 줄 한 줄 읽는 이로 하여금 보이는 것의 오류를 치유하는 역동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절제된 언어의 사용과 조화로운 문장력은 글에 날개를 달고 창공을 나는 디딤돌이 된다. '버려진 섬에도 꽃은 피었다.'로 시작하는 책의 서두는 시대적 상황, 계절적 변화, 화자의 심정 등을 그 어느 것보다 잘 대변해 준다. 이와 같은 사물에 의한 상징적 상황설명은 이순신의 번민의 순간을 통해 적절하게 부각됨을 볼 수 있다. 번민은 누구나에게 있는 지극히 대중적이며 인간적인 본성이다. 상황적 지배를 해소하려는 인간적 노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김훈 선생은 청정수를 애타게 갈구하던 이순신 장군의 갈증상황을 통해 갈등을 일시에 해소하려는 희망과 바람을 포개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순신장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결상황에서 고뇌하며 표리부동하는 현실에서 갈등한다. 구국을 위한 충정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서의 갈등과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으로 둘러싸인 숨 막히는 순간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이러한 무한 압력이 지속되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였기에 이순신 장군이 더욱 우러러 보이는 인물인 것은 모두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의 던적스러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나 감성적으로는 그다지 교류하지 못한다. 김훈 선생은 지독한 안개와 같이 온몸으로 퍼지는 이순신 장군의 몸 속 깊이 스며든 아픔의 후유증을 간결한 형상화를 통해 심경을 적절하게 대변해 준다.  이처럼 전기소설의 형식을 표방하며 유지하는 이 책은 더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보듬는 성격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김훈 선생의 글은 더욱 빛을 발한다. 노을이 쓰러지고 일어나는 현상의 다채로움을 통해 인간적 변화를 형상화에 가 닿는다는 것은 세밀하게 구구절절 읊어 나가는 상황적 설명보다 더욱 힘을 얻는다. 굳이 일러 주지 않아도 통한의 아픔과 나아가지 못하는 자의 슬픔을 몰입하여 전달해 준다. 이러한 모든 문장들이 합해지고 더해져 비로소 인간 이순신으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의 기쁨을 우리는 접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처럼 장면 장면 펼쳐지는 인간적인 모습은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밑바탕이 된다. 자신의 셋째아들 면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을 통해서도 그렇고 가뭄과 적의 약탈로 굻어 죽는 이가 속출하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가설적 상황이 주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한 대목이기에 공감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이순신 장군이 왕(선조)의 정치적 상황에 춤추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명나라의 간교한 참여를 통한 탐욕적인 속내에 혐오를 공유하게 만든다. 또한 김훈 선생은 후각적 채취의 정서적 교류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잊지 않았다. 아들 면의 비릿한 젖내음과 연민의 정으로 품었던 여진의 젖국냄새, 아궁이처럼 솎아 붙은 어미의 채취를 통해 인간미를 더욱 진하게 우려낸다.

 

벨 수 없는 것과 벨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삶과 죽음의 변주다. 전쟁의 상황은 오직 죽음과 삶만이 교차한다. 이순신 장군은 필사즉생이면 필생즉사의 심정으로 극한의 순간을 견뎌냈다. 적에게 다가 서지 못하는 번민의 심경을 칼에 새겨 오염된 조국의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려는 염染의 절박함은 겪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생경함이다. 긴장의 고삐를 놓을 수 없는 순간을 마치 그 계통의 무모함을 이해하려는 포용의 심정이다. 이렇듯 이 책을 아우르는 인간적 채취는 인간을 매료시키고 실존적 고뇌를 이해하는 대작임에 틀림없다. 칼의 몸부림을 통해 '징징징' 울리는 서슬 퍼런 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숨 쉰다. 인간의 유약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푸는 열쇠를 찾기 위해 무단히 고뇌하던 성웅 이순신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상념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이 책,<칼의 노래>는 남겨진 자가 먼저 간 이에게 바치는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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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8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전, 칼의 노래 이 첫 문장을 저~얼~대 잊을 수 없습니다. 소설 문장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라는 충격을 받은 이래 김훈이라면 누가 뭐래도 신뢰합니다. 그가 마초든, 허무주의자든, 방관주의적 밥벌이주의자든...
그나저나 코스모스 배달되어 왔던데 기겁할 뻔 했어요. 엄청난 두께더군요. 토론용으로는 무리이겠고, 덕분에 혼자 야금야금 파먹겠습니다.

穀雨(곡우) 2010-01-28 08:57   좋아요 0 | URL
김훈 선생님의 저 첫문장이 모두를 사로잡았더군요. 언어의 미학의 경지, 뭐 그런...^^
마치 시로 소설을 쓴 것처럼 말이지요. 전 학창시절 배운 김수영 시인의 <풀>을 대하는
느낌처럼 그렇더군요.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야기 속 곳곳에 배치된 김훈선생의 필력이 무엇인지, 이번에 새삼 느꼈지요.

아, 코스모스가 두께감이 있다는 말씀을 제가 드리질 못했군요. 제가 괜히 일만 번거롭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은 읽어봄직하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시길....^^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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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선생의 글에서는 향이 피어오른다. 글로 다듬어 뽑아 올린 힘찬 문장들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린다. 선생의 글을 읽고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의 칼칼한 성격이 오롯이 틀어 박혀 각인된 문장들의 태동과 역동감에 절로 흥분된다. 실제와 당위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움으로 반듯한 원형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천리향처럼 마음 속 울림의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인간의 거친 삶을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조탁하고 드러내 보여주기에 감출 것도 덮을 것도 없음을 이내 알아차린다.




인간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인간은 비루하고 던적스럽다는 선생의 말처럼 삶은 치열하다 못해 버겁기까지 하다. 숭고한 이상도 이념도 삶 앞에선 아무도 어찌할 수 없을 테다. 인간의 삶이 우연성의 우듬지로부터 기인한다면 유약한 본능의 기억은 적나라하게 인간을 괴롭힌다. 선생이 조명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목적을 상실한 허무한 날개 짓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삶이란 것은 적절한 균형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의 상태로 회귀하며 유지하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공존의 삶을 추구하는 항상성일 게다. 그렇기에 인생은 음과 양이 빚어낸 조화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말이다. 해서 제 아무리 암울하고 비열하고 구차한 삶에 쫓길지라도 우린 하나의 희망처럼 꿈을 안고 나아가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설정되고 배치된 인물들의 면면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의 틈바구니를 살아가는 대표적인 캐릭터들의 집합체다. 신념을 목숨처럼 경외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결의를 다지던 그들도 생활의 덫에 걸려 끝없는 추락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런 거창한 명분이 아닐지라도 삶이라는 야수의 추격에 몰려 이러지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군상의 발버둥쯤 아니겠는가. 굳이 특정인물을 끄집어내어 낱낱이 해부하고 까발리지 않아도 우리에게 놓인 삶의 모습이 순탄치만은 않은 현실에 자조해지까지 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이토록 암울하기만 하던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자존심은 개나 줘 버리라는 공지영작가의 말처럼 분노와 울분이 샘솟아 오르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그 속에서 익힌 현실의 관성이 새로운 희망의 싹을 절로 움트게 마련이리라.




현대사를 흔히 질곡의 삶으로 빗대곤 한다. 조선왕조 5백년의 넘지 못했던 신분사회의 갈등구조를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청산하고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화의 물결을 넘었다. 이로 인해 우리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의 근간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분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계급과 계층을 나누고 보수와 진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경계의 벽으로 구별 지었다. 해서 김훈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사회를 재조명하고 인간의 불안정한 내면을 투영하고자 한 것은 인간을 추동하는 본질에 더욱 접근하고자 했음이리라. 더 나아가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자 함도 아니고 바로 살아 내기 위한 몸부림의 현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 公無渡河歌, 여옥의 노래 -




차안과 피안으로 나뉘는 안식의 염원은 강은 건너는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김훈선생은 공무도하가에서 보았듯 강을 건너는 행위의 불안정한 상태의 현실을 이상이 아닌 현세에서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화합과 통합의 바람으로 이끌었다. 그 옛날 중생대 쥐라기시절 공룡이 바다로 향한 까닭과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해골 속에 담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진실의 이면도 현재에서 찾았다.




그러하기에 이 책에서 공무도하의 상징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와 닿는다. 백수광부의 아내 여옥이 남편을 잃은 상실의 아픈 현실과 책 속에 설정된 인물들의 아픔은 오롯이 일치한다. 오금자가 자신의 아들이 키우던 개에 죽임을 당하였으나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 장철수가 노학연대를 배신하고 권력의 끄나풀이 되어 삶의 바닥으로 추락하던 아픔, 박옥출이 현실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캐피털백화점화재사건에서 귀금속을 훔치던 아픔, 후에가 베트남의 지긋지긋한 가난이 생산하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도피하듯 국제결혼을 해야만 했던 아픔. 이 모든 아픔의 실체 또한 포위된 현실의 반영이다.




지지리도 고단한 현실을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그들은 또 다른 삶을 산다. 시종일관 욕지기를 일삼던 편집부 차장의 독백처럼 힘겹고 분투하는 삶이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아픔을 끌어안고 이들은 해망으로 찾아든다. 누구나 아픔은 있듯 복잡다단한 일상의 반복된 역겨움에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 또한 아픔을 안고 산다. 그를 위무하고 보듬어 주는 존재인 노목희 역시 화가로서의 치명적인 아픔이 그러하다. 기실 아픔과 상처는 보듬어 주고 품어 치환을 기대한다. 그들의 엇갈린 삶의 명암도 서로에게 주고받는 교감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에 삶은 순환되어 가는지 모른다. 갯벌의 생태가 자연 치유되고 진화의 지층이 겹겹이 기록된 삶의 반복을 통해 흘러가는 연유이리라.




실제 책 속에 던져진 각자의 아픔은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아픔을 탈피하기 위한 행위가 만든 피할 수 없는 삶의 간극을 메워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의 행위는 가냘프기 짝이 없다. 미 공군 폭격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밤섬의 조차기간동안 해망의 원주민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생태가 변하고 환경이 척박해져 유린된 땅을 목숨처럼 지키던 그들도 미군이 떠난 후 득달같이 밀려들던 개발논리의 강자에 엉겨 붙게 된다. 명분과 신념은 이미 물을 건넜으며 더 이상 알량한 자존심 따위로 수치스러워할 단계는 지난 지 오래다.




결국 삶은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가 남긴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비루하고 던적스럽다. 현상이 달라지면 요구도 달라지고 이유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탐욕으로 얼룩진 뺏고 빼앗기는 약탈의 혐오만이 똬리를 길게 튼다. 김훈 선생이 잘라 보여준 인간의 단면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우리네 삶이다. 자본화되고 이해타산의 논리에 변모하고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상실의 시대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서든 계속된다. 비록 가슴 저린 신산한 삶의 무게가 짓누를지라도 숙명처럼 질긴 연을 이어가는 이유는 살아 있음의 허기로움 때문이다.




이처럼 사유하고 숙고한 흔적이 행간을 따라 겹겹이 쌓인 김훈의 글은 생각의 무게를 더 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상황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속물처럼 더러움에 물들어 타락했든 밥벌이를 위해 살아가든 우리의 삶은 채만식 선생의 레디메이드 인생처럼 허무함만 쌓인다. 이처럼 이 책에 투시된 하류인생의 고통과 연민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계층 간 갈등, 맹목적 탐욕자본주의의 열망은 이 시대가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희망의 싹일지라도 이름 모를 땅에도 꽃은 피고 지리라. 우리에겐 암울한 현실보다 희망의 부재가 주는 절망이 더욱 크다. 그러하기에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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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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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좌표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어디든 신ㆍ구간, 좌ㆍ우간의 자생적으로 피어나는 계층 간의 알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릴 적 기억으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좌로 치우친 사상이나 표현은 이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 시절 목 놓아 자유를 갈구하던 민주열사도 518 학살에 희생된 영혼도 모두 붉었다. 그러했기에 난 붉은 색은 뭐든지 다 삐딱하게 보았고 우리 편이 아닌 반대의 세력으로 인식했는지 모른다.




실제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린 많은 것을 잃고 얻었다. 보수와 진보의 기치 아래 다양한 세력의 물밀듯 터지는 출현을 맛보았다. 바야흐로 이념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해서 현재의 시류를 논하기에는 상당히 예민하고 민감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해서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을 담았고 무엇을 보았는지 고민하기 전에 그 저자가 바로 장정일 작가란 데 있다.




평소 그의 철학이나 신념을 흠모했던 이유도 있겠거니와 차별화된 시각적 통찰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품의 전반을 관통하는 담론과 통찰은 신선한 충격에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10년 만에 쇳물에서 막 달군 쇠막대기처럼 뜨거운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러한 관계로 이 책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가 떠안은 숙명적인 과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감히 꺼내기 힘들었던 현실의 문제를 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마치 황야를 개척하던 프론티어처럼 말이다.




책은 10대 후반의 거침없는 젊은 영혼, 금과 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장소설이다. 금은 민주화의 온기가 숭고하게 흐르는 호남에서 성장하였으며 은은 전통보수 세력이 득세한 영남에서 자랐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자리를 메워 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동성 간의 연인으로 발전할 만큼 각별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자웅동체와 같았다. 여기서 그들을 묶은 커밍아웃은 작가의 의도된 삽입처럼 변형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금과 은의 기질과 성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진보를 상징하는 금은 이상과 열정을 신봉하고 반면 은은 보수에 입각한 현실과 냉정을 열망했다. 그러하기에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은 마치 현재의 우리 사회가 다다른 좌표로 순항하는 도구 내지는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했다. 연상의 추상화가 반고경과 금과의 은밀한 사랑은 끝끝내 이루어 질 수없는 현실도 명분과 실리에 따라 움직이고 모이고 흩어지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대상만 바꾸었지 동일한 모습 그대로의 형국이다.




우린 지난 10년을 민주화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잃어버린 세월이라고도 한다. 양 극단의 이념체의 렌즈를 통해서 본다면 그 미립자는 분명 태양態樣을 바꾸는 변형체임은 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이념을 신봉하는 것은 자유의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 토양은 공정하지 못하다. 좌우를 나누는 경계선도 그렇고 이념을 인식하는 출발부터 불공정한 현실이다. 작중 금과 은이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만나 대립을 청산하고 각자의 이념을 찾아 가는 모습에서 나는 불공정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를 보았다.




제 아무리 은이 보수를 아우르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유주의를 주창할지라도, 또한 금이 잃어버린 진보의 균형을 바로 세우고 모두를 위한 이념으로 무장할지라도 현실은 터무니없이 텁텁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던적스럽고 비루하다고 말하는 김훈작가의 말처럼 현실과 이념 속에 우리가 가진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말 그대로 거추장스러운 일인지 모를 일이다.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느 쪽으로 치우침은 더 더욱 위험하다. 그렇지만 작가는 새로운 우파의 출현에 기댔다.




장정일 작가는 구월의 이틀이란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도 부단히 고민했다. 류시화님의 동명 시에서 그대로 따 온 제목이란다. 굳이 구월의 이틀을 시간의 개념 속에 가두어 둘 필요는 없겠으나 결핍된 현재를 향한 갈망의 흔적이다. 돌이켜 보면 젊음도 이념도 부질없는 인간의 행위와 몸부림에 다르지 않다. 헌데 구월의 이틀 속에 매몰된 우리의 현실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대안으로 역설스럽게도 영라이트(Young Right)의 출현을 반겼다.




세상의 이치가 양과 음을 나누듯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당연지사다. 읽어 내는 자에 따라 그 의미와 해석을 달리 하겠으나 조금은 아쉽다. 독재와 압권에 깨지고 넘어질지언정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고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세상이었음 했다. 난 붉은 것은 모두 빨갱이로 보던 무지몽매했던 그 수치심보다 현재의 방관자의 태도가 더 부끄럽다. 앞서 작가의 희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현실을 바로보고 이상에만 빠지지 말라는 의미로 들린다. 무릇 조화란 균형과 견제를 통한 서로를 인정하고 소임을 다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뼈아픈 진통은 시간의 층위 속에 기억된 유전자적 기록처럼 끝없이 되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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